‘생각’을 생각하다

▲ 뭉크의 ‘니체’.
 까마득한 날에
 하늘이 처음 열리고
 어디 닭 우는 소리 들렸으랴.
 
 모든 산맥들이 바다를 연모해 휘달릴 때도
 차마 이곳을 범하진 못하였으리라.
 
 끊임없는 광음을
 부지런한 계절이 피고선 지고
 큰 강물이 드디어 길을 열었다.
 
 지금 눈 내리고
 매화향기 홀로 가득하니
 내 여기에 가난한 노래의 시를 뿌려라.
 
 다시 천고의 뒤에
 백마 타고 오는 초인이 있어
 이 광야에서 목 놓아 부르게 하리라.
 - 이육사 ‘광야에서’
 
▲글은 은유다
 
 말이란, 공유된 규칙이다. 그러나 말이 오직 소통을 위해 존재하는 규칙이자 지식전달을 위한 규약일 뿐이라고 믿는다면, 새로운 사유의 발달은 없다. 때로 읽어도 해석되지 않는 말과 글을 만날 때가 있다. 말과 말 사이에 심연이 놓인 것 같은 글. 한 줄 시가 그렇고 아이들의 글이 그렇다. 뇌에 과부하를 일으키는 문장들은 문법이 맞지 않거나 낱말이 어려워서가 아니다. 말의 내용이 새롭기 때문이다. 모름지기 인간은 자기에게 익숙한 것에 친숙하고 친숙한 것을 ‘좋다’고 받아들인다. 그러니 읽고나서 직관적으로 내가 ‘좋은 글’ ‘잘 쓴 글’이라고 느끼는 글은 결국 ‘내가 이해할 수 있는 글’이란 말일 터. 그러나 ‘이해하기 쉬운 글’은 다른 의미로 누구나 비슷하게 느끼는 평균적인 생각을 평균적인 표현으로 적은 글이다. 잘 쓴 글이 무엇이던가. 누구나 할 법한 생각을 누구나 알아들을 수 있는 쉬운 문장으로 전달하는 것이 쓰기의 본질은 아니다. 아이들에게 글을 써보자고 하면 아무도 그런 글은 쓰지 않는다. 쓰기란 일반성 속에 갇히지 않는 ‘나’를 찾아내는 길이며, 그 ‘나’의 발견을 통해 수많은 ‘나들’을 발견해가는 일. 세상의 모든 ‘해야 한다.’는 명령과 상식이 언제부터 왜 상식이 되었는지를 따져보는 일이며 “행함”에 대한 스스로의 의미와 기준을 만들어가는 일이다. 그것이 생각이고 쓰기다.

 따라서 모든 글은 은유다. 은유는 사전적으로 전달할 수 없는 의미를 표현하기 위해서 유사한 특성을 가진 다른 사물이나 관념을 써서 표현하는 어법을 뜻하지만, 모든 글쓰기는 확장된 은유다. 연애편지를 적어본 사람은 안다. 유독 사랑 앞에서 머뭇거리는 풋내기 청춘은 ‘그립다’는 말을 못해 ‘밤이 깊었는데 잠이 오지 않는다.’고 쓴다. 표현된 것을 통해 표현되지 않은 의미를 읽는 것이 이해고 사랑이다. 글을 사랑하는 사람은 글자를 통해 글의 배후를 읽는다. 수학자는 숫자를 통해 패턴을 읽는다. 화가는 세상에 깃든 미적인 균형과 조화를 읽는다. 아이들은 경험으로부터 단 하나뿐인 자신들의 사유를 발견한다. 자연도 사회도 관계도 부분들의 합이며 그러한 부분이 모여 전체가 된다. 그리고 전체는 항상 부분의 합보다 크다. 전체에 담긴 ‘그 무엇’을 읽는 것이 통찰이고 사유이며, 그 사유의 결과가 표현이다.
 
▲니체의 생각을 읽었다.
 
 은유의 대가 니체를 읽었다. 니체만큼 다양한 영역에 영향을 끼치고 다수에 의해 추앙되거나 곡해된 사상가가 있을까? 히틀러는 니체의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를 무솔리니에게 선물하며 ‘초인사상’을 웅변했으며 ‘말할 수 없는 것은 침묵해야한다’는 선언으로 유명한 비트겐슈타인의 스승 러셀은 니체를 가리켜 “열정적인 개인주의자이며 영웅 신봉자”라고 슬쩍 비꼬았다. “여자에게 갈 때는 채찍을 들고 가라”는 니체의 말은 또 어떤가. 이 문장을 낱말 그대로 읽은 사람들은 여성비하적인 니체에게 분노했다. 그러나 니체가 평생 사랑했던 여인 루 살로메와 친구 파울 레, 니체가 함께 찍은 사진을 보면 채찍은 니체와 레가 아닌 살로메의 손에 들려 있다. 글은 문장의 합을 넘어선다. 그리고 아이들이 알아야할 것은 문장을 하나의 압축파일로 보는 능력이다. 한 편의 글은 암호를 풀어줄 수많은 생각들을 기다리고 있다. 니체의 글이 특히 그렇다.
 
 나는 사랑하노라.
 행동하기에 앞서 황금과 같은 말을 던지고
 언제나 자신이 약속한 것 이상으로 해내는 자를.
 그런 자야말로 자신의 몰락을 원하고 있기 때문이다.
 
 나는 사랑하노라.
 앞으로 다가올 시대를 반겨 맞이하고
 지난날의 세대를 그 과거의 질곡에서 구제해내는 자를.
 그런 자야말로 현재를 살고 있는 세대에게서 파멸하고자하기  때문이다.
 
 나는 사랑하노라.
 사람들 머리위에 걸쳐있는 먹구름에서
 한 방울 한 방울 떨어지는 무거운 빗방울과 같은 자 모두를.
 그런 자들은 번갯불이 곧 닥칠 것임을 알리며 그것을 예고하 는 자로서 파멸해가고 있으니.
 
 보라, 나는 번갯불이 내리칠 것임을 예고하는 자요,
 구름에서 떨어지는 무거운 빗방울이라. 번갯불 그것이 곧 초 인(超人)이다.
 
 너희에게 말하거니와 춤추는 별 하나를 탄생시키기 위해
 사람은 자기 자신 속에 혼돈을 지니고 있어야 한다.
 너희에게 말하거니와 너희는 아직 그런 혼돈을 지니고 있다.
 
 니체의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에 등장하는 선지자이자 앞으로 도래할 초인, 위버멘쉬를 기다리는 차라투스트라가 시장에서 만난 사람들에게 던지는 말이다. 초인이란 누구인가. 초인은 위대한 자, 인간보다 뛰어난 재능을 가지고 인간을 구제하는 인간을 초극한 그 무엇이 아니다. 초인이 되어가는 과정으로 차라투스트라는 세 가지 단계를 제시한다. 첫 번째가 낙타의 단계다. 말없는 낙타는 큰 눈을 끔뻑이며 타오르는 사막을 건넌다. 그의 마음에는 주인을 향한 복종과 충성이 그의 몸은 무거운 짐들로 가득하다. 책임과 의무는 낙타의 정신을 지배하는 도덕이자 윤리, 목을 축일 잠깐의 오아시스를 지나 그는 다시 길을 걸어가리라. 성실하고 우직한 낙타, 그러나 낙타의 도덕은 타자, 어쩔 수 없어 선택한 주인의 도덕이다. 만약 주인이 짐을 지고 낙타가 주인을 탈 수 있었다면 낙타가 마다했을까? 아니면 그는 무거운 짐을 지고 기뻐하는 마조히스트인가?

 낙타가 사막을 건너는 동안 두 번째 변형이 일어난다. 낙타는 사자가 된다. 사자는 우렁차게 외친다. “나는 하지 않겠다. 나는 주인의 법이 아닌 나 스스로의 입법자가 되겠다.” 사자는 “너는 마땅히 해야만 한다.”는 과거의 망령인 용과 싸우며 주체적 판단과 결단에 의해 기획하고 행위 하는 자다. 그러나 그 또한 초인은 아니니 그의 마음에는 다시 낙타가 되지 않으려는 저항의 찌꺼기 혹은 경쟁의 마음이 남아있다. 명령하는 자라는 정체성, 자기 아이덴티티를 놓지 않으려는 자기 보존에의 의지는 아직 초월하는 자유가 아니다.

 마침내 사자는 어린아이, 초인(위버멘쉬)이 된다. 어린아이는 세상을 가지고 논다. 어린아이는 부처를 만나면 부처랑 놀고, 돌멩이를 만나면 돌멩이와 논다. 쉬움과 어려움을 분별하지 않는 아이는 실패도 성공도 모른다. 아이는 걸을 수 있게 될 때까지 일어서고, 수저를 손에 쥘 수 있게 될 때까지 젓가락과 수저를 바닥에 떨어뜨린다. 아이에게는 그 모든 것이 하나의 과정이며 따라서 놀이, 게임이다. 아이의 내면이 말을 할 수 있다면 이렇게 외치리라. “자! 이렇게 될 것이었던가. 그렇다면 다시 한 번!” 초인은 우리의 이번 생이 영원히 반복되리라는 ‘영원회귀’의 저주를 듣고 웃는 어린아이와 같다. 좋아 그렇다면 다시 한 번!
 
▲표현은 ‘힘에의 의지’를 키우는 것
 
 니체가 인간의 본능이라 칭한 ‘힘에의 의지’를 가장 건강하게 가진 이는 아이들이다. 생명을 유지해가려는 본능은 인간이 아닌 동물도 식물도 가지고 있다. 가령 오늘의 내게 생명을 유지하려는 본능뿐이라면, 몸을 덥히고 맛난 것을 먹고 가진 것을 지켜 무사히 하루를 넘기려는 욕구뿐이라면 그는 인간속의 ‘동물’을 살고 있다. 니체는 이런 본능적 욕구를 ‘보존에의 의지’라 불렀다. ‘보존에의 의지’가 슬픈 건 그 의지의 바탕에 경쟁과 불안이 숨어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어떤 사회는 힘에의 의지가 아닌 보존에의 의지를 통해 개인을 길들인다. 하루 일해 하루를 영위하는 것이 겨우인 사회라면, 그 사회는 인간을 동물로 길들이는 사회다. 그 사회는 인간을 동물로 키우는 사회다. 반면에 ‘힘에의 의지’는 실험하고 시도하려는 의지다. 실험과 시도에는 인간이 두려워하는 불확실함과 불명확성이 있다. 한껏 길들여진 사회는 불확실성을 두려워하는데 그것이 유용(有用)과 무용(無用)의 경계에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무용의 시간을 즐기지 못한다면 유용도 없는 법. 쉽게 얻은 유용은 상품이지 작품이 아니다. 상품은 어딜 가나 똑같이 넘쳐난다.

 힘에의 의지는 새로움을 생성하려는 에너지, 내 안의 감각을 발현하려는 에너지, 그리하여 전에 없던 것이 탄생케 하는 에너지. 내 안의 변화를 만드는 힘은 배움과 모방으로부터 오지 않고 내면의 혼돈 속으로 들어가 보석을 캐내본 작업으로부터 온다. 사유와 사유의 표현은 가르침이 아닌 ‘발견’에서 온다. 일상으로부터 새로운 것을 발견하는 눈을 가진 아이들의 시 세 편 소개하련다. 이 아이들이 작은 니체다. 은유로서의 니체.
박혜진 <도서비평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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