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무도 내게 그것을 말해주지 않았다
이브의 붉은 고통, 누가 공감해줄까?

▲ 생리대 광고는 하나같이 똑같은 이미지다. 은연중에 어떤 여성성을 강요한다.
 “저도 생리를 저주라고 했어요. 마녀가 저한테 저주를 내린 게 틀림없다고 생각했거든요. 잠자는 숲속의 미녀처럼 말이에요. 그렇게 지독한 일이 저한테 일어나는 건 저주 때문일 거라고 밖에는 생각할 수가 없었거든요.”

 지구에 사는 모든 여자들이 생리를 한다. 심지어 영국 여왕마저도. 새삼스러울 것 없는 사실이지만 SF작가 코니 윌리스의 단편 ‘여왕마저도’가 그리는 미래사회에서 여자들은 더 이상 생리를 하지 않는다. 자궁 내벽을 흡수하는 약물 ‘암메네롤’이 개발되자 여성들이 단결하여 해방을 이룬다. 이제 소녀들은 생리를 할 나이가 되면 체내에 ‘회피장치’를 삽입한다. 임신을 하고자 하는 여성들은 원하는 시기에 선택적으로 배란하여 아이를 갖는다.

 여자가 생리를 하는 것이 이상한 일이 된 미래사회. 어느 날 주인공 트레이시의 딸 퍼디타가 생리를 하겠다고 선언한다. 엄마 트레이시를 비롯한 가족 내 대부분의 여자들이 경악하고, 할머니는 손녀를 뜯어말리기 위해 식사 자리를 마련한다. 사이클리스트(cyclist) 퍼디타는 화식주의자 레스토랑으로 모두를 초대한다. 식탁 사이사이 펼쳐진 텃밭들을 넘고 넘어, 양파 밭과 오이온상과 장미덩굴을 지나 뽕나무 아래 테이블로 여자들이 모인다.

 난 어릴 때부터 생리대 광고가 정말 싫었다. 광고의 주인공은 대개 긴 생머리 예쁜 대학생 언니들이고, 옷차림은 하늘하늘 파스텔 톤 블라우스에 치마는 꼭 하얀색이다. 뽀송뽀송 눈부신 햇살 아래 행복한 표정으로, 행복하긴 한데 또 왠지 ‘수줍은’ 미소로 그날이니 순수니 어쩌구 하면서 산뜻하게 상품명을 읊는 것이다. 백이면 백 하나같이 똑같은 광고의 이미지들이 묘하게 불쾌했다. 은연중에 어떤 여성성을 강요하는 것처럼 느껴졌기 때문이다.
 
▶“어릴때부터 생리대 광고가 싫었다”
 
 친구들과 종종 불평했다. 왜 생리대 광고는 두통약이나 위장약 광고처럼 깔끔하게 기능과 효과만을 설명하지 않을까? 그래봤자 흡수력 자랑한답시고 생리대 위에 소주잔만한 컵에 담긴 파란 물감이나 ‘또륵’ 흘리는 게 다겠지만. 답답했다. 생리는 절대 저런 게 아니라고 말하고 싶었다. 실제로는 흰 바지나 치마는 꿈도 못 꾸고, 두껍고 칙칙한 옷 껴입고 뾰루지 난 얼굴은 죽상이 돼서 핫팩 끌어안고 며칠씩 누워있어야 된다고.

 항상 가르친다. ‘생리는 축복이고 출산은 신성한 행위랍니다!’ 우리는 배운다. 별책부록처럼 껴있는 이유모를 부끄러움과 감추는 미덕도 함께 배워야 한다. 자연이 부과한 짐만으로도 충분히 벅찬데 자꾸 추가되는 하등 불필요한 것들 때문에 여자들은 이래저래 피곤하다. 몸이 퉁퉁 붓는, 호르몬이 불안정해지는, 불안발작을 일으키는, 우울증의 원인이 되는, 각종 통증과 불쾌감을 일으키는 것을 우리는 대개 ‘그날’이라고 부른다. 인류의 반절이 겪고 있는 의학적 사실에 은유적 이름을 붙이고, 여성들은 난데없이 수줍어해야 하는 것이다.

 “사이클리스트는 자유를 추구합니다. 인공적인 것으로부터의 자유, 신체를 통제하는 약이나 호르몬으로부터의 자유, 우리를 구속하는 남성들의 가부장제로부터의 자유지요. 여러분도 아시다시피 저희는 회피장치를 착용하지 않습니다.”

 식사 자리에 퍼디타는 나타나지 않는다. 대신 꽃무늬 옷을 입고 손목에 빨간 스카프를 묶은 맨발의 젊은 여성이 테이블로 걸어온다. 분홍색 인쇄물을 한 다발 들고 나타난 그녀의 이름은 에반젤린, 퍼디타의 대변인이다. 그녀는 사이클리스트의 철학에 대해 설명한다. 삶의 자연적인 리듬을 긍정하고 본인의 여성성에 자부심을 느끼는 여성 회원들에 대해서도 말한다. 모두가 시큰둥하게 듣자 대변인은 새로운 요리를 테이블 위로 꺼내놓는다. 여성의 생리 혐오가 남성가부장제의 음모라고 주장한 것이다.

 작가는 작품의 후기에서 이 단편을 쓰게 된 동기를 밝히는데, 한 토론 자리에서 만난 사람의 터무니없는 주장 때문이었다고 한다. 토론자는 ‘남성들이 여성들을 세뇌해서 생리를 추악하고 더럽게 생각하도록 만들었고, 때문에 여성들이 스스로 판단하도록 놔둔다면 생리를 환영하고 기꺼이 받아들일 것’이라 말했다고. 근거도 없을 뿐더러 설득력도 떨어지는 주장이다. 남성 권력이 대체 무슨 이득이 있다고 여성의 생리 혐오를 부추기나.

 하지만 이상하게 마음이 편치 않다. 그러니까, 그렇다고 사이클리스트 대변인 캐릭터 하나 만들어서 그 여자만을 비난하는 게 과연 무슨 의미가 있을까 싶은 것이다. 멍청하다 비웃고 야유하는 것뿐이잖나. 힘을 가지고 있지 않은 자 혹은 집단을 향한 손가락질로 얻을 수 있는 것은 별로 없다. 여성성을 지나치게 숭배하고 신성시 하는 사이클리스트의 철학에 동의하지 않지만, 어쨌든 생리와 출산을 통해 활력과 자긍심을 얻는 여성들도 분명 있다. 그걸 가짜라고 말 할 권리는 누구에게도 없고 말이다.

 “내가 너에게 임신하는 고통을 크게 더할 것이니, 너는 고통을 겪으며 자식을 낳을 것이다. 네가 남편을 지배하려고 해도 남편이 너를 다스릴 것이다.” 이브와 이후에 태어날 모든 여인은 운명에 따라 아기를 낳으며 고통을 겪고 또 그 와중에 죽을 수도 있을 뿐 아니라 삶의 자유까지 영원히 잃어버리게 될 것이었다. 레너드 쉴레인, ‘알파벳과 여신’ 中.
 
▶남성 신이 여성 인간에게 준 벌?
 
 신이 인간을 창조한 순간으로 돌아가 볼까. 야훼는 정성 들여 아담을 만들고 아담의 갈비뼈 한 조각을 뽑아 이브를 만들었다. 그 다음 둘을 에덴동산에 풀어놓았다. 절대 선악과만은 먹지 말라는 명령과 함께. 뱀의 유혹에 넘어간 이브가 선악과를 먹고 또 아담도 먹는다. 명을 어긴 둘에게 야훼는 벌을 내린다. 아담과 이브는 세상 모든 슬픔과 괴로움과 죽음을 알게 되었다. 신은 아담에게 일하는 고통을, 이브에게는 출산의 고통을 준다.

 출산의 고통이 남성 신이 인간 여성에게 주는 가혹한 벌이라…. 정신건강에 좋지 않은 발상이다. 차라리 외딴 숲속 이름 모를 마녀의 저주인 편이 낫겠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이건 어디까지나 인간의 진화 과정에 대한 구약의 은유일 테다. 원시 인류가 직립 보행을 하자 태아의 두뇌가 커졌고, 그때부터 암컷들에게 출산은 생사를 오가는 위험천만한 일이 되었다. 그렇다. 지구의 수많은 생물 가운데 인간 여성만이 출산 때 엄청난 고통을 겪으며, 또 이로 인한 사망률도 높다.

 하지만 지구에 사는 인간 여성 중 한 명인 나는 이러한 사실을 학교에서가 아니라 집에서 책을 읽고 처음 알았다. 내가 기억하기로 나는 초등학교 5학년 때 학교에서 처음 성교육을 받았는데, 아마도 2차 성징이 시작되는 시기였기 때문이었으리라. 여학생 남학생 따로 교육을 받았다. 아무튼 학교에서는 그때부터 일 년에 한두 번씩 꼭 성교육을 한답시고 매번 똑같고 지루한 VCR을 틀어줬다. 아이들한테는 시답잖은 농담이나 하면서 떠들고 노는 시간이었지만.

 문득 중학생 때 성교육 시간이 떠오른다. 여자중학교였고, 낙태를 소재로 한 다큐멘터리 동영상을 틀어줬었다. 지금도 생생히 기억나는 게, 낙태 수술 장면을 모자이크 없이 그대로 보여줬다. 그것도 ‘아주 자세히.’ 아이들은 태아가 수술 기구를 피해 도망가려고 발버둥을 치자 ‘어떡해’를 연발하며 소리를 지르고 눈을 가렸다. 마침내 화면 속 조그만 태아의 몸이 조각조각 잘려나가자 비위가 약했던 내 짝은 결국 책상에 토했다.

 그날 동영상을 보며 우리는 닥치지도 않은 상황에 공포감을 느껴야 했고, 뱃속에 생기지도 않은 아이에게 죄책감을 가져야 했다. 물론 책임감 있는 어른이 되기 위해 필요한 과정이었을 수도 있다. 나를 비롯한 친구들은 생명의 무게에 대해 각자 나름대로 가볍거나 무거운 책임감을 느꼈다. 그렇다고 끔찍하고 잔인한 장면을 전시함으로써 교훈을 주는 것이 딱히 좋은 방법이었다고는 생각하지 않지만 말이다.

 그러나 어쩌면 더욱 중요한 것은, 우리가 다른 많은 것들을 배우지 못했다는 사실이 아닐까. 예를 들면 아이를 낳을 때 과다출혈로 인해 심각한 생명의 위협을 받을 수도 있다는 것을, 낳은 뒤 각 신체기관의 후유증이 상당히 오래가며 뒤늦게 사망하는 산모들이 많다는 사실을, 출산 후 겪게 될 경력 단절을, 낙태를 한다면 그 죗값은 여성과 의사만이 지게 되는 법의 구조를, 미혼모가 되어 겪어야 하는 사회적 차별을.
 
▶알려주고 싶은 것만 알려주는 사회
 
 “아네트는 당시 모든 여자애들의 이상이었단다. 아네트의 머리는 곱실거리고 가슴도 크고 주름치마도 항상 잘 다려입었어. 그래서 난 아네트가 그렇게 지저분하고 품위 없는 짓을 하리라고는 도저히 상상할 수가 없었어. 디즈니 씨가 그런 짓은 절대로 용납하지 않았을 테니까 말이야.”

 ‘여왕마저도’의 결말을 말하자면, 퍼디타는 결국 생리를 하지 않기로 결정한다. 마지막에 엄마 트레이시와의 전화통화에서 퍼디타는 말한다. “출혈이라뇨? 아무도 피가 난다는 이야기는 안 해줬는데!” 어이없어하는 엄마에게 딸이 결정적 한 방을 날린다. “엄마는 항상 우리한테 아무것도 이야기 안 해줘!” 물론 그녀는 딸에게 수차례 설명하고 경고했다, 딸이 듣지 않았을 뿐. 그러나 아무것도 알려주지 않는다는 퍼디타의 한마디가 나는 어떤 상징처럼 들린다.

 내가 겪어야 할 약 3000일의 현실을 곱씹어본다. 그리고 ‘소설의 세계관처럼 언젠가 정말 암메네롤과 회피장치가 개발된다면?’ 하고 상상해본다. 이런저런 생각이 들지만 결론은 간단하다는 걸 안다. ‘자기결정권’이다. 생리를 회피하든 어쩌든, 또 아이를 낳든 안 낳든 모든 건 개인의 선택인 것이다. 나는 내 몸을 마음대로 할 수 있는 권리가 있고, 국가도 정부도 다른 어떤 무엇도 내 몸에서 일어나는 일에 간섭할 수 없다.

 문제는 지금이다. 암메네롤이고 회피장치고 아무것도 없는 지금. 알려주고 싶은 것만 알려주고 진짜로 알아야 할 것들은 알려주지 않는 지금. 여전히 여성의 몸은 필요에 따라 신성해지기도 추해지기도 한다. 난 항상 선택적인 교육을 받았고 지금도 별반 다르지 않다. 이유는 공공의 이익에 불리하기 때문이라고밖에 생각할 수 없다. 그렇다면 우리가 겪는 고통은 누가 공감해주는가? 또 우리가 겪는 불합리와 불평등에 대해 누가 죄책감을 느껴줄까?
김연우 <조선대 국문과 2년, 청년인문학 소피움 연구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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