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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년의 눈, 청년의 인문학]‘걸리버 여행기’ & ‘학술원에 드리는 보고’
야후여, 초라한 자유를 거부하라!
이성을 가진 인간, 무엇을 부끄러워해야 하나
김연우
기사 게재일 : 2018-05-14 06:05:01
▲ 중국인 사진 작가 추용치(Yongzhi Chu)가 중국 쑤조우(Suzhou)써커스에서 촬영한 사진. 고작 술마시는 걸 가르치려고 거리낌없이 원숭이의 살을 파이프로 지질 때 인간은 원숭이가 된다.
 나는 사람들을 무척이나 사랑하고 있었지만, 추악한 야후들에 관해서라면 그렇게 지긋지긋한 감정을 느껴본 적이 없었다고 솔직하게 시인한다. 내가 말들의 나라에 머무르는 동안, 야후들과 가까이 지낼수록 나는 그들을 더욱 미워하게 되었던 것이다. 조나단 스위프트, ‘걸리버 여행기’ 中.

 작은 사람들의 나라, 큰 사람들의 나라, 허공에 떠있는 섬나라를 거쳐 걸리버가 마지막으로 도착한 곳은 ‘휴이넘’이라는 말들이 지배하는 나라였다. 이 섬에는 ‘야후’라 불리는 짐승들도 사는데, 다름 아닌 야만의 인간 종족이다. 이성을 가진 말들이 털 난 인간들을 다스리는 세계. 처음 섬에 도착해서 휴이넘을 만나고 걸리버는 생각한다. ‘말들조차 이렇게나 훌륭한데 이들을 지배하는 인간은 얼마나 대단한 종족일까?’ 하지만 애석하게도 그를 기다리고 있는 인간들은 더럽고 사납고 간사하고 멍청한, 나쁜 것이란 나쁜 것들은 다 가진 최악의 존재들이었다.

 걸리버는 휴이넘의 말을 익히고 흉내 낼 수 있었기에 그들과 함께 생활할 자격을 얻었다. 그는 자신을 돌보아주는 한 휴이넘을 주인이라 부르며 따른다. 걸리버에 대해 이것저것 궁금해 하는 주인에게 그는 영국의 인간들에 대해 이야기해준다. 주인과 대화하면서 걸리버는 깨닫는다. 영국의 인간들은 이 섬의 야후만큼, 아니 어쩌면 더 혐오스러운 존재란 것을. 얘기하면 할수록 그는 인간인 자신이 부끄러워진다. 옳고 그름을 알지 못하는 자들, 알면서도 짐짓 모른척하며 정답을 쥐고 흔드는 자들, 이성을 악용하여 무지한 이들을 지배하는 권력자들, 또 무고한 피해자들. 이성을 가진 야후가 지배하는 세상은 이렇게 이루어져 있었다.
 
▲이성을 가진 말, 털 난 인간 지배
 
 저는 출구가 없었습니다. 때문에 어떻게 해서든 출구를 하나 마련해야 했지요. 언제까지고 그 궤짝 벽에 들러붙어 살아야 했다면 저는 그만 죽고 말았을 겁니다. 그래서 저는 원숭이이기를 포기하겠다고 마음먹었습니다. 그건 정말이지 너무나 똑똑하고 멋들어진 생각이었습니다. 프란츠 카프카, ‘학술원에 드리는 보고’ 中.

인간이 야후만큼, 아니 어쩌면 더 혐오스러운 존재란 것을…얘기하면 할수록 걸리버는 인간인 자신이 부끄러워진다.

 어느 황금 해안에 살던 원숭이 한 마리가 인간들에게 포획된다. 선박에 태워진 원숭이는 사방이 막힌 우리에서 탈출하기 위해 인간이 되기로 결정한다. 그는 인간들이 하는 행동을 하나하나 관찰하고 흉내 내기 시작한다. 원숭이가 배운 것들은 대충 이렇다. 악수하기, 침 뱉기, 담배파이프에 불붙이기, 술병을 들고 술 마시기. 특히 이 마지막 술 마시기에서 원숭이는 고전을 겪는다. 술병에서 나는 고약한 냄새가 참기 어려웠던 것. 그런데 한 남자가 그의 스승을 자처하고 나선다. 남자는 원숭이를 열심히 돕는다. 불붙은 담배파이프로 원숭이의 살을 지지면서.

 우리에 갇힌 원숭이를 구경하며 깔깔대는 인간들. 쇠창살 너머로 물끄러미 그들을 바라보는 원숭이 한 마리. 그는 우리의 조상, 우리의 거울. 훗날 원숭이는 혹독한 노력 끝에 유럽인들의 평균치 교양에 도달한다. 학술원은 그에게 원숭이 시절에 대해 보고하라고 요구한다. 후손들의 얼굴을 하나하나 응시하던 그가 입을 연다. 원숭이의 입에서 나온 말들은 신사들의 어떤 기대에서 한참 벗어난 것이었다. 그는 말한다. 당신들이 대단하거나 위대해보여서 따라한 게 아니라고. 당신들의 포악한 손아귀에서 살아남기 위해 당신들과 똑같아지는 방법을 선택한 것뿐이라고.

 원숭이는 단지 생존전략으로써 인간이 되기를 선택했다고 말한다. 이성은 원숭이가 선택한 출구였고, 그걸 가지는 일은 문을 열고 도망치는 초라한 행위였다. ‘슬그머니 달아난다’고, 그는 그렇게 표현한다. 오스트랄로피테쿠스가 호모사피엔스사피엔스가 되는 위대한 순간이 이토록 보잘 것 없어지다니. 하지만 어떤 면에서 인간은 오히려 원숭이 때보다 퇴화한 게 맞다. 굳이 따지면 근육이나 골격은 마이너스, 시력과 언어능력은 플러스. 그리고 대망의 굵어진 머리! 이렇게 표현하니까 왠지, 진화가 그냥 약삭빨라진 ‘변이’ 같은데? 그리고 또 하나 결정적인 것은 이 모든 변이가 지구에 사는 나머지 생명체들 입장에선 재앙이었다는 사실.
 
▲“당신들이 위대해서 따라한 게 아니다”
 
 진화는 결국 인간의 입장에서나 위대한 역사다. 어쨌든 이 진화란 것을 거듭할수록 인간의 신체는 부드럽고 또 연약해졌다. 몸뚱이는 쓸모없는 껍데기, 알맹이는 오직 그 안의 두뇌. 이제 인간을 지키고 앞으로 나아가게 하는 것은 이성이다. 이성은 인간과 동물을 구분하는 가장 특별한 기준이 되었다. 현존하는 대다수의 인간들이 이것을 퍽 자랑스럽게 여긴다. 글쎄 과연 자랑스러울까? 유일무이 이성적 존재면 뭐하나. 지상 위 불필요한 욕망에 허덕이는 동물은 오직 인간뿐이고, 불필요한 싸움을 하는 동물도 인간뿐인 걸.

 주인은 우리를 아주 작은 분량의 이성을 부여받은 동물이라고 말했다. 하지만 우리는 이성을 좋은 일에 사용하지 않았다. 오히려 부정을 더욱 악화시키고 새로운 잘못을 만드는 일에 이성을 사용했다는 것이다. 자연이 우리에게 부여한 좋은 능력을 잃어버림으로써 인간의 단점은 더욱 늘어났으며, 아무런 소용도 없는 발명품에 의해 자신의 단점들을 메우려고 노력한다고 말이다. 조나단 스위프트, ‘걸리버 여행기’ 中.

 확실히 인간은 짐승과는 다른 존재가 되었다. 그러나 아무도 모른다. 인간이 짐승이 되는 일은 지금도 순식간에 일어난다. 고작 술 마시는 걸 가르치려고 거리낌 없이 원숭이의 살을 파이프로 지질 때 원숭이가 된다. 훌륭한 말들 위에 군림하는 더 높은 인간들이 당연히 있다고 믿을 때 야후가 된다. 어떤 종이든 생명체를 쉽게 나보다 하위에 두는 태도는 오직 이성을 가진 인간만이 보여주는 야만적인 행동이다. 그렇다, 인간의 이성은 결코 완벽하지 않다. 협소하고 불완전해서 끝도 없이 부산물을 만들어낸다. 나쁜 것들이 그 빈틈을 놓치지 않고 파고든다.

 이성의 넓은 범주 안에 부끄러움도 있다. 때문에 이성을 갖는다는 건 뭐가 창피한지를 아는 것이기도 하다. 그렇다면 이성적 존재인 인간은 무엇을 부끄러워해야 하는가? 단지 아무 것도 안 걸친 맨몸만을 부끄러워하는 게 인간이라면 가망이 없다. 몸뚱이가 아닌 뇌 속이 발가벗겨지는 것, 그 안의 빈약한 사고를 내보이게 되는 것, 그래서 실은 자기 존재가 보잘 것 없다는 게 까발려지는 것. 수치라면 이런 게 수치겠지. 하지만 그보다 먼저, 원숭이의 뺨과 아랫도리에 박아 넣은 총알에 얼굴을 붉히고 그 상흔 앞에 고개를 수그리자. 정말로 우리가 이성 있는 존재라면.

 제가 말하는 출구란 사방이 훤하게 뚫려있어 어디로든 갈 수 있는 자유라는 저 위대한 사상을 가리키는 것이 아닙니다. 원숭이였을 때 이미 저는 자유에 대해 알고 있었던 것 같습니다. 그리고 그것을 동경하는 인간들도 알게 됐죠. 하지만 저는 그때나 지금이나 자유를 갈망하지 않습니다. 말이 나왔으니 말인데, 인간들은 이 자유라는 것에 너무도 자주 기만당하는 것 같습니다. 프란츠 카프카, ‘학술원에 드리는 보고’ 中.
 
▲“고작 이딴 게 자유라니…”
 
 이토록 나쁜 것투성이인 인간이 ‘자유’라는 거대하고도 숭고한 개념을 만들어냈다. 확고부동한 형태가 없는 이것은 사람마다 떠올리는 이미지가 다르고 때에 따라 변하기도 한다. 난 글쎄, 아마도 지금 떠오르는 건 올림픽일까. 겨울방학은 재밌는 경기들을 맘껏 볼 수 있어서 즐거웠다. 그날도 스포츠 뉴스를 훑는데 사진 한 장이 눈에 띄었다. 빨간색 유니폼을 입고 찍어낸 듯 똑같은 미소로 일사분란 춤추고 노래하는 북한 응원단, 그 앞에 서있는 거구의 한 남자가 찍힌 사진이었다. 김정은 코스프레를 하고 나타난 남자는 만족스러운 듯 활짝 웃고, 그를 목격한 응원단 몇 명의 얼굴이 순식간에 굳는다. 흥미진진한 상황을 관음 하는 댓글들도 잔뜩.

 ‘자격 없는 권력자는 나가라!’ 사람들은 광장에서 함께 소리 지르고 웃고 노래하고 춤췄다. 저기 저 높고 푸른 궁궐에 숨어서 지켜보는 누군가는 식은땀 좀 흘렸을 테지. 아름다운 순간이었고 빛나는 무대였다. 그런데 그 위대한 공연의 관중이 우리와 마찬가지로 권력에 억압당하는 이들이 되자 순식간에 모든 것이 초라해진다. 강자를 공격하는 ‘조롱’이라는 무기가 약자를 향하니 오싹하기까지 하다. ‘자유의 맛을 봐라!’ 달린 댓글 하나. 기자들은 여자화장실까지 들어가 셔터를 눌러댔고, 이내 그녀들이 묵는 호텔방 창문을 찍기에 이르렀다. 누군가를 따라할 자유, 사진을 찍을 자유. 고작 이딴 게 자유라니.

 역사의 발자취를 되짚어본다. 피 흘린 자들이 벌인 투쟁은 금은보화를 얻기 위한 투쟁이 아니라 제대로 숨을 쉬기 위한 투쟁이었다. 그들이 얻고자 한 자유는 게임의 스코어가 아니라 게임에 참가할 수 있는 자격이었다. 그러나 애석하지만 지금도 자유는 복권에 당첨되는 방식으로 주어진다. 운 나쁘면 누구든 공산주의 국가에서 태어날 수도 있었으니까. 보이지 않는 끔찍한 현실은 모른척하면서 단지 운이 없었을 뿐인 자들을 원숭이 보듯 구경거리 삼고 비웃는 저의가 뭐지? 인간이라면 자존심이 있을 텐데. 저들이 뽐내듯 자랑하는 자유가 내 눈에는 초라하지 그지없다.

 태어난 모든 아이들에게 마땅히 자유로울 권리를 가르쳐온 인간이, 자신보다 자유롭지 못한 이들을 보고 연민이나 동정이 아닌 우월감과 만족을 느낀다면 어떻게 해야 하나. 이런 꼴을 볼 때면 인간과 인간이 가진 이성에 대한 회의를 피할 수 없다. 스포츠게임에서 메달을 따고 순위를 겨루듯 자유를 말하는 저들을 보며 생각했다. ‘빛나는 돌에 집착하는 것이 딱 야후로구나.’ 뭐가 부끄러운지를 모르는 인간들이 너무나 많다. 내가 지금 잘 먹고 잘 사는 북쪽 부르주아들 걱정하나? 아니, 그들을 걱정한다기보다 우리를 걱정하는 것이다. 주위를 슥 둘러보면, 비슷하거나 더 나쁜 일들이 수도 없이 일어난다. 여기 리퍼블릭 오브 코리아에서도.

 인정 욕구와 우월감이 발전의 원동력이 되어서는 안 된다. 진화든 투쟁이든, 우리가 하는 것이 뭐든 말이다. 자신보다 우월한 존재에게 인정을 받고 싶은 욕구, 자신보다 열등한 존재를 보며 느끼는 우월감과 만족. 인간의 앞날을 지탱하는 게 이런 거라면 그 미래는 언제나 디스토피아일 것이다. 인간은 때로 인간인 것이 비참하다. 차라리 영영 원숭이로 남는 게 낫겠어, 아님 휴이넘의 종으로 살던지. 그러나 인간은 기어코 출구를 찾고 문을 열어 밖으로 나온다. 좋든 나쁘든 하고야 마는 것도 인간이니까. 그렇다면 이토록 출구를 찾아 헤매는 이유는? 우리는 무엇을 위해서 진화해야 하나?

원숭이는 말한다. 당신들이 대단하거나 위대해서가 아니라, 그저 포악한 손아귀에서 살아남기 위해 당신들과 똑같아지는 방법을 선택한 것뿐이라고.
 
▲ 초라한 자유를 위해 진화하지 않기
 
 답은 간단하다. 우리는 우리 자신과 서로를 구하기 위해 진보 발전해야 한다. 염세적 상상인데, 휴이넘같이 고등한 이성적 존재가 나타나 보호자를 자처하며 인간을 다스리려 한다면. 그때 인간이 반박 한 마디라도 제대로 할 수 있을까? 하지만 우주에 인간밖에 없다고 해도 인간이 다시 원숭이 시절로 돌아가진 않을 것이다. 야후가 돼서 엉망진창 살지도 않을 테고. 그래, 사실 인간은 언제나 출구를 찾아왔다. 국가도 법률도 화폐도 출구, 술도 담배도 선상파티도 출구. 원숭이든 인간이든 둘 다 가만히 앉아 죽진 않았다. 단지 차이는, 한쪽은 그게 출구일 뿐임을 알았고 다른 한쪽은 자만했다는 것이겠지.

 파이프로 원숭이의 살을 지지던 남자는 얼마 안가 자기가 짐승처럼 돼버렸다. 집에 돌아온 걸리버는 모든 사람들이 짐승으로 보여 결국 자신의 서재로 숨는다. 스스로 감옥을 만들어 고립되는 것을 자초한 그들의 결말. 사람들 눈에 영락없이 미친 사람이 돼버린 둘의 마지막이 기묘하고 슬프다. 걸리버는 매일 거울을 들여다본다. 야후 한 마리가 그를 기다리고 있다. 고매한 정신이 마치 신과 같은 휴이넘과 달리, 불필요한 욕망과 불완전한 이성을 가진 동물. 물 흐르듯 아름답게 해결되는 건 아무 것도 없다. 고군분투 생지랄 해야 한다. 일생을 출구 찾아 헤매는 것이 야후의 운명이다.

 쇠창살 너머로 원숭이는 인간의 눈동자 속에 자유가 없음을 꿰뚫어본다. 우리는 그의 거울. 그는 우리의 거울. 배에서 내린 원숭이는 또 한 번 결정의 기로에 선다. 동물원이냐 쇼 무대냐. 원숭이는 쇼 무대를 선택한다. 동물원은 또 다른 우리일 뿐이라고 판단했던 것이다. 그의 독자적인 결정에 인간 따위인 내가 반박할 자격 없다. 그러나 원숭이든 인간이든, 가끔 우리를 출구로 착각하고 출구를 우리로 착각한다. 실은 말이야, 지금 찾은 이 출구가 또 다른 감옥으로 통하는 문일지도 몰라. 열쇠라고 믿었던 것이 옆 친구의 뱃속을 뚫는 총알일지도 몰라.

 그래도 인간은 계속해서 출구를 향해 나아간다. 그래야 살 수 있으니까. 야후가 야후의 머리로 출구를 열고 또 연다면, 거기에는 야후만의 자유가 있지 않을까? 야후는 어떻게 해서든 야후만의 몸짓으로 재주를 넘고 소리소리 지르고 앞으로 나아가지 않을까? 상상 가능한 유일의 해피엔딩. 하지만 먼 여정을 떠나기 전에 우리 약속하자. 초라한 자유를 위해 진화하지는 않기로. 원숭이로 빽 할지언정 총알 쏴대고 모르는 척하는 야비한 야후로 살지 않기로. 자만에 빠진다면 스스로의 이마를 때리자. 뚫린 게 주둥이가 아니라 입이라면 당당히 외치자. ‘그건 자유가 아니야!’
김연우 <조선대 국문과 3년, 청년인문학 소피움 연구원>Arra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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