버스 가득 시어를 싣고, 인생 가득 리듬을 타고
영화 속 시인에게 시 한 수 올리다

▲ 마그리트의 ‘심금’이 인쇄된 엽서 한 장. 시원하고 달콤한 아이스크림 한 스푼 떠먹이고 싶었을 마음이 가득 차있다.
 우리 집에는 성냥이 많다.
 우리는 성냥을 언제나 손닿는 곳에 둔다.
 요즘 우리가 좋아하는 제품은 오하이오 블루 팁.
 훌륭하게 꾸민 견고한 작은 상자에는
 짙고 옅은 푸른색과 흰색 로고가 확성기 모양으로 쓰여 있어
 마치 세상을 향해 크게 외치려는 듯하다.
 여기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성냥이 있어요!
 차분하고도 격렬하게 오래도록 불꽃으로 타오를 준비를 하고.
 사랑하는 여인의 담배에 불을 붙여줄지도 몰라요.
 난생처음이자 다시없을 불꽃을.
- 패터슨의 사랑 시, ‘Love Poem’
 
 패터슨 시에는 패터슨이라는 이름의 버스기사가 산다. 그는 특별할 것 없는 일상에 리듬을 넣는 법을 알고 있다. 아침에 눈을 뜨면 옆에 누운 아내의 어깨에 입을 맞추고, 출근해서 불평불만 털어놓는 동료에게 가볍게 인사를 건네고, 운전하며 손님들의 대화를 엿듣거나 사색. 문득 떠오른 시 구절을 계속 다듬고, 집에 오면 삐뚤게 기운 우체통을 낑낑대며 바로 세운다.

저녁을 먹은 뒤 시에 한두 행을 더 추가, 깜깜해지면 강아지와 산책을 나가 여느 때처럼 바에 들러 맥주라도 한 잔. 그의 자작시 노트에는 사랑하는 아내를 위한 것도 있고, 그 누구를 위하지도 않은 것도 있다. 대체로 평범하고 지루한 일상. 누구나의 인생처럼.
 
▲이상한 것이 이상한 곳에 있어 숨통 트이게
 
 눈을 뜨면 또 시작이다. 못지않게 평범하기 짝이 없는 나의 하루가. 오후수업이 있는 아침 느지막이 일어나 침대 머리맡을 멍하니 보는데 갑자기 또 벽이 맘에 안 든다.

거기에는 지난여름 끔찍했던 더위와 살인적인 습기를 떠올리게 하는 울어버린 각종 엽서들과 잡지조각들이 덕지덕지 붙어있다. 느낌이 올 때 해야지. 바로 죽죽 대충 뜯어내 지저분해진 벽에 아랑곳 않고 또 새 것들을 척척 붙인다. 나름 보기 좋군. 좋아하는 영화 포스터, 명화 엽서, 여행 갔을 때 사먹은 초콜릿 포장지 등 다양하다. 마그리트 엽서가 있다면 좋았을 걸. 인터넷을 아무리 뒤져봐도 마그리트는 없었다. 고흐나 모네는 차고 넘치도록 많은데.

 고흐는 너무 흔하다. 하도 많이 봐서 지루하기도 하고. 나 참 생전에 고흐가 이 얘기를 들었다면 얼마나 어이가 없었을까. 자기 그림이 이렇게나 팔릴 걸 알았더라면…에이 의미 없어. 아무튼 난 마그리트가 좋다.

원래도 좋았지만 요새 특히 좋아졌다. 뭐랄까. 이상한 것이 이상한 곳에 있어서 숨통을 트이게 한 달까? 나를 견디게 한 달까. 그의 그림을 보면 가슴이 시원하고, 때론 울컥하고, 때로는 텅 비워져 산뜻하고 상큼하다.

분명 아무 감정도 없는 듯 보이는 곳에서 묘한 감정이 싹트는 게 흥미롭다. 그러나 마그리트 그림 중에서 유일하게 선명한 감정을 내뿜는 작품이 있다. 내 개인적인 추억으로 인한 착시지만.

 초등학교 때 국토횡단을 갔었다. 인천에서 독도까지 코스였는데, 열두 살이 겪기엔 극심한 고통의 경험이었다. 힘든 일정이 다 끝나고 이틀 남은 날 동해에서 보급품을 받았다. 과자와 양말이 잔뜩 담긴 상자 구석에서 꺼낸 두꺼운 편지봉투. 그 안에는 엄마아빠의 편지와 함께 마그리트의 심금이 인쇄된 엽서 한 장이 들어있었다.

그때부터 초원 위에 서있는 큰 유리잔은 언제나 정확한 감정을 담는다. 거기에는 태어나서 한 번도 안 겪어본 온갖 고생을 다 겪고 있을 딸에게 시원하고 달콤한 아이스크림 한 스푼 떠먹이고 싶었을 마음이 가득 차있다.

난 요새 환생을 좀 믿는 편인데, 만약 다음 생이 있다면 엄마랑은 옆집 또래로 태어나서 실컷 수다나 떨었으면 좋겠다. 모녀의 징글징글한 가슴앓이는 다 집어치우고. 단, 그때까지 지구가 멸망하지 않아야겠지만.

 문자학개론을 들으러 가면서 유튜브로 동영상을 본다. 거북이 한 마리가 코에 빨대를 꽂고 피를 흘리며 괴로워한다. 섬뜩하다. 가여운 거북이는 인류의 종말을 선언하는 게 아니라 단지 괴로워할 뿐인데. 그 옛날 삶아 말려진 수많은 거북이 등껍데기 위에 자신들의 운을 점치던 인간은, 이제 매일 커피를 마시며 일회용 플라스틱 빨대를 거북이 코에 꽂는다.

그러고 보니 몇 십 년 뒤면 빙하도 다 녹는다던데. 죗값 받는 거지 뭐. 지옥에 가면 내 죄목은 ‘열정 없음’이려나? 다른 동물들의 것을 가차 없이 뺏고 긁어모아 호화롭게 살아도 외롭고 허무하고, 그때나 지금이나 앞날은 깜깜하고, 완벽히 행복해지지도 않아서 계속 뭔가를 갈구하는 인간이란 존재.
 
▲아직 죄책감은 멸종하지 않았다
 
 유행어에 둔감해서 ‘소확행’이란 말을 최근에야 들었다. 소소하고 확실한 행복이라. 그래 우린 모두 어린이었고, 스케치북에 가지가지 색깔로 무엇이든 그리며 콩알만 한 머리와 손바닥만 한 가슴에 원대한 꿈을 품었지. 그 꿈은 더 거대한 세상 속에서 걷어차이고 차여 생채기투성이가 되었고, 버렸다 주워 담기를 반복하며 금세 때 타고 초라해져버렸다.

그때부터 사람들은 큰 것 보다는 작아도 내 손안에 확실히 들어오는 즐거움, 꽉 쥐고 안 놓칠 수 있는 행복을 찾기 시작했다. 현대인이라면 뼛속 깊이 이해하는 감정들. 방 벽을 자꾸 못살게 구는 것도 좋아 하는 것들을 손쉽게 간직하려는 행위. 눈을 감으면 근사한 꿈이 찾아온다니까. 멋진 영화배우가 내 방에서 살게 된다니까.

 서양학 교양수업 교수님 머리모양 꼭 컵케이크 같다. 패터슨의 아내가 만들던 컵케이크. 똑같은 맛 무늬만 다른 컵케이크. 대체 왜 저렇게 놔뒀을까? 나라면 차라리 다 밀어버릴 텐데. 그래도 저 나이에 스킨헤드는 어렵겠지.

그러고 보니 부실대학 뉴스가 언제 나왔더라? 방학 때인 건 맞는데. 나 참 등록금 낼 맛 떨어지게. 따지고 보면 내가 내는 게 아니라 아빠가 내는 거지만. 말을 거의 형태소 단위로 더듬는데 그냥 가만히 듣고 있다.

맨 뒷자리에 앉으면 보인다. 학생들 정수리에서 나오는 자괴감, 회의, 권태, 죄책감 같은 게 교실을 둥둥 떠다니는 광경이. 수업자료도 인터넷에서 복사 붙여넣기라, 너무하시네요. 나는 초인적인 힘으로 당신 말에 귀 기울이는데 왜 당신은 내 기분을 헤아리지 않나요? 아, 내 등록금.

 거북이들도 불쌍하고 하니 요새는 물에 녹는 쌀로 만든 친환경 빨대가 유행이다. 그래 아직 죄책감은 멸종하지 않았다. 삶으면 먹을 수도 있다는 정보가 돌자 유튜버들은 즉시 빨대로 파스타를 끓인다. 며칠 전 아빠는 내게 ‘병맛’의 의미를 물었다.

아빠는 똑같은 말이 욕으로도 칭찬으로도 쓰인다는 걸 도무지 이해 못했다. 그래 이게 딱 병맛인데. 여름은 점점 뜨거워지고 빙하도 곧 끝장인데 이럴 바엔 빨대로 파스타라도 끓여야, 신도림역 안에서 스트립쇼는 못해도 이 따위 뻘짓이라도 해야 직성이 풀리는 기분일 때가 있다

인간은. 그런데 이 파스타 의외로 맛이 괜찮잖아? 씹는 맛도 있고. 어쨌든 악센트가 필요하다 현대인은. 말하자면 노트 귀퉁이에 교수님 욕이라도 쓰지 않고는 못 버틴다.

여기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성냥이 있어요 차분하고도 격렬하게 오래도록 불꽃으로 타오를 준비를 하고 사랑하는 여인의 담배에 불을 붙여줄지도 몰라요 난생처음이자 다시없을 불꽃을. - 영화 속 패터슨의 사랑 시, Love Poem
 
▲비밀노트에 담긴 시어들을 내놓으려니…
 
 동료가 거칠게 뱉는 욕은 한편의 시가 되고, 강아지가 찢은 종잇조각은 한 폭의 그림이 되고. 패터슨의 아내는 어차피 똑같은 맛의 컵케이크인데도 신나게 몇 박스씩 만든다. 까만 건 초코크림 하얀 건 바닐라크림. 색깔은 흑백 단순, 그러나 기하학 무늬들은 하나하나 특별하다.

꿈도 열정도 없다고 그렇게들 손사래 치지만 너도 나도 각자의 시를 쓰고 산다. 장롱 구석에 처박힌 작은 박스엔 옛날부터 적었던 메모들이 가득 들어있어서 가끔 꺼내 읽어본다.

어젯밤엔 중학생 때 적었던 걸 발견했는데, 평범한 주인공이 나오는 평범한 영화를 보고 적었던 것. ‘특별할 것 없는 하루하루일지라도 모양과 색깔은 제각각이니, 다 모이면 알록달록 멋진 조각보가 되지 않을까?’

 그래 이런 깜찍한 생각도 했단 말이지. 근데 지금 이 글도 시간이 지나면 유치해지겠지. 하지만 그때 그 영화를 보고 난 내 인생도 마침내는 뭔가 괜찮은 결과물이 될 수 있다고 믿었다. 지금은 글쎄? 생각에 채도가 약간 바뀌었다.

그럴듯한 작품이 탄생하지 않더라도 더 나이 먹은 내가 잠시라도 깔깔댄다면 그걸로 됐다. 그러나 나는 알고 있다. 내 안에는 아주 작지만 결코 무시못하는 뭔가가 있다는 걸. 오래 타오를 준비를 한 성냥, 아니 그보다는 기름 먹은 작은 심지. 담뱃불을 붙여줄 애인은 없어도, 흔하디흔한 행복 안에 가둘 수 없는 작고 뜨거운 심지가 있다. 조금씩 붓는 행복이 기름일지도 모른다. 어쩌면 오랜 시간 돌고 돌아 난 또 제자리인지도.

 마그리트가 평생 우울증을 앓았다고. 검색하다 최근에 알게 된 건데 굉장히 의외라고 생각했다. 도무지 안 믿긴다. 아무리 봐도 우울증 환자로는 안 보이던데. 뭐 사람은 다 우울하고 특히 예술가의 우울은 창작의 먹이가 되고 돈이 되지. 그의 그림에서도 우울 같은 게 안 읽히는 건 아니지만 글쎄. 우울 딱 하나로 전체를 설명할 수 없다.

쓰고 보니 이건 모든 사람에게 다 마찬가지인가. 마그리트의 그림이 어떤 것은 산뜻하고, 어떤 것은 명료하고, 어떤 것은 시니컬하고, 어떤 것은 날카롭고 하듯이 우리의 예술도 그러하기를. 언젠가 내 우울도 독특하고 깊은 맛을 내기를 바라고 있다.

 패터슨은 자기만의 비밀 노트에 시들을 고이 담아만 놓았다. 수더분하고 겁 많은 그가 사랑하는 아내를 위해 그것들을 세상에 내놓기로 결심한 날 저녁, 노트는 강아지 마빈이 수백조각으로 갈기갈기 찢어버렸다.

영화를 보고 영감을 받아 가사(歌辭)를 한편 썼다. 대학 과제긴 했지만 아주 즐거웠다. 역시 난 이런 걸 해야 행복한가봐. 그러나 기어코 꿈이라 부르지 않을 테다. 현대인의 잔꾀! 강아지를 안 키워서 다행히 내 노트는 용케 살아남았고 덕분에 대회에서 상도 받았다.

고마워 패터슨, 나도 언제나 리듬 타며 살아갈게. 월요일 아침이 밝으면 그는 또 한 번 아내의 얼굴에 살포시 입을 맞춘다. 걸어가는 골목마다 지나치는 정거장마다 떨어진 조그만 행복들을 줍는다. 내일 아침 일어난 내가 제일 먼저 줍는 나의 행복은 어떤 색깔 어떤 모양일지.

패터슨은 자기만의 비밀 노트에 시들을 고이 담아만 놓았다. 수더분하고 겁 많은 그가 사랑하는 아내를 위해 그것들을 세상에 내놓기로 결심하는데…. 영화 ‘패터슨(Paterson)’.
 
▲언젠가 네 우울은 깊은 풍미를 낼 거란다
 
 빙하가 녹은 시대에 살고 있을 나에게 편지를 쓴다면 제일 먼저 이렇게 묻고 싶다. ‘뭔가 찾았나요?’ 라고. 뭔가를 찾고 싶다. 찾는다면 그걸 계속 할 방법을 갖고 싶다. 꿋꿋이 이어나갈 굳센 용기를 얻고 싶다.

하지만 제일 바라는 건, 만에 하나 그걸 잃어도 내가 괜찮으면 좋겠다. 금세 다른 행복을 찾아서, 그래서 내가 평생 괜찮으면 좋겠다. 무슨 큰일이 일어나서 혹은 안 일어나서 다 무너지고 멸망하고 폐허가 되는 일 따위 절대로 없으면 좋겠다. 주름이 자글자글한 내가 실은 사는 게 꽤 재밌으면서 ‘아, 인생 지루해!’ 라 농담하고는 가볍게 깔깔 웃고 있으면 좋겠다. 단, 인류가 멸종하지 않는다는 전제 하에.
 
 어젯밤 고양이가 습작노트를 찢어버렸어
 안에 담긴 매일 밤의 시어들이 날아갔고
 그 모든 울고 웃음이 공기 중에 흩어졌지
 밤 새어 종잇조각을 맞추다가 와버린 새벽
 고양이를 혼내고 라디오를 크게 틀었지
 절대적 외로움은 초콜릿 맛이 나지만
 상대적 외로움은 썩은 내를 풍기더군
 아무리 볼륨을 높여 봐도 난 혼자야
 피토하며 뱉은 말은 울긋불긋 시가 되고
 찢어발긴 종잇조각 흑백의 점묘화 되지
 모두들 무언가에 취하여서 살아가네
 취하지 아니하면 숨 쉬지 못하니
 코와 귀를 마비시킬 묘약이 필요해
 명징하게 살아가는 듯 보이는 사람도
 가만히 들여다보면 눈동자가 미쳐있어
 그리고 자기가 미쳤단 걸 알고 있지
 어느새 높아진 하늘에 반짝이는 무수한 별
 저들처럼 도도하게 빛을 내던 나의 우울도
 긴 시간 넘어서 초라하고 지저분해졌구나
 그 사실 문득 깨닫고 조용히 우는 화분들
 일요일 다음엔 늘 월요일이 오듯이
 산뜻한 걸음으로 새 노트를 사러 가면 그만
 하지만 나는 좀 더 공들여 기억하려했지
 다 틀려버린 마당엔 파도처럼 가벼워질밖에
 내일 아침 누군가가 새 노트를 건네줄 거야
 벤치에 앉은 그 사람은 너에게 말을 걸지
 언젠가 네 우울은 깊은 풍미를 낼 거란다
 어디서도 맛볼 수 없는 최고의 맛을 말이야
 자줏빛 베고니아 비밀을 속삭이고
 차가운 새벽공기 내 입술 맞추면
 눈가에는 새로이 반짝이는 시어들
 텅 빈 페이지에 다시 떨어져 고이네
 - 패터슨의 노래
 
김연우 <조선대 국문과 3년, 인문학공간 소피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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