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대라는 의자

▲ 고흐 사이프러스 나무.
 병원에 갈 채비를 하며
 어머니께서
 한 소식 던지신다
 
 허리가 아프니까
 세상이 다 의자로 보여야
 꽃도 열매도, 그게 다
 의자에 앉아 있는 것이여
 
 주말엔
 아버지 산소 좀 다녀와라
 그래도 큰애 네가
 아버지한테는 좋은 의자 아녔냐
 
 이따가 침 맞고 와서는
 참외밭에 지푸라기도 깔고
 호박에 똬리도 받쳐야 겠다
 그것들도 식군데 의자를 내줘야지
 
 싸우지 말고 살아라
 결혼하고 애 낳고 사는 게 별거냐
 그늘 좋고 풍경 좋은데다가
 의자 몇 개 내놓는 거여
 - 이정록 ‘의자’
 
▲아름다운 것들이 참 많네. 그렇지 않니?
 
 테오, 그러고 보면 아름다운 것들이 참 많네. 그렇지 않니?

 때로 한 인간의 일생은, 인류 전체의 무게를 합한 것만큼 엄중하고 엄숙하다. 내게는 반 고흐가 그렇다. 서른일곱 살에 생을 마치기까지, 그가 목회자로 화가로 살아간 시간들을 짚다보면 한 사람이 자신의 생에 주어진 시간에 어떻게 이리 진실하고 진지할 수 있는지, 아득해진다. 외골수. 성공이 목표라면 그는 결코 역사에 이름을 새길 수 없다. 타협한다면, 물질적 풍요는 누릴 수 있을지언정 자신의 영혼과 정신으로부터 그 거리 점점 멀어져 마침내 내가 나로부터 단절되고 맘을 느끼리. 그래서 자신의 삶을 예술로 만들려는 자의 삶은 언제나 ‘외골수’이다.

 몇 년 전 시립미술관에서 고흐의 작품을 접할 기회를 얻었다. 멀리 파리의 오르세에서 비행기를 타고 왔을 그림들은 백년의 시간을 거슬러 서울에 도착해 있었다. 수십 점의 목탄 드로잉을 지나 붓꽃, 해바라기, 그리고 아몬드 나무! 유화물감을 겹겹이 덧칠한 캔버스는 두툼했고 입체적이었다. 두터운 색들에서 뿜어져 나오는 강렬한 생기에 나는 압도되었다. 어떤 예술가들은 자신의 작품에 생명을 나눠주기도 한다는 것을, 나는 그날 알았다. 작가 알랭드 보통은 <여행의 기술>에서 고흐의 작품을 언급한다.
 
 반 고흐가 프로방스에 머문 지 몇 년 뒤 오스카 와일드는 “휘슬러가 안개를 그리기 전에는 런던에는 안개가 없었다.”는 말을 했다. 마찬가지로 반 고흐가 사이프러스를 그리기 전에는 프로방스에는 사이프러스가 거의 눈에 띠지 않았다고 했다. 반 고흐의 그림을 본 뒤에는 프랑스의 색깔에도 뭐가 특이한 것이 있다는 사실이 눈에 띄기 시작했다. 보통은 ‘반 고흐의 작품에 묘사된 모습을 살피기 전에는 프로방스에 별로 감탄하지 않았다. 하지만 그의 그림을 본 후 프로방스 지역을 여행해보니 새로운 것들이 보이기 시작했다.’고 말한다. 예술은 단지 열광에 기여할 뿐 아니라 예전에는 우리가 모호하게, 성급하게만 경험한 감정들을 본 더 의식하도록 안내해준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우리는 눈만 뜨면 아름다움을 잘 볼 수 있다. 사람이 아무리 느리게 걸으면서 본다고 해도, 세상에는 늘 사람들이 볼 수 있는 것보다 더 많은 것이 있다. 빨리 간다고 해서 더 잘 보는 것은 아니다. 진정으로 귀중한 것은 생각하고 보는 것이지 속도가 아니다. - 여행의 기술, 알랭 드 보통
 
 고흐가 사이프러스를 그리기 전까지 사람들은 아를에 전나무가 있는 것을 몰랐다. 보았으되 의식하지 않았으므로 ’있는 것이 없는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두 눈 뜨고도 내 앞에 있는 이의 아름다움을 보지 못하는 때 얼마나 잦으며, 보이는 것을 나와 관계없다는 이유로 지나쳐버리는 경우는 또 얼마나 흔하던가. 내가 봐야하는 것은 보지 못하고 누군가의 티끌을 대들보로 과장하여 나를 돋보이려는 추레함에 물들어갈 때, 어떤 화가는 사물에 내재한 영혼을 보았다. 그가 자신의 혼을 소진시키며 표현한 사물의 혼은 일생을 훌쩍 뛰어넘어 ‘영원’이 되었다.

고흐 ‘고갱의 의자’.
 
▲고흐가 그린 고갱의 의자

 고흐가 그린 작품 중에 의자 두 점이 있다. 마을 어귀로 들어가는 시골 허름한 가게 벽에 어김없이 놓여있을 법한 투박한 나무의자는 물론 고흐의 것이다. 의자 위에는 주인을 대신하는 담배 파이프. 고된 노동으로 내려앉은 어깨위의 무거운 피로를 달랠 한 줌의 연기. 비단보 덧씌운 초록 의자는 ‘노란 집’에서 함께 하기로 약속한 고갱을 위해 고흐가 마련한 벗의 의자이다. 촛대와 책은 한때 주식중개인이었던, 자신의 재능을 의심하지 않고 그림을 통해 또 다른 부와 명성을 걸머쥐기를 바랐던 고갱의 투영이다. 뜻을 같이하는 동지로 정신적 지주로, 서로의 의자가 되기를 약속하고 만난 두 사람은 함께 하는 60일 동안 하루도 빠짐없이 다퉜다. 가령, 고흐가 존경하던 아를의 카페의 여주인 마리 지누를 고갱은 은밀히, 혹은 대놓고 무시했다. 고흐가 그린 마리 지누는 따뜻하고 지적인 여인이다. 같은 사람이건만 고갱 작품속의 마리 지누는 술잔을 앞에 두고 능청스러운 낮빛을 가장한 하류인생이다. 서로에게 의자가 되기를 바랐건만, 숭고함으로 인간을 바라본 고흐와 계급과 계층의식으로 무장했던 고갱은 함께 할 수 없었다. 둘은 서로에게 지울 수 없는 상처를 남겼으니, 어느 저녁 고갱이 문을 박차고 나간 후 고갱이 떠난 빈 의자를 노려보던 고흐는 자신의 귀를 자른다.

 우리 집에는 의자가 없다. 식사를 하거나 책을 읽기 위해선 바닥에 앉아야하는데, 빈 의자는 누군가의 부재(不在) 혹은 하지 않은 일들, 가령 넘겨버린 독서와 지나쳐버린 식사들을 떠올리게 하기 때문이다. 수업이 끝난 후 아이들이 돌아간 빈자리를 무연히 본다. 함께 있을 때보다 더욱 선명하게 떠오르는 아이들의 얼굴. 내게 의자는, 어떤 것의 ‘있었음’을 혹은 ‘있어야 함’을 주장하는 빈 틀, 액자의 프레임이다. 네가 떠난 빈 자리를 대신하는, 의자는 네가 그 자리로 돌아와 앉을 때까지 쓸쓸하고 쓸쓸하다.
박혜진 <문예비평가>

고흐 ‘반 고흐, 영혼의 편지’ (예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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