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대의 빈 서판, 나의 빈 서판. 누구에게나 빈 서판은 존재한다. 우리에게 빈 서판은 0이라는 이름으로 존재한다. 그 0이 단순한 숫자에 불과하다고 판단하는 순간 우리의 빈 서판은 금세 사라질 것이다. 빈 서판이 채워진다면 그 0은 1로 변할 것이고, 채워지는 과정 하나하나가 수렴되어 가능성을 충족시킬 것이다. 우리는 빈 서판의 세상에서 살아가고 있다. 언제 어디서나 존재하는 빈 서판의 모습으로써의 세상은 그야말로 비어있다. 나는 이 빈 서판의 존재를 거의 매일 느낀다. 최근 내가 빈 서판에 대해 가장 절실히 생각했던 때는 설날 즈음이었다. 방학에 학원특강이 겹쳐 받은 용돈을 탈탈 털어 교재를 사려고 서점엘 갔는데, 가뜩이나 교재 종류가 많아서 벅찬 나를 가격까지 괴롭히는 것이다. 그래서 단숨에 포기하고, 집으로 갔다. 인터넷 서점을 이용하려는 생각 때문에서였다. 그런데 인터넷 서점도 너무 비쌌다. 왜 나의 생각대로 따라주지 않을까. 한숨만 퍽퍽 쉬고 있던 찰나에 등장한 건 엄마였다. 엄마께서는 “뭘 그렇게 아까워해? 어차피 네 머릿속으로 들어갈 건데. 교재가 2만 원이면, 그 교재를 네 걸로 채워서 20만 원 아니 200만 원 짜리로 만들어버려!”라고 말씀하셨다. 임펙트가 너무도 강했던 터라 나의 귀에 그 말씀이 박혀버렸다. 이제 그 말은 머릿속을 돌아다니고 있다. 빈 서판을 교재로 생각하는 엄마의 말은 꽤나 잔소리 같아서 좀 싫었지만, 그 날의 교재는 실제로 좋은 결과물로 자리 잡고 있어서 굉장히 뿌듯하다. 그리고, 그날 엄마의 잔소리는 내 운명이 마치 계획이라도 짠 듯 학원과도 연결된다.

 내가 다니는 영어학원을 한 문장으로 나타내면 “아이들을 들들 볶는 학원”이다. 이 말이 딱 맞는 이유를 묻는다면 답은 바로 나온다. 바로 숙제가 많다. 이미 학원을 몇 년째 다니고 있는 나로썬 많은 숙제 양에 어느 정도 적응은 했다만 아직 나에겐 넘을 수 없는 벽이 하나 있다. 바로 자습실이다. 우리 학원은 매일 1시간 이상씩 방학엔 2시간 이상씩 자습실에 학생들을 남기곤 한다. 그 이유는 오늘 배운 수업의 복습 차원에서 깜지를 쓰고 시험 본 걸 재시험 보게 하는 목적에서인데 우리 입장에선 그야말로 들들 볶아지는 것이지만, 선생님 입장에서는 “학생들의 궁극적인 영어실력 향상에 있어서의 목표를 충족시켜줄 수 있는 수단”이라나. 어쨌든 깜지로 들들 볶지만, 그래도 학생들을 들들 볶아 볶음밥으로 만들어놓는 게 우리 학원이다. 여태 내가 학원을 수강해온 이유 중 하나가 바로 그래서일 것이다. 그래서 나는 학원에 뭐라고 할 수 없다. 나를 들들 볶아 나 스스로를 자극시켜 빈 서판을 꽉 찬 서판으로 만들게 한 것이기 때문이다. 어떻게 보면 정말로 마법 같다. 가능성 하나가 한 권의 책을 채우고, 이해시키고, 정복시켰다는 것 아닌가? 이런 가능성의 힘은 항상 내 곁에 존재함으로써 지금도 나를 자극시키고 있다. 지금까지 나를 움직이고 조종하고, 나의 삶에서 활력소를 준 것이 바로 이 빈 서판인 것 같아 은근 고맙기도 하다.
장진영<송원중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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