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계에는 꽃이 피어야 한다

▲ 세상은 국적, 사는 도시, 아파트 별, 학교별, 나이, 성별, 직업, 인종. 피부색, 경제격차, 정치적 신념, 취미 등으로 경계짓고 있다.
 신데렐라의 마법이 풀리는 시간 12시. 나는 신데렐라 이야기를 읽으면서 ‘왜 하필 12시에 마법이 풀린다고 했을까?’ 라는 궁금증을 가져 적이 있다. 10시일 수도 있고, 11시일 수도 있었을 텐데 말이다.

 12시. 어릴 적 나에게 12시는 무서운 시간이었다. 12시를 알리는 첫 번째 종소리 댕! 두 번째 종소리 댕!, 세 번째 종소리 댕!…. 종이 한 번씩 울릴 때마다 긴장감이 상승했다. 그 긴장감은 시계가 마지막 12번째 종을 칠 때 최고조에 이르렀다. 귀신이 나타날 타이밍이었으니까 말이다. 어릴 적 나에게 12시는 죽은 자들이 활동을 시작하는 시간이었다. 12시는 산 자와 죽은 자의 활동시간과 세계를 가르는 경계였다.

 또 어릴 적 나는 시계를 보며 굉장히 신기하고 궁금해 했었던 것이 있다. 긴 바늘이 열심히 한 바퀴를 돌아 숫자 12를 넘는 순간, 이제까지는 1시였던 시간이 2시라는 새로운 시간으로 바뀌게 된다는 것이었다. 그냥 긴 바늘이 한 바퀴를 돌아 12라는 숫자를 넘었을 뿐인데, 우리는 일제히 1시가 아니라 2시라고 말을 한다. ‘왜 긴 바늘이 숫자 12를 넘었을 뿐인데, 시간이 바뀌지?’ 궁금했었다. 더 드라마틱한 순간도 있다. 짧은 바늘이 11시과 12시 사이에 있고 긴 바늘이 한 바퀴를 열심히 돌아 숫자 12를 딱 넘는 순간, 오전은 오후로 바뀌고 14일은 15일로 바뀐다. 어릴 적 나는 숫자 12와 바늘 사이에 시간의 비밀이 있다고 생각을 했다. 그래서 시간을 멈추고 싶을 때나 시간이 흐르지 못 하게 하고 싶을 때, 나는 시계 바늘을 자꾸자꾸 숫자 12를 넘지 못하게 돌려놓았다. 거실 한 가운데에 그것도 모두 다 볼 수 있도록 높게 걸려 있는 시계의 바늘을 돌려놓기 위해, 나는 의자를 끌고 가서 그 위에 책을 올려놓고 까치발을 디뎌가며 시계바늘이 12를 넘지 못 하게 막았다. 엄마에게 들켜서 여러 번 혼이 나긴 했지만, 나는 일요일 저녁이면 포기하지 않고 시계바늘을 돌려놓았다. 어릴 적 나에게 숫자 12는 맞설 수 있을 것만 같은, 분과 분, 시간과 시간, 하루와 하루의 경계였다.
 
▲시계에서의 ‘12’… 모든 것의 경계
 
 숫자 12는 다이나믹한 변화를 일으키는 경계가 되는 숫자이다. 그래서 신데렐라의 마법은 10시가 아니고 12시에 사라져버리는 것은 아니었을까?

 신데렐라 이야기로 돌아오면, 신데렐라에게 12시는 마법의 세계와 현실의 세계의 경계이다. 신데렐라는 요정의 도움으로 아름답고 부드러운 옷을 걸치고 반짝이는 유리구두를 신고, 무도회에서 뭇사람들의 시선을 느끼며 멋지게 춤을 춘다. 하지만 요정은 이야기 했다. ‘12시가 넘으면 모든 것이 이전 그대로의 모습으로 돌아오리라!’ 신데렐라에게 12시 이전은 그녀의 욕망이 실현되는 시간이고, 꿈의 세계였다. 그리고 12시 이후는 욕망이 꺾이고 상처받는 현실의 세계였다.

 요정에게 12시 이전은 마법을 통해 누군가를 보호하고 그의 꿈을 이루어 줄 수 있는, 자신의 능력을 행사할 수 있는 시간이고 세계라면, 12시 이후는 마법을 유지할 수 없고 자신의 능력을 행사할 수 없는 시간이자 세계이다. 12시가 넘은 세계에서는 신데렐라의 꿈과 욕망을 보호해 줄 수 없기에, 12시가 넘은 세계는 자신의 세계가 아닌 자신 밖의 세계이기에 신데렐라에게 늦기 전에 돌아오라고 당부에 당부를 한 것이다. 12시는 경계였다. 하나의 세계가 끝나고 새로운 세계가 시작되는 경계.

 중학교 1학년인 지연이에게 신데렐라의 12시와 같은 경계가 있냐고 물었다.
 
 “지금이요. 엄마가 요정이었던 것 같아요. 어릴 땐 엄마가 뭐든 다 해 주었잖아요. 요정하고 같이 있으면 내가 뭐든 할 수 있을 것 같았어요. 하지만 지금 난 알았어요. 내가 뭐든 할 수 있는 건 아니라는 걸요. 신데렐라의 12시를 넘은 것 같아요. 그리고 나는 12시를 넘어서 더 좋아요. 이 세계는 엄마의 세계가 아니라 어쨌든 내 세계이니까요.”
 
▲신데렐라의 12시와 같은 경계들
 
 세상에는 경계가 되는 것들이 많다.

 나는 교회당이나 법당 안에 들어가려면 항상 옷매무새를 한 번쯤은 고치고 들어간 것 같다. 왜 그랬을까? 그 안은 신의 영역이었고, 성당, 교회, 사찰의 입구는 신의 영역과 인간의 영역의 경계라는 인식 때문인 것 같다. 무종교인이지만 나는 그 경계가 잘 지켜지기를 바랐다. 신의 영역만큼은 인간 세계의 계산법과 인간 세계의 권력으로부터 자유로운 곳이기를 바랐고, 신의 이름으로 인간 세계의 권력을 창출하고 유지하는데 일조하는 인간화된 신의 권력이 아니기를 바랐다. 오히려 평등과 사랑과 평화를 주장하는 신의 권력은 인간 세계에서 배척되고, 약자이기에 상처받고 인간 세계로부터 도망쳐온 자들을 보호하고 치유하며 다시 일어설 수 있게 힘을 주는 곳이기를 바랐다. 80년대 명동성당처럼 말이다. 신의 영역은 신의 영역으로, 인간의 영역은 인간의 영역으로 지켜지기를 바라는 나의 마음이 신과 인간의 세계의 경계에 설 때면 마음을 숙연하게 만들었던 것 같다.

 옛날에는 마을과 마을 사이를 흐르던 강과 솟아있는 높은 산은 마을과 나라를 가르는 경계가 되었다. 지금은 국경선, 분단선, 아파트별 담벼락, 학교의 담장, 내 집과 밖을 가르는 대문 등이 평면을 가르는 경계가 되고 있다.

 시간을 가르는 경계도 있다. 석기, 청동기, 철기시대처럼 어떤 도구를 사용했느냐가 시간을 가르는 경계가 되기도 하고. 원시시대, 노예제시대, 봉건시대, 자본주의시대처럼 생산력과 생산관계가 시간을 가르는 경계가 되기도 한다. 그리고 1960년 4월, 1980년 5월, 1987년 6월. 2014년 4월, 2017년 촛불 등 때로는 아프고 때로는 뜨겁고 때로는 당당한 역사적 사건이 시간과 사회를 가르는 경계가 되기도 한다.

 ‘인간을 가르는 경계도 있을까?’라고 중1 아이들에게 물었다.
 
 “과거에는 신분제도가 인간의 경계가 된 것 같아요.”

 “지금은 빈부격차가 인간의 경계가 되는 것 같아요.”

 “시험 점수가 내 아들과 아빠 아들의 경계가 되기도 해요.”

 “여자, 남자, 성별도 경계가 돼요.”“나이의 많고 적음도 경계가 되지요.”

 “인기 있고, 없고도 경계가 되는 것 같아요.”

 “직업도 경계가 돼요.”

 아이들은 국적, 사는 도시, 아파트 별, 학교별, 나이, 성별, 직업, 인종. 피부색, 경제격차, 정치적 신념, 취미 등으로 인간을 경계 짓고 있는 것 같다고 이야기한다.
숫자 12는 다이나믹한 변화를 일으키는 경계가 되는 숫자다. 그래서 신데렐라의 마법은 10시가 아니고 12시에 사라져버린다.
 
▲경계가 가지고 있는 성질

 경계는 끝나는 지점이고 시작하는 지점이다. 그래서 안과 밖이 맞닿아 있는 지점이 모두 경계이다. 그래서 로마신화에서는 문의 신인 야뉴스가 경계의 신이 됐을까? 문의 신인 야누스는 두 개의 얼굴을 가지고 있다. 하나는 안을 보고 있는 얼굴이고, 나머지 하나는 밖을 보고 있는 얼굴이다. 안을 보고 있는 얼굴은 안에 있는 사람들을 보고 있다. 누가 안의 것을 밖으로 가지고 나가려 하지는 않는지. 안의 것을 지키는 얼굴이다. 밖을 보고 있는 얼굴은 누가 다가오고 있는가? 누가 안으로 들어오려고 하는가를 지켜보고 있다. 들어오는 것, 침입. 밖으로부터 들어오려는 힘을 막는 얼굴이다. 야누스는 안의 것을 안전하게 보호하고 지키는 것과 밖의 것을 배격하여 원래의 것을 유지하려는 힘을 가지고 있다. 경계 또한 이런 일을 한다. 안을 지키는 보호의 의미와 안의 것, 자기 것이 아닌 다른 것 즉 밖의 것은 배척하는 성격을 가졌다. 우리는 경계의 안에 들어왔을 때 편안함과 안도감을 가진다. 또 경계의 밖으로 밀려나갈까 봐 조바심을 내기도 한다.

 ‘너는 어떤 경계 안에 들어와 있니?’라고 중1 수창이에게 물었다. 수창이는 자신은 대한민국 국민이라는 경계 안에 들어와 있으며, 광주시민이라는 경계 안에 들어와 있으며, 남자라는 경계 안에 들어 있고, 대한민국의 매일 학원에 다니는 바쁜 중학생이라는 경계 안에 들어와 있으며, 결혼한 부모님과 동생이 있는 법적 가정이라는 경계 안에 들어와 있으며, 00아파트 주민이라는 경계 안에 들어와 있고, 00중학교 1학년이라는 경계 안에 들어와 있다고 한다. 그리고 수학을 싫어하는 사람들 경계 안에 들어와 있고 게임을 좋아하는 사람이라는 경계에 들어 있으며, 키가 작은 사람이라는 경계 안에 들어와 있지만 농구를 좋아하는 사람이라는 경계에 들어있다고 한다. 또 ‘어떤 경계 안으로 들어가고 싶니?’고 물으니, 수학을 잘하는 사람 경계 안으로 들어가고 싶다고 말한다. 그리고 자기가 어떤 사람이고, 자기가 무엇을 하고 싶은지를 아는 사람의 경계 안으로 들어가고 싶다고 조심히 이야기한다.

 올해 봄에 우연히 함께 한 성인인문학모임에서 이 질문을 했더니, 한 방과후 교사는 4대 보험가입자라는 경계 안에 들어가고 싶다고 이야기하고, 월세로 살고 있다는 어떤 사람은 주님 경계 안에 들어가고 싶다고 말했다. 여기에서 주님은 건물주님이 아닌 주택소유주님을 말한다. 하지만 그 경계에 들어가는 일이 너무도 어렵다고 한숨을 쉬었다.

 어떤 경계는 그 경계의 두께와 높이가 얇고 낮아서 그 안으로 들어가기 쉬운 경계도 있지만, 또 어떤 경계는 그 경계의 두께와 높이가 두껍고 높아서 도무지 들어가기 어려운 경계도 있다.
우리는 높고 단단하기만 했던 경계를, 허물어야만 했던 경계를 결국 허물어뜨려 왔다는 사실을 역사 속에서 증명하고 있다. 베를린 장벽.
 
▲경계를 넘는 자들.

 이런 경계는 누가, 왜 만들었을까? 경계는 각각의 고유성을 드러내서 체계적으로 세계를 인식하기 위해 인간들이 만들어낸 하나의 사고방식, 사고의 틀이었을 것 같다. 먹을 수 있는 열매와 먹을 수 없는 열매를 구분해야 했고, 사과와 물고기를 구분했고, 산 것과 죽은 것을 구분하고 위험한 것과 위험하지 않는 것을 구분해야 했던 인간에게 경계라는 사고의 틀은 자연발생적이었을 것이다. 하지만 내 땅과 네 땅을 구분 짓고 싶어 하고, 너의 마을과 나의 마을을 구분 짓고 그래서 그 사이에 울타리가 쳐지고, 그 경계를 넓히고자 전쟁을 하고, 전쟁에서 진 자와 전쟁에서 이긴 자로 구분지어지고, 명령하는 자와 복종하는 자로 나누어지면서, 사회는 여러 차원으로 구분되어지고 경계 지어졌다. 차이를 기반으로 한 경계는 이제 사고인식의 틀만이 아니라 사회를 운영하는 효율적인 제도이며, 더 나아가서는 지배논리가 덧씌워진 통치의 수단이 되기도 한 것이다.

 로마신화에 경계를 만들고 지키는 신이 있다면 경계를 넘나들고 무너뜨리는 신도 있다. 그는 머큐리. 그리스신화에서는 그를 헤르메스라고 부른다. 그는 전령의 신이자 나그네의 신이고 길의 신이며 관계와 소통의 신이다. 제우스는 하늘에, 하데스는 지하에, 포세이돈은 바다에 그들은 자신이 지키는 영역 안에 존재한다. 제우스는 하데스의 영역을 침범하지 않고, 하데스 또한 제우스의 영역을 침범하지 않는다. 각각의 경계를 지키며 존재하는 것이다. 하지만 헤르메스는 전령의 신으로 어디든 갈 수 있다. 그는 제우스의 경계를, 하데스의 경계를, 포세이돈의 경계를, 신의 경계를, 인간의 경계를, 삶과 죽음의 경계를 넘나든다. 그래서 제우스의 하늘과 하데스의 지하와 포세이돈의 하늘을 연결하고 신과 인간의 세계를 연결할 수 있다. 그는 소식을 전하고 관계를 맺게 하고 소통하게 한다. 그래서 경계를 허문다.

 우리는 생활하며 허물로 싶은 경계를 만난다. 수창이처럼, 방과후 교사처럼, 월세를 내고 주거하는 어떤 사람처럼 들어가고 싶지만 들어가지 못하는, 들어가기에 너무 높은 담벼락을 만난다. 그리고 또 우리는 생활하며 허물어야 할 경계를 만나기도 한다. 하지만 그 경계는 경계 밖의 사람들이 문을 두드릴 때, 경계 안의 사람들의 질서와 안전과 이득을 위해 문을 걸어 잠그고 더 단단히 더 높게 담벼락을 쌓아올린다.

 놀랍게도 또 우리는 높고 단단하기만 했던 경계를, 허물려야만 했던 경계를 결국 허물어뜨려 왔다는 사실을 역사 속에서 증명하고 있다. 넬슨 만델라는 흑인과 백인에게 지워지는 지배논리가 만들어낸 경계를 뛰어넘었고, 애멀린 팽크허스트는 남성과 여성에게 지워지는 지배논리의 경계를 넘었다. 잔다르크는 귀족과 평민이라는 신분의 경계를 넘었고, 안나 프랑크는 제국주의의 식민지재분할 욕망을 감춘 전쟁논리의 경계를 넘었다. 넬슨 만델라 뒤에는 100명 또는 1000명의 또 다른 넬슨 만델라가 있었을 것이고, 애멀린 팽크허스트 뒤에는 1000명의 또 다른 애멀린 팽크허스트가 있었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었다.

 수많은 죽음이 있었던 경계를 또 죽음을 각오하고 넘고 있는 난민들이 있다. 제주도에 예멘 난민들이 도착했을 무렵, ‘경계’이야기를 하다가 한 아이가 물었다.
 
 “선생님, 예멘 난민들을 우리가 받아줘야 하나요?”

 “넌 어떻게 생각하니?”
 
 우리 사회에서 허물어야 할 경계는 또 무엇이 있을까?
하수정 <그림책 읽어주는 할머니가 꿈인 사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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