종료될 존재들 낭만 바라보는 측은지심
옳은 것을 멋진 것으로, 가장 로맨틱한 포장법

▲ 우리는 모두 종료된다. 종료될 존재들은 존재하는 것 자체의 허함을 메워야만 살 수 있다.
 “할아버지, 시가 뭐예요?”
 “시는 옳은 것을 멋진 감정으로 설명하는 거란다.”
 - 아지즈 네신, ‘멋진 것과 옳은 것’ 中.
 
 무라트는 궁금한 것이 많은 소년이다. “할아버지, 밤은 왜 깜깜해요? 낮이 환한 이유는 뭐예요?” 대답을 고심하던 할아버지는 이야기를 들려준다. “하늘엔 아주 잘생긴 청년과 아름다운 처녀가 있단다.” 청년은 검은 비단 가면을 썼고 검은 벨벳 망토를 둘렀다. 그의 망토는 세상의 반을 덮을 만큼 아주 넓었다. 청년은 처녀를 사랑하여 늘 뒤를 따라다녔다. 그래서 세상의 반쪽은 항상 어둠이 내렸다. 처녀는 눈부시게 아름다운 황금빛 머리칼을 가졌고, 새하얀 비단옷을 입었고 새하얀 망토를 둘렀다. 그녀의 망토 역시 세상의 절반을 덮어 한없이 밝았다. 청년은 쫓고, 처녀는 달아나고. 둘은 그렇게 영원히 지구를 돈다. 밤하늘의 별과 은하수는 청년의 옷에 달린 황금 단추와 황금 술. 처녀의 볼이 붉어질 때면 하늘과 구름에 아름다운 분홍빛 노을이 번져간다.

 아이가 너무도 당연한 진리를 물을 때, 할머니 할아버지는 신비롭고 재미난 이야기를 들려주곤 한다. 무라트의 할아버지는 낮과 밤에 숨은 비밀이 지구가 태양을 쉼 없이 도는 거라 말하는 대신 이렇듯 멋진 거짓말을 지어냈다. 말하자면 ‘옳은 것’을 ‘멋진 것’으로 한 겹 포장하는 것이다. 이해하기 쉬운 우화적 기법인 동시에 동심을 지켜주는 방법. 그러나 아이는 영원히 아이가 아니다. 만약 이미 굵어질 대로 굵어진 머리인데도 옳고도 당연한 것을 설명해야 한다면? 예를 들면 ‘인간이 영혼을 가졌다’는 사실 따위를 말이다. 어떤 이가 그린 그림을 보여주면서 “이 멋지고 아름다운 그림을 보세요! 이걸 그린 사람에게 영혼이 있다는 것은 누가 뭐래도 옳지 않나요?” 라고 말하는 광경을 상상해본다.

 지극히 간단한 진리를 이해하지 못한다면 실은 받아들이고 싶지 않은 거겠지. 필요한 장기는 잘도 뜯어가면서 클론에게 인간과 똑같이 영혼이 있음을 외면하는 이유는, 그 두 가지가 지독히 상충되는 가치이기 때문 아니겠어? 영혼이 있는 존재를 장기 바구니로 여긴다는 것은 사탄들이나 할 만한 사악한 짓이니까. 가즈오 이시구로의 소설 ‘나를 보내지 마’는 1905년대에 인간 복제가 성공한 세상을 다룬다. 클론의 장기를 병자의 몸에 이식할 수 있게 되자 모든 불치병이 해결되고 인간의 수명은 100세를 초과한다. 주인공 캐시는 친구 토미, 루스와 함께 코티지에 있는 클론 학교 헤일셤에서 유배되듯 자라난다. 자라나면서 어떤 것도 자신의 뜻대로 할 수 없었던 그들은, 나중에야 헤일셤이 클론에게 그나마 우호적인 곳이었다는 것을 알게 된다. 그러니까, 클론에게 예술을 가르칠 정도로는 말이다.
 
▲“우리는 모두 종료된다”
 
 식물이 의식을 가졌냐는 논쟁이 과학계에서 다시 대두되고 있다. ‘식물도 영혼이 있다!’ 멋지지만 조금 고리타분해진 유사과학 카피문구. 그래도 이번 논쟁에는 과학적인 실험 증거가 있다. 미모사와 파리지옥을 전선으로 연결해보니, 파리지옥을 건드리자 미모사가 전기 파동을 일으키며 이파리를 접더라는 것. 어릴 적 집 책꽂이에 꽂혀있던 책이 한 권 떠오른다. 물도 감정을 느낀다는 주장이었는데, 이미 사기로 밝혀진 비과학이지만 그땐 꽤 신드롬을 일으켰었다. 물이 예쁜 결정을 보여주는 단어들은 주로 ‘사랑해’, ‘고마워’, ‘희망’, ‘평화’ 등등. 사회적으로 올바른 인간이 되기 위해서는 좋아해야 할, 적어도 싫어하진 않아야 할 말들. 따라서 그 책은 나라는 인간의 교육과 사회화에 적절한 기여를 했다. 물 컵에 대고 말들을 속삭이면서 ‘지금쯤 물 분자들은 이런 예쁜 모양을 띠겠지?’ 상상하면 기분이 좋았다. 물은 언제나 투명했지만.

 소행성이 지구와 아주 가까운 거리로 스쳐지나갔다. 도시 몇 개는 거뜬히 날릴 정도의 파워였다는데 참. 몇 킬로미터 돌덩이가 그런 거대한 위력을 발휘한다니. 인간은 작고 인간사 덧없다. 아냐, 운명을 믿는다면 결코 모든 게 허투루 덧없진 않을 거다. 어차피 저 돌덩이 지구 대기를 스치지도 못할 거였고 우린 지금껏 그랬던 대로 쭉 안전할 테니까. 그리고 소행성은 언제든 지구 곁을 지날 수 있고 심지어는 지구와 충돌할 수도 있다. 인간이 태곳적 폭발의 자식이듯 그들도 이 거대한 집의 주인 아닌가. 그러나 인류라는 종은 이렇게 팔자 좋게 생각하는 부류는 아니다. 죽음에 대한 선명한 공포는 과학의 발전이라는 생존법칙으로 이어져왔고, 그 두려움을 이겨낼 수 있는 멋지고 아름다운 수많은 위대한 이야기들을 촉발해왔다. 아마겟돈 같은 영화도 그래서 나온 거잖아. 문학과 예술, 과학의 발전은 이렇듯 뿌리를 같이 한다. 우리는 멋진 것이 필요하다. 우리는 멋진 것을 필요로 한다. 우리는 약하고 우리가 사는 세계는 그저 ‘옳을’ 뿐이니까.
 
 “우리는 모두 종료된다. 우리 중 그 누구도 자신이 어떻게 살았는지, 과연 충분히 살았는지 이해하지 못할 것이다.”
 - 가즈오 이시구로, ‘나를 보내지 마’ 中.
 
▲“인간과 클론은 똑같이 가엽다”
 
 대다수의 인간들이 클론에게 영혼이 있지 않다고 확신한다. 클론의 해방을 돕는 인간들은 이것을 납득시키는 것이 급선무였다. 그 방편이 클론을 위한 학교와 그들의 예술작품을 전시하는 전시회였다. 헤일셤에서 아이들에게 예술을 가르친 것도 이 때문이었다. 클론 아이들은 그림 그리고 시를 짓는 것을 좋아했다. 그들에게 예술은 무력한 존재로서의 자괴감을 떨칠 수 있는 방법이자, 정신적 허영을 부릴 수도 있는 돌파구였다. 그러나 아이들이 품은 환상이 예술뿐이던가. 그들은 그들의 존재 이유 자체에도 환상을 품었다. ‘우리는 옳은 일을 하고 있어. 우리는 이 사회에 이바지하고 있어.’ 이는 인간이 친히 심어준 것이다. 자신을 속이고 세상에 순응하도록. 어처구니없는 삶을 살면서도 존재하기 위한 일말의 자부심을 갖도록. 그렇게 버티는 존재가 되도록.

 ‘클론에게도 영혼이 있다!’ 전시회를 찾은 많은 사람들이 메시지에 감화됐지만 그렇지 않은 사람이 더 많았다는 게 문제. ‘클론 해방’은 유행처럼 시대의 격류를 타고 지나가버린다. 토미가 죽기 며칠 전, 캐시는 토미와 함께 장기이식 유예를 부탁하러 마담의 집을 찾아 간다. 마담은 매주 아이들의 작품을 수거하러 왔었다. 토미는 학교에서 예술을 가르친 이유가, 어쩌면 유예를 시켜주기 위한 방편이라고 추측했던 것이다. 캐시는 어릴 적 네버렛미고에 맞춰 혼자 춤을 추는 자신을 보고 숨죽여 울던 마담을 기억한다. ‘불쌍한 것.’ 뺨을 쓰다듬는 마담의 무표정한 얼굴. 그래. 아마도 이들의 마음 속 깊은 곳에는 상위자라는 착각이, 상위자가 하위자에게 품는 긍휼의 감정이, 나보다 못한 존재를 돕는다는 만족이. 옳고도 추한 삶을 가리려 멋진 것을 갈망하는 것은 클론만이 아니다. 그런 면에서 인간과 클론은 똑같은 분량으로 가엾다. 훔친 장기로 목숨을 연명하는 인간 보다야 20년밖에 못 살고 죽는 클론이 훨씬 불쌍하지만. 그리고 당연히 유예는 없었다.

 토미가 숨을 거두는 것을 지켜본 캐시는 무작정 차를 몰고 헤일셤으로 간다. 그곳 들판에서 캐시는 눈을 감고, 지금껏 자신이 버려야 했던 모든 것들을 떠올린다. 그리고 그것들이 하나둘 씩 자신을 향해 다시 밀려오는 광경을 상상한다. 기다리고 기다리면 지금 막 떠난 토미의 얼굴도 보이겠지 생각하며. 캐시가 읊조린 말은 클론으로서의 자조적인 운명론인 동시에 인간에게 날리는 펀치다. 그 펀치는 삭막하고 냉엄한 진리를 담는다. 인간과 클론 모두 종료된다는 것. 종료될 존재들은 존재하는 것 자체의 허함을 메워야 살 수 있었다. 예를 들면 ‘노퍼크’ 같은 것. 어릴 적 캐시와 친구들은 지도에 있는 ‘노퍼크’라는 동네에 대한 환상적인 이야기를 만들어냈다. 낡은 인형이나 부서진 장난감이 잔뜩 쌓여있는 동네. 세상 모든 잃어버린 물건은 그곳으로 모여든다. 학교를 졸업하고 정말로 노퍼크에 가게 된 캐시는 그곳 테이프 가게에서 토미가 주었던, 자신이 그토록 아꼈던 ‘네버렛미고’ 테이프를 발견한다. 물론 깨끗한 새것이었지만.
진실은 종료될 존재의 귓가에 ‘네 기대와는 달리 이 세계는 단지 세계일 뿐’이라고 속삭인다. 이 속삭임은 장엄하고 담담하고 암울하지만, 어떤 하나의 옳은 결말을 떠올리게 한다.
 
▲새로운 시대는 더욱 묘연해지고
 
 소설의 작가가 일본인이라 작품 속의 사회가 어떤 면에서는 일본의 현실을 은유하는 듯하다. 그러고 보니 얼마 전부터 일본은 ‘헤이세이’가 아니라 ‘레이와’다. 새로운 시대가 열린 것이다. 아니, 단지 천황이 은퇴했을 뿐 새로운 것은 전혀 없다. 그러고 보면 확실히 천황은 성공한 국가적 아이템이다. ‘천황’이라는 허울이 일본 국민들에게 심는 환상적인 이미지를 보라. 일본 국민들은 연호가 바뀐 것을 즐기고 축하하고, 문화적으로 향유하고 콘텐츠로 소비한다. 그런데 선거 투표율은 50%를 넘지도 못한다. ‘허무주의.’ 정국을 주도하고 있는 극우세력은 오히려 확고한 목표와 강한 열의에 차 있다. 이와 달리 일반 시민들에게는 정치에 대해 깊게 깔린 허무가 있다. 딱히 뾰족한 대안도 눈부신 희망도 없고, 또 그걸 해소할만한 파격적인 이미지 혹은 사건도 없다면 계속 그 자리겠지. 새로운 시대는 더욱 묘연해지고.

 뭔가 눈앞에 나타나야 비로소 솔깃해 하는 게 인간인지도 모른다. 이미지든, 전기 파동이든, 아니면 표어 자체의 파격이든. 하지만 그게 인간의 잘못은 아니다. 굳이 말하자면 한계랄까. ‘부모’가 아닌 한계. 부모도 아니면서 부모의 지위를 자신하고 부모의 역할을 수행하는 ‘자식 1’로서의 한계. 자연이라는 조물주는 자식을 그리 극성으로 사랑하진 않는 듯하다. 모든 것을 이렇게 방치하는 걸 보면. 만약 식물이 의식을 가졌다는 게 사실로 판명 난다면, 혹은 그렇게 믿게 될 만한 그럴듯한 공표가 난다면 어떻게 될까? 우리는 ‘자식 1’로서, 그리고 역시 똑같이 의식을 가진 존재로서, 각자의 공간에 한편은 내놓아야 할 것이다. 내놓지 않더라도 분명 딱 그만큼의 죄책감을 들여놓아야 할 것이다. 식물이 모종의 반응을 한다는 ‘옳은 사실’, 그로부터 뽑아낸 식물이 영혼이 있다는 ‘멋진 가설’, 그러나 그 가설이 정말 현실이 될 때 우리가 져야할 옳다고도 멋지다고도 할 수 없는 일정 분량의 ‘책임.’ 인간이 사탄은 아니지만 나쁜 부모는 언제든 될 수 있으니.
 
 “무엇으로 왕권을 세우고 백성을 다스리려고 하는 겁니까?”
 “진실이요.”
 “진실! 무슨 진실이요? 난 사실 아무것도 모른다. 나에겐 신비스런 능력이 없다. 이런 진실이요? … 백성은 환상을 원합니다. 가뭄에 비를 내리고 흉수를 막아주는 초월적인 존재를 원합니다. 그 환상을 만들어내야만 통치를 할 수 있는 것입니다.”
 “아니요, 백성은 희망을 원하는 겁니다!”
 “그 희망이라는 것이, 그 꿈이라는 것이, 사실은 가장 잔인한 환상입니다.”
 - 드라마 ‘선덕여왕’ 中.
무엇으로 왕권을 세우고 백성을 다스리려 하십니까. 백성은 환상을 원합니다. 가뭄과 흉수를 막아주는 초월적인 존재를 원합니다. 그 환상을 만들어내야만 통치할 수 있습니다.
 
▲군주 아닌 시민 하나하나의 메시지
 
 선덕여왕에서 미실과 덕만은 서로 다른 군주상, 혹은 부모상을 보여준다. 덕만은 첨성대를 지어 하늘을 백성에게 돌려주려 한다. 지배자의 독점이었던 격물은, 농사의 절기를 알려주어 백성의 희망이 될 것이었다. 희망. 참 반짝거리는 말이다. 물이 정말 감정을 느낀다면, 희망은 세상 모든 물방울의 결정을 아름답게 만들 테지. 그 희망이 ‘가장 잔인한 환상’이라. 실체 없는 것은 환상도 희망도 매한가지나, 환상은 술에 취하게 하고 희망은 호미를 잡게 한다. 환상은 ‘힘들지? 편히 쉬어, 내가 다 해줄게.’ 라고 말하는 반면, 희망은 ‘힘들지? 하지만 할 수 있어, 함께 해보자.’ 라고 말한다. 따라서 희망보단 환상에 더 끌리기 마련. 하지만 희망에 한번 속은 사람들은 엄청난 힘을 발휘해 아무것도 없는 황무지 위에 밭을 일구고, 성벽을 쌓고, 대단한 일들을 이루어내는 것이다. 때문에 희망이 좌절된다면 훨씬 큰 분노가 촉발되는 것은 당연하다. 그 분노를 두려워하고, 영민하게 앞을 내다보며, 뼈가 부서져라 일해야 하는 것이 희망을 제시한 군주의 살길.

 덕만의 말대로 환상을 심는 시대는 희망을 품는 시대로 진보했고, 앞으로도 세상은 희망의 정도를 계속 따를 것이다. 그러나 미실이나 덕만 같은 군주는 이제 좀 낡았다. 국가와 백성의 ‘부모자식’ 관계는 애저녁에 버려진 환상 아닌가. 군주가 백성에게 메시지를 심는 것은 진부하다. 이제는 시민 하나하나가 자신만의 환상을 이야기하고, 자신이 생각하는 희망을 제시하는 시대. 어떤 좋아 보이는 아젠다도 거리낌 없이 낡은 것이 될 수 있다. 묻는다. ‘인간은 모든 존재의 부모입니까?’ ‘아니요.’ 하지만 인간은 거의 모든 것의 부모나 다름없다. 인간의 말에 모든 것의 운명이 결정되고, 인간의 운명이 곧 지구의 운명이니까. 진짜 부모가 떠난 세상에서 가장 똑똑한 자식이 피를 돌리고 머리를 굴리며 애를 쓰고 있다. 자기가 유일한 해답인양 굴고 자기가 유일한 희망이라 자처한다. 그러나 스스로도 영 석연찮고 미심쩍은 것이다. 지금 이 희망이 나를 져버린다면 또 어떤 환상을 만들어 붙잡고 나아가야 할까. 또 그 환상은 얼마나 빨리 나를 버릴까.
 
 “믿을 수 없군. 달콤한 죽음의 환상이 풀밭과 함께 널려있다니. 자넨 너무 큰 상상을 하고 있어. 어쩌면 작을 수도 있겠군. 죽음은 훨씬 단순한 거라네. 죽고 몇 달 뒤엔 더 재미있어. 몇 년이 지나면 결국 로맨틱해지지.”
 - 뤽 베송, ‘잔다르크’ 中.
그 검이 왜 거기에, 어떻게 나의 옆에. 잔은 이유를 찾아 헤맸고 어느 날 신은 답을 주었다.
 
▲“어떤 환상이 더 나은 방향으로 이끌까?”
 
 어린 소녀가 들판에 누워있다. 그 옆에는 웬 검이 한 자루 놓여있다. 검을 발견한 소녀는 손에 쥐어보고 휘둘러본다. ‘검이 왜 거기에, 어떻게 나의 옆에.’ 잔은 이유를 찾아 헤맸고 어느 날 신은 답을 주셨다. 그녀는 신의 뜻을 받은 성녀로서 전장에 설 수 있었다. 그러나 신은 검을 떨어뜨린 적이 없다. 벌이는 전투마다 승리를 거둔 이유는 그녀가 뛰어난 전장이었기 때문이고, 가는 곳에 적군이 없었던 이유는 지나칠 정도로 좋았던 운 때문이다. 하지만 잔은 전우들의 가슴속에 환상을 심고, 왕과 백성들의 머릿속에 희망을 부여하고, 모두가 살육에 미치게 하여 종국에는 자신과 모두에게 승리와 영광을 가져다주었다. 화형을 선고받게 될 감옥에서, 그녀 앞에 검은 로브를 쓴 남자가 나타난다. 그는 잔에게 죽음이 ‘로맨틱’하다 말한다. 어떤 사람도 죽음과 그 후를 알기 전까진 그 로맨틱함을 알 수 없을 터. 그러나 이것은 확실하다. ‘시체가 흙으로 돌아가는 것은 옳다.’ 애석하게도 잔이 그토록 바라던 구원은 그 안에 있었다.

 아마도 인간은 멋진 것을 투과해야 비로소 옳은 것을 받아들일 수 있는 듯하다. 축복이기도, 불행이기도. 환상도 희망도 없이 사는 것은 괴롭고 힘든 일이다. 진실은 종료될 존재의 귓가에 속삭인다. ‘이 세계는 단지 세계일뿐이야, 네 기대와는 달리.’ 이 속삭임은 장엄하고 담담하고 암울하지만 결코 악은 아닌, 어떤 하나의 ‘옳은’ 결말을 떠올리게 한다. 별도 은하도 사라져 단지 검고 거대한 무덤이 될 우주를. 작은 원자 알갱이가 되어 떠돌아다닐 모두의 최후를. 우리는 우리가 꿈꾸는 대로 걸어왔다. 외계인이 인류의 역사를 본다면 몽유병 환자의 발자국처럼 보일까? 그러나 그 발자국의 주인은 또렷한 두 눈으로 환영을 좇았고, 그것은 생존이었다. 어떤 환상이 그를 더 나은 방향으로 이끌까. 어떤 희망이 그를 덜 추한 모습으로 진화하게 할까. 식물이 정말로 영혼을 갖게 될 진 모르겠지만 2024년에 인간은 다시 달에 간다. 달은 여전히 아름답겠지, 식물이 그저 싱그럽듯이. 때로는 어떤 살을 붙이지 않아도 아름다운 것을 보자. 가끔은 어떤 얘기로 포장하지 않아도 로맨틱한 것을 듣자. 먼 훗날 이 모든 것이 흩어지더라도.
김연우 <조선대 국문과 4년, 인문학공간 소피움>

[드림 콕!]네이버 뉴스스탠드에서 광주드림을 구독하세요

저작권자 © 광주드림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