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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 고전을 만나다]쿠슘 ‘초현실’ & 작자 미상 ‘박씨부인전’
내가 서있는 땅은 평평한가
“차별 부정할 때 아닌 더 발견해야 할 때”
박혜진
기사 게재일 : 2020-01-20 06:05:03
▲ 작자미상 고전소설 박씨전.
 많은 날이 너의 앞에 있다.
 어째서 시도하지 않는가.
 흔들리지 마라
 할 수 있는 것을 제시해라
 과거에 무슨 일이 있었든지
 패배감을 버려라
 여왕이여, 왕관이 떨어지고 있다
 포기하지 마라
 자신을 부끄러워하지 말고
 너의 생각을 펼쳐라.
 너는 그 자체로 최고이다
 숨죽일 필요 없다.
 아름다운 달처럼 되라,
 어둠속에서도 빛날 것이다
 두려움에 대항해서 싸워라
 돌진해라, 주먹을 날려라
 핑계 대지 마라
 자신의 운전사가 되어라
 너의 두려움을 향해 돌격하라
 실수해도 상관없다
 너의 삶에 새로운 어여쁜 꽃을 심어라
 너 자신을 알고, 너 자신을 얻어라
 누군가의 아내가 되기 이전에.
- 네팔소녀 쿠숨(Kusum)의 자작시 ‘초현실’
 
▲인내천(人乃天), 인간은 평등한가
 
 하늘 아래 모든 인간은 존엄하다. 그러나 인류의 태동기 선사시대로부터 현재까지 평등은 제대로 실현된 적이 없다. 그래서 박씨 부인전과 홍길동전, 토끼전과 심청전 등 흔히 어린이용으로 알려진 고전소설들이 탄생했다. 이들은 풍자와 우화의 옷을 입고 당대 억압의 역사, 질서와 안정의 이름으로 당연시되던 차별들에 의문을 던진다. 나름의 해법을 제안하고 실천하며 고군분투하는 남녀영웅들의 입을 빌려 한 목소리로 평등을 주장한다. 그러나, 영웅에게 빌런의 그림자가 드리우듯 시대의 문제를 돌파하고자한 고전 속 인물들도 그들이 몸담은 시대의 한계를 완전히 파기할 수는 없었다.

 가령 양반 아버지와 노비 어머니 사이에서 태어나 두 어머니를 섬겨야했으나, 신분제와 일부다처제의 희생양이길 거부한 홍길동을 보라. 조정이 아버지 홍판서를 볼모로 잡자, 동에 번쩍 서에 번쩍하던 길동은 순순히 굴복하고 섬으로 건너가 율도국을 세운다. 그는 왕 노릇을 하며 후 두 왕비를 거느렸다. 두 왕비가 ‘비할 데 없는 현명함’으로 서로를 자매처럼 아꼈다는 자못 훈훈한 결말은 용의 머리로 시작해 닭의 꼬리로 끝나는 비겁한 마무리다. 불합리한 제도는 그대로 두고 개인의 성품 개선에 문제해결의 책임을 돌린 찍은 작가 허균의 한계이며, 그가 몸담았던 조선 지식인의 한계다.

 작자미상 박씨 부인은 또 어떤가. 특출한 재주, 수모를 각오한 희생으로 청의 침략으로부터 조선을 구했음에도, 그녀는 병자호란이 끝나자 현모양처로 복귀하며 모든 공을 남편인 이시백의 몫으로 남긴다. 이를 겸손 혹은 내조의 미덕으로 보기 어려운 까닭은, 남편 이시백은 과거 급제마저 아내의 도술에 의지한 인물이기 때문이다. 하물며 그가 왕을 보좌해 정책을 결정하는 보직에 올랐음을 감안한다면 더더욱 문제 아닌가. 임진왜란과 병자호란, 두 번의 난을 겪고 양반과 사대부로 대표되는 남성중심사회에 딴죽을 걸고자 비범한 여성 영웅을 내세운 박씨 부인전도 조선후기의 평균적 대중성으로 회귀했던 것이다. 대체 시대가 만들고 허용한 문화적 하한선의 기준이 얼마나 강력한 무의식적 금기로 작용했기에, 조선의 작가들은 선을 넘지 못하고 뱅뱅 돌다 원점으로 퇴보한 걸까.

 조선의 지배세력은 ‘유교’를 등에 업고 남존여비를 주춧돌로 삼아 나라를 다스렸다. 무릇 명분(名分)은 질서 유지를 위해 자리와 역할을 강조한다. 남편은 남편답고 아내는 아내다워야 하며, 어른과 아이는 차례가 있어야한다는 규범들이 그렇다. 그러다 이런 규약에 걸맞지 않은, 그 질서에 자기를 맞추지 않는 인물이 나타나면 그를 낙오자로 낙인찍거나 잘못하고 있는 사람으로 취급한다. 가령 어려서부터 세 살 터울 남동생과 여자인 나는 종종 집안 어른들에게 “둘이 바뀌었으면 좋았을걸.”하는 소리를 듣곤 했다. 동생은 한 가지에 무섭게 집중하는 스타일이었지만 친구들과 뛰어놀기보다는 집에 머물렀고, 부모님 말씀을 거역하는 경우도 드물었다. 그 애의 책상은 늘 깔끔하고, 큰 소리를 내다 혼이 나거나 준비물을 잊고 허둥대는 것은 나였다. 형제나 남매가 종종 그렇듯 무슨 일로 다투게 되었는지도 모른 채 싸우다가 주먹다짐으로 번져도 우는 것은 꼭 동생이었다. 동생은, 그래서 듣지 않아야할 충고를 듣고 넘어가도 될 질책을 받았다. “사내자식이 쯧”

 나는 그 애가 그런 부정 섞인 말들을 들을 때면 자신을 어찌 느꼈을지 감히 상상해볼 수가 없다. 할아버지와 작은 아버지들의 시선은 나뿐만이 아니라 귀하다는 ‘아들’에게도 족쇄로 작용했던 것이다. 그건 사랑이었으나. 결코 건강한 사랑은 아니었다. 개성을 누르고 말살한 ‘나 지우기’였다. 조선에서 강하게 작용한 남녀차별은 1980년대 대한민국에도 살아남아 동생과 나를 서로 미워하게 만들었던 것이다.
 
▲남녀 차별이 아닌, ‘-다움’이라는 낱말이 만든 또 다른 차별들

 분홍을 핑크라고 말하며 좋아하는 남자아이는 왜 있으면 안 될까? 인형놀이를 즐기는 남자애와 자동차를 좋아하는 여자아이는 왜 드문 걸까? 자연은 종종 생태계의 다양성과 번영을 위해 돌연변이 인자를 만든다. 동시에, 돌연변이들은 혹 있을지 모를 환경의 급격한 변화에 적응하기위한 생태계 나름의 비방(秘方)이다. 독특한 아이들, 남자와 여자를 떠나 ‘자기다움’을 간직한 아이들은 미래사회에서 평범한 그 누구보다도 돋보일 것이다. 똑같지 않은 그들은 자기만의 영역과 가치를 갖고 존재하며 따라서 다른 사람과 대체할 수 없다. 사실 모든 존재가 그렇다. 우리가 그렇게 태어난 아이를 ‘남자다워라’ 혹은 ‘여자다워라’는 말로 가르치려들 때 세상은 평균적인 남자와 평균적인 여자들로 가득할 것이니, 그런 세상은 얼마나 재미없고 지루한가, 100% 예측 가능한 사람이라니 얼마나 밋밋한가.

 인간은 사회라는 바퀴를 굴리는 기계의 한낱 부품이 아니다. 인간은 사회를 변화시키는 존재다. 게다가 생명의 전제 조건이 ‘변화’ 아닌가. 변화를 위해서라도 존재는 어느 하나로 규정되어서는 안 된다. 그러면 요구하는 역할 외에는 아무것도 해낼 수 없다. 변혁에의 가능성, 그것은 언제나 ‘예외’에서 온다.
 
 누군가가 보기엔 세상이 불리하게 기울어져 있는데, 누군가의 눈에는 세상이 평등해 보인다. 그래서 의심이 필요하다. 세상은 정말 평등한가. 내 삶은 정말 차별이 없는가. 내가 서있는 땅은 기울어져 있는가, 평평한가. 아직 차별을 부정할 때가 아니라 더 발견해야 할 때다.
- 김지혜,‘선량한 차별주의자’ 중에서
박혜진<문예비평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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