완도 토도

▲ 토도 노두길. 하루 두 번 길이 열린다. ‘물이 들고 난다’는 것은 이 섬에선 ‘길이 닫히고, 길이 열린다’는 말과 동의어다.
 ‘주전자에 물이 떨어지지 않게 잘 떠다 놓습니다.’
 어떤 아이가 초등학교 다닐 적 받은 성적표의 행동발달사항에 그런 글귀가 써져 있었더란다.
 그때부터 그 아이는 언제 어디서나 ‘주전자에 물이 떨어지지 않게 잘 떠다 놓는 사람’이 되려 하였다.
 품이 들어가는 일, 생색도 안 나는 일, 하지만 그 누군가에게 보탬이 되는 일.
 마치 굳은 맹세나 한 것처럼 그런 일을 거듭하는 사이 그 아이는 목마를 때 꼭 그 자리에 있는 물 같은 사람이 될 수 있었다.
 시방 어느 시암가에서 길어올리는 물 한 방울을, 어느 텃밭을 어느 들녘을 적실 물 한 줄기를, 생각한다.
 메마른 자리를 희망으로 바꾸는 물의 행로에 깃든 몸공들이 거룩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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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물때 따라 하루 두 번 그 섬으로 가는 길이 열린다.

 “물 난다(쓴다)”는 말은 이 섬에선 “길이 난다”는 말과 동의어다. “물 든다”는 “길이 없어진다”는 말이다.

 물때 따라 온전히 ‘섬’이 되길 거듭하는 토도(兎島·완도 군외면 황진리).

 “여섯 시간 (물이) 들었다 여섯 시간 (물이) 나. 스물 네 시간에 두 번 들었다 두 번 나가제. 여그는 물때 보고 사는 디여. 물이 나야 사람도 나가. 긍께 물 나기만 지달려. 물때가 나날이 틀려. 오늘은 세 시 못 되야서 나가야 써.”

 “우리는 항시 물때를 담고 살아”라고 말하는 이철안(82) 할아버지.
 물이 나면 바다건너 1km 떨어진 해남 북일면 갈두마을로 노두를 타고 오갈 수 있다.

 “시방은 쎄멘으로 찻질이 났제만. 전에는 노두타고 나가. 사람만 포도시 건너댕개. 물이 나도 발에다 물 무치고 건너댕애. 자갈로 조르라니 깔아논 디라 물이 첨벙첨벙했어. 여그는 노두질을 독으로 안놨어. 왜 자갈로 했냐문 그때는 여그에 독이 없어. 굵은 독은 전부 석화독으로 놔불어. 석화독 허기도 모지래. 사리 때는 물이 빨리 들어와. 조깨 늦으문 달음박질을 치제.”

 “여그서 태어나서 여그서 늙으요”라고 한생애를 간명하게 요약하는 할아버지는 어렸을 적 노두 건너 학교(북일초등)를 다녔다.

 “학교까지 멀어. 고무신 같은 것도 없어. 짚신 삼아서 신고 십리 넘게 걸어. 옷도 명베에 포도시 솜 좀 놓고 그런 거여. 출 때는 막 달려댕개. 춘께. 긍께 토도 애기들이 담박질을 잘해. 지금 애기들 같으면 학교 안 간다고 허꺼여. 이 고생에서 멀어지라고 울 애기들은 애려서 초등학교 때부터 떨어띠렸어. 지그 부모랑 같이 못 살았어. 내 맘대로 들고 나는 디서 살으라고 광주로 보냈어.”

 예전 시절 물 나기 기다리는 토도 아이들을 보듬어준 어른들이 있었다.

 “저 건네 갈두서 여그 토도 들오자문 입구에 째깐한 오막살이가 한나 있었어. ‘곰바우집’이라고 할무니 할아부지가 살았어. 물때 못 맞추고 바람 씨게 불고 그러문 거그서 머커서 물 나도록까지 지달렸다 들오고 그랬제. 재워주기도 하고. 없이 살문서 어짜문 놈의 애기들을 그리 따숩게 보듬아줬으까. 그때는 살기가 참 애러운 시상이제. 그런디도 그렇게 넘의 자식도 애끼고 좋게 살았어. 그 양반들 인자 고인 돼불었소.”

 진 자리 진 땅 딛고 살아낸 사람들. “이녁이 부지런하기만 하문 묵고살 것이 있는 곳”이 토도라고 할아버지는 말한다.

 “물에 가문 안 잡은 것 없이 다 잡아. 돔 농어 민어 그런 것 잡고 미역 하고 꿀 까고. 김발 하니까 새복까지 김 떠서 몰리는 것이 큰 일이여. 식구대로 허는 일이라 애기들도 도와. 그때는 다 내 노력으로 묵고 살던 시대여. 글케 살았어.”

 황정덕(79) 할매의 시선은 바다를 향해 뻗어 있다.

 “낮밥 묵고 무단히 나오고잡더만. 곧 물 들어오겄구만. 지금은 조금인께 그라제, 사리 때는 물들기 시작하문 깜짝할 새 들어와불어.”

 물이 처어만치 나가는지 들오는지 이제는 몸이 알지만, 그래도 무단히 나와서 눈길을 바다에 대보는 것이다.

 “우리한티는 물때가 젤로 중해. 낼이라도 모레라도 물 나문 바다에 갈라고. 나는 팽생 일을 짠뜩 해갖고 허리를 못써. 근디 수실해갖고도 또 바닥에 나갈 생각배끼 없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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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바닥에 나가는 이유는 간명하다. “살았는디 하제. 움직이는 사람은 다 바닥에 나가제.”

 “첨에는 교통 사나와서 살기 싫었어. 물만 들문 못나간께. 까깝헌 적 많애. 내 발이 있어도 내 맘대로 못가고. 지금도 배깥에 나갔다가 여그를 들올라문 저러고 존 길들을 다 땡개두고 나는 왜 여그서 팽생을 살아왔으까 고런 생각이 들제.”

 어려서 토도로 들어와 ‘연애법이 없던 시상’에 한동네 총각과 연애해서 결혼했다. 이철안 할아버지의 짝인 할매.

 “나는 애래서 여그로 들어왔어. 원래는 저어 해남 육지가 고향이여, 엄마아부지가 일찌거니 돌아가셔불고 오빠가 일로 이사헌게 따라왔제. 그때가 열너댓살이까. 오매 첨에 물이 짤박짤박한 노둣길 짜갈길을 걸음걸음 딛고 들온디 쓰러워 갖고 혼났어. 바닷물이 짠께. 첨엔 여그 와서 많이 울었어. 짜갈길로 댕김서 양말도 못신고 흐건 보신도 깨끗허게 못신고, 바닷물이 다리에 달문 쓰럽고 개라운께. 인자 질이 들어서 괜찮애.”

 짜갈길 걸어 바다를 건너 육지로 나가던 애기, 처녀, 각시는 이제 할매가 되었다.

 “다음 시상에 살고 싶은 데는 사방팔방 길이 뚫린 육지”라지만 이제 이곳의 삶도 쓰럽지도 개랍지도 않다.

 곧 물이 들어올 시간. 갯벌을 걷는 소리도 차츰차츰 달라진다. 짜박짜박에서 찰박찰박으로, 물기가 차오른다.

 금세 길이 지워질 것이다.

 하지만 지금 가리워진 길이 다시 열린다는 것을 토도 사람들은 알고 있다.
글=남인희·남신희 ‘전라도닷컴’ 기자

사진=박갑철 ‘전라도닷컴’ 기자·최성욱

※이 원고는 월간 ‘전라도닷컴’(062-654-9085)에도 게재됐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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