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식 사람이 순전히 구식으로 사요”

▲ 함평양민학살로 집을 잃고 남편을 잃은 심계순 할매. 꼬실라져버린 집자리에 지어올린 방 한 칸 부엌 한 칸 두 칸집. 할매와 함께 꼿꼿하게 이 생애를 버텨냈다.
 더 넓은 곳, 더 높은 곳, 더 값나가는 곳에 이르고자 하지 않았다.

 껍데기의 무늬를 탐하여 떠돌기보다, 그 속내에 견결한 항상심을 지켜온 이들의 거처엔 켜켜이 첩첩이 쌓이고 쌓인 시간의 무늬가 빛난다.

 오로지 심겨진 자리에서 피할 수 없는 비와 바람을 꿋꿋하게 견뎌낸 위대한 생애의 집들이 여기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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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 집은 빈 집이구나, 처음엔 그리 생각하였다.

 그런데 빈 집이라기엔 티끌 없이 정갈하다. 그렇다고 누가 사는 집이라고 하기에는 지금 세상의 흔적이 아무것도 없다.
몇 번을 덧대어 바른 문. 시간의 무늬가 새겨졌다.

 인기척에 문이 열렸다. 낭자머리에 비녀를 꽂은 심계순(90) 할머니.
 
 “나는 양지 응지 다 쐰 사람이여”

 할매는 열여섯 살에 이 마을에 시집 왔다.

 “그때는 일본 시상이여. 광주에 제사공장으로 모다 끄꼬가. 뇌동 시길라고. 글로 안 보낼라고 시집 보낸 거여. 우리 친정이 딸 둘 아들 너이 6남맨디 내가 질 큰딸이여. 신광서 가매 타고 왔어. 동짓달 스무이렛날이여. 춘가 어찐가도 몰르고.”

 그 날부터 살아온 집이다.

 “신랑은 동갑이여. 암것도 몰라.”

 암것도 모르던 남편은 스물 세 살에 세상을 떠났다.

 “총 맞아서 죽었어.”

 6·25전쟁통이었다.

 “여가 불갑산 뽀짝 밑이여. 산사람한테 밥 준다고 다 소개되았어. 집 태와불고 돼야지막도 태와불고 암것도 없어. 산속으로 피헐라고 가는디, 내가 뒤에 가고 신랑이 앞에 가는디 바로 눈앞에서 총을 맞았어. 군인들이 쏴 불었어. 묻도 않고 쏴 불었어.”

 백일도 안된 애기를 보듬고 있었다. 눈물도 소리도 안나왔다.

 “애기를 보듬고 덤불 속에 앙겄는디 해는 설풋허고 인자 갈 디 올 디가 없어. 우두커니 앙겄다가 풀을 뜯어서 덮으고 독을 갖다가 놔뒀어. 패적(표시)을 해야 헌께. 글고는 시외갓집 있는 디로 찾아갔어.”

 난리통이 끝나고 그 자리를 찾아갔다.

 “가서 보니 다 썩었어. 머시 무솨. 남편인디. 놉은 얻어갖고 갔는디 관도 없어. 그래도 어찌고 묻어야제. 그 자리를 파서 그작저작 묻고 나무 꽂고 독 놓고 ‘여그다’ 표시허고 왔어. 돌아봄서 왔어.”

 지금은 선산으로 모셔 두었다 한다. 스물 세 살에 세상을 떠난 남편 모상근의 제삿날은 정월 보름. 국군의 ‘정월대보름작전’으로 무차별 사살된 ‘함평 양민’ 중 한 사람이다.

 1950년 12월6일부터 이듬해 1월14일까지 40일 동안 함평 월야·나산·해보 3개 면에서 공비토벌이란 명목으로 국군 제11사단 20연대 2대대 5중대에 의해 자행된 양민학살사건. 무차별 총살로 무고한 양민 524명이 희생되고 1454호의 가옥이 불에 타 없어졌다. 이 기록은 1960년 국회 양민학살특별조사위원회가 현장을 방문해 조사한 것일 뿐, 불갑산 일대에서 학살된 민간인은 1500명에서 최대 3000명에 이를 것으로 추정된다. 비극의 역사는 그렇게 한 가족의 삶을 송두리째 흔들었다.

 “남편이 죽으문 웅중(흉중)이 꺾어지고 하늘이 무어진다고 허드만. 시어마니는 아들이 죽었어. 그 속을 내 속에다 대겄소?.”

 홀시어머니와 백일도 안된 아들을 보듬고 스물 세 살 각시는 각심을 했다.

 “나는 앵간히 고상시런 것은 고상시럽다고 안해라. 나는 양지 응지 다 쐰 사람이여. 무선 것이 없어.”
 
 “새로 시집 가지 말고 꽉 살어라”

 응지를 살아가야 하는 딸이 얼마나 아렸을까. 난리통이 지나고 친정아버지가 와서 집을 지어주었다. 지금 살고있는 집이다.

 “새로 시집 가지 말고 꽉 살어라고 허십디다. ‘니 새끼가 범띠에다 자시에 났은께 잘 살 것이다. 딴 맘 먹지 말고 꽉 살아라’ 그 말씀을 허십디다.”

 청송 심씨 친정아버지는 출가외인인 딸의 처신이 항시 마음 쓰였던가 보다.

 “한번은 친정에 갔는디 동숭아덕(동생댁)이 술밥을 찌드란 말이요. 찹쌀도 여코 보리쌀도 여코 많이 찝디다. 창시(창자) 앞에는 치면(체면)도 없다드니 그 놈을 얻어묵고 올라고 근디 친정아버니가 들에 갔다 오시더니 ‘아이 니그 시모님 어쩌시라고 안 갔냐’ 막 그러개. 헐 수 없이 애기를 업고 나온디 어매가 따라나옴서 ‘아이, 아버니가 너 미워서 글 안해야, 또 온나 또 온나’ 그러셔.”

 술밥을 못 먹어서였는지 아버지가 야단을 쳐서였는지 어머니가 짠하다고 잡은 손 때문이었는지 애기를 업고 울면서 재를 넘어왔다.

 “그 아그가 모병환이요. 울 아그가 참 훤허니 이빼. 지그 아버니 탁해서. 울 아그가 그래. ‘요새 같으문 아들 한나 믿고 안 살 것인디’. 만날 그래. ‘나는 아버니도 못 봤은게 어매는 오래 살아야 허요’ 그 말을 그리 해. 울 아그가 여간 극진해라.”

 구순 어매가 ‘울 아그’라 하는 그 아들은 이제 예순아홉이 됐다.

 지금 생각하면 친정아버지가 젊어서 혼자 된 큰딸을 그리 맘에 두고 사셨구나 싶다.

 “시어마니하고 나하고 농사를 지슨디 쟁기질 해주라고 두째 동상을 보내. 태섭이여. 시째 현섭이도 가끔 온디 큰 동상은 일을 못헌께 안와. 지도 애린디 얼마나 잘 갈 것이요. 깔끄막 바슬(밭을) 삐틀빼틀 갈아놨다고 내가 한번은 빠마대기(뺨)를 부쳤는개비여. 시방도 웃으먼서 ‘아따, 매씨 손때 아프드만’ 그래.”
토방 높은 집. 시방 예순 아홉 된 아들이 뛰내리다가 다리를 부러뜨린 자리다. 허리 굽은 어매는 그 토방이 시방 높다 아니하고 그 애린 것한테 높았노라 한다.

 없는 살림에 소가 없으니 쟁기질을 하러 올 때는 동생들이 십리 길을 소를 끌고 왔다.

 “신광서 오는 질에 순내라고 큰물이 있어. 날이 저물문 소가 안 건넬라고 그래. 무선께. 그러문 저짝에서 아바니가 딸딸 걷고 건네오셨다고 낭중에 동상들이 전헙디다. 아버니가 꼬삐 잡고 끄슨께 그때사 소가 가드라고.”
 
 “시어마니가 ㅤ겉도 큰디 속도 널롸”

 남편 없는 삶에 가장 의지가 된 이는 시어머니였다.

 “나는 심계순, 그 냥반은 박계순이여. 관동떡이라 글드만.”

 이름이 같은 두 여자는 사이가 좋았다.

 “우리 친정 어마니 아버니가 나 보내놓고 바람소리에도 내다봤다 그럽디다. 딸이 쫓겨오는개미. 열여섯 살 먹은 것이 머슬 허겄소. 바슬 매라 근디 여그서부터 매야 헌디 쩌어그서부텀 끌적끌적허고 있어도 그 꼴을 봤어라. 우리 시어마니가 나보다 스무 살 많애. 나는 시어마니랑 참 좋게 살았어. 시아버니는 나 시집 오고 기양 돌아가새불었어.”

 시아버지는 한량이었다.

 “생전 일도 안헌 양반이 작은각시가 몇이여. 집을 열두 채지섰다요. 우리 시어마니는 ‘작은사람’이라고 헙디다.”

 시어머니는 품이 넓은 사람이었다.

 “내가 시집옴서 시어마니 옷을 농지기라고 해 갖고 왔어. 명지베 짠 놈으로 빤닥빤닥헌 것이여. 시어마니가 작은사람 불러오라 글드니 ‘자네 맘에 든 놈 모냐 개리고 나 주소’그래. 근께 이놈 만차 보고 저놈 만차 보고 입어 보드니 ‘상근이어매가 요놈 입으씨요 내가 요놈 입을라요’ 근께 ‘알아서 허소’ 그래. 시어마니가 작은각시 꼴을 잘 봤어. ‘그것 조까를 꼴 못본다요’ 넘 보고 그래. 시어마니가 ㅤ겉도 큰디 속도 널롸.”

 통 큰 시어머니는 그 세상에 마을에서 돼지를 큰놈 잡아서 고기를 나누면 다리 하나를 가지고 와서 유재 사람들한테 다 나눠 주었다.

 “다 줘불어. 놈들은 네 볼 낄여묵을 것을 다 줘불고 손을 탁탁 털어. 시어마니는 돼야지고기 같은 육보채는 잘 안 잡사. 소반찬을 잘 잡사. 나헌티 웃으멧소리로 그러새. ‘복산떡은 내가 괴기 질거워허문 꼴 못볼 것이다’ 그런 소리를 허개. 나를 ‘복산떡아’ 글케 부르새. 장에 갔다 옴서 아매다마를 갖다 드리문 오물오물 잘 잡샀어.”
며느리 맞을 적 단촐하게 지은 아래채는 아들 내외가 3년 살고 이사한 후로 비어 있다. 그 곁으로 땔나무 더미. “땔나무 있을 동안 그 안에 죽어야껀디.”

 동네 사람들이 다 치하를 했다.

 “두 과수떡이 어쩌문 딸같이 어매같이 생전 쌈도 안허고 도랑도랑허고 사요, 모다 그랬어. 글케 좋게 살았소. 글서 내가 시어마니 옷은 시방도 입소. 좋게 살아서 암시랑 안해라.”

 할매는 시방도 시어머니가 입던 빨간 엑스란 내복을 입고있다.

 “시어마니만 믿고 사는디 시어마니 돌아가시고 난께 참말 맘이 안 좋습디다. 인자 나 혼차 사는구나 했소.”

 시어머니는 그 난리통에 두 아들을 다 잃었다.

 “두째 아들은 결혼도 안했었제. 어디 가 죽었는지도 몰라.”

 아들을 잃은 박계순은 젊은 며느리를 짠해 하며 살았고, 신랑을 잃은 심계순은 시어머니가 짠했다. 시어머니가 돌아가시기 전에 내놓은 속엣말이 시방도 맘에 사무친다.

 “내가 질게 살문 아들 한나는 보고 죽을란가 했더니 못보고 죽을란갑다, 그럼서 울어싸십디다. 글드니 딱 사흘 만에 돌아가셨어. 음력 5월 초열하랫날. 일흔 아홉에.”

 생사가 확인되지 않은 아들을 그때까지도 기다리고 있었던 것이다.

 돌아보면 아들 하나 먹이고 가르칠 생각에 일욕심 부린 것이 그리 후회스럽다.

 “시어마니가 참 고상했소. 밭도 벌고 논도 벌고 열댓 마지기썩을 했제. 그런께 어서 헐라고만 했제. 해는 넘어간디 댐배라도 태고 있으문 ‘아이, 어서 허이씨요. 해 넘어 갈라그요’ 재촉을 했어. 언능 끝내놓고 낼은 품 한나나 앗이러 갈라고. 그러문 시어마니가 ‘아이 복산떡아 댐배나 한 대 태자’ 그래.”

 시방도 사진을 꺼내보곤 한다.

 “너머 고상 시갰소. 잡술 것도 지대로 못 잡수고. 내가 늙어본께 걸려라. 한자 일함서도 그러요. 조까 쉬먼 더 나슨 것을. 그런 말이 나와.”
시어머니 생전 그대로인 장독대. 기우뚱 옹삭시런 자리에서 넘어지지 않고 앉은 자리를 지키고 있는 것이 꼭 할매 같다.

 복산떡은 일 무서운 줄 모르는 각시였다.

 “내가 만날 정게서 조깨 떠먹고 일허러 나가는 것을 보고 ‘복산떡은 호무(호미) 차고 낫 차고 쪼끄리고 앙거서 밥묵는다’고 유재 사람이 그런 말을 헙디다.”
<다음에 계속>

글=남인희·남신희 ‘전라도닷컴’ 기자

사진=박갑철 ‘전라도닷컴’ 기자

 *심계순 할머니의 고요한 일상을 어지럽히고 싶지 않아 주소지를 밝히지 않습니다

※이 원고는 월간 ‘전라도닷컴’(062-654-9085)에도 게재됐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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