태풍인양 불어대는 강풍과 때늦은 추위 때문에 봄인데도 봄 같지 않은 날씨다. 얼굴을 후려치는 강풍과 한파를 뚫고 한라산을 오르려면, 바닥에 붙은 듯 한껏 자세를 낮추고 발걸음을 옮겨야 한다. 얼마쯤 올랐을까. 등산로 주변을 에워싸고 있던 구상나무와 주목 그리고 고사목은 더 이상 보이지 않고, 넓은 평원이 드러난다.

 탁 트인 풍경 너머 한라산 정상이 보인다. 발아래 펼쳐진 넓은 평원엔 마른 풀이 황금빛으로 깔려있다. 그 황금빛을 배경삼아 푸른 융단이 곳곳에 깔려있다. 융단이라니. 좀 더 가까이 다가서 바라보니 채송화처럼 생긴 식물이 군락을 이루고 있다. 시로미다. 시로미가 군락을 이루고 있는 것이다. 한라산이나 백두산 같은 고산지대에서만 살아가는 식물인 시로미.

 

 가을되면 열매는 동물들 특별식

 

 크기라고 해봐야 한 뼘 남짓에 불과하다 보니 풀이라 생각하기 쉽겠지만, 시로미는 엄연히 나무다. 그것도 늘 푸른 잎을 자랑하는 상록수다. 길이가 채 1cm도 되지 않는 잎은 수분을 잃지 않도록 두툼하게 발달되어 줄기를 에워싸고 있다. 낮은 키는 거센 바람을 피하려는 의도된 진화의 결과일 게다. 촘촘하게 무리지어 자라야만 거친 환경을 견딜 수 있다는 지혜도 이미 터득한 듯하다.

 시로미는 극한 환경에서 고단한 삶을 이어가면서도 아름다운 꽃을 피운다. 자주색으로 빛나는 꽃이지만 너무 작다보니 평원을 화려하게 수놓지는 못한다. 꽃이란 보는 이의 시선을 위한 것이 아니라 종족 유지를 위한 수단이기에 최소한으로 제한된다. 하지만 열매는 풍성할 것이다. 검은 열매가 황량한 평원 곳곳을 점점이 물들일 가을쯤이면 허기를 달래려는 동물이 주변에 몰려들 것이다. 먹을거리라곤 별로 없을 것 같은 평원에선 시로미 열매야말로 에너지를 충전하기 위한 특별식이 될 것이다.

 콩알 만한 크기의 시로미 열매는 오리(烏李), 즉 까마귀의 자두라 불린다. 열매의 검은 색과 맛 때문에 그런 이름이 붙여졌을 것이라고 나름대로 추측해본다. 시로미란 이름은 열매의 맛이 시지도 달지도 않다하여 붙여졌다고 한다. 사람이 먹어본 맛이 그렇겠지만 까마귀의 입맛이 사람과 같을 리는 없을 터. 아마 달콤한 식사를 즐기리라.

 시로미만 극한 환경에서 살아가는 것은 아니다. 지난 시절 한라산을 올랐던 옛 선조들도 가혹한 환경에서 살아왔지 않던가. 고된 노동과 수탈 그리고 가난 속에서 살아야만 했던 백성들의 고통은 시로미가 겪는 고통을 넘어섰을 것이다. 동병상련일까 아니면 유감주술일까. 시로미가 강장제나 허약 체질 개선 등의 목적으로 사용되었다는 것은 능히 짐작할 수 있으리라. 힘들게 살던 백성들은 시로미 열매를 먹으면서 힘을 얻었을 것이다.

 

 가혹한 환경 견딘 생명력…불로초

 

 어찌 힘만 얻었으랴. 시로미의 별칭은 불로초라고 한다. 이름만으로도 진시황의 불로초 목록에서 시로미가 빠질 리 없다. 불로초를 찾으러 제주도까지 들어온 서불은 시로미를 보게 되었을 것이고, 시로미야말로 영생을 얻을 수 있는 불로초라고 단번에 알아봤을 것이다. 그 전설은 불로초 축제로 남아 제주도에 전해지고 있다.

 자주 볼 수 없는 시로미기에 좀 더 자세히 들여다보기 위해 바짝 다가가 본다. 바닥에 바짝 엎드려 있을 것으로 생각했는데, 의외로 허리를 꼿꼿이 세우고 당당하게 서있다. 거센 바람을 피하려면 바닥에 납작하게 엎드려 있는 편이 더 나을 텐데. 저 조그만 생명이 이토록 강한 바람을 어찌 감당하려고 무모하게 서있을까. 이 바람이 두렵지 않다는 것일까. 어떤 시련에도 물러서지 않겠다는 강한 의지를 드러내고 있는 걸까. 수많은 시로미들이 서로를 의지하고 있으면 이런 강풍도 견딜 수 있다는 걸 알려주려는 걸까.

 바닥에 바짝 붙은 채 산을 오르던 내 모습이 부끄러워진다. 저 작은 나무도 이런 바람은 아무것도 아니라는 듯 견뎌내는데. 잠시 허리를 펴고 정상을 바라보는데, 강한 바람에 내 몸이 휘청거린다.

 가냘픈 시로미 줄기마다 노루 귀를 닮은 듯한 이파리들이 쫑긋하게 서있다. 마치 한라산에 전해오는 전설을 하나도 빠짐없이 엿들으려는 듯이. 먼 훗날에도 잊혀 지지 않도록 전하겠다는 듯이.

설연수 <병영우체국장·숲해설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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