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성은 사회적 약자’에 공감하기

▲ 지난 5월19일 오후 3시 서울 혜화 마로니에 공원 앞 도로에 1만 명의 여성들이 모였다. `불법촬영 편파수사 규탄시위’에 참여한 이들은 여성이 피해자일 때도 남성이 피해자일 때처럼 똑같이 수사하고 처벌해달라고 요구했다.<사진=오마이뉴스 ⓒ곽우신>
 얼마 전에 광주 모 고등학교에서 30여명의 학생들과 토론 수업을 진행했습니다. 독일 작가, 파트리크 쥐스킨트의 ‘승부’라는 작품을 읽고 ‘자기 확신에 눈이 멀어 진실을 보지 못하는 사람들’에 대해 이야기를 나누었습니다. 가볍게 이야기를 시작하려고 이런 사람들을 본 적이 있는지 물어보았는데 “태극기 틀딱 XXX들!”이라며, 교실 곳곳에서 차마 지면에 쓰기 어려운 표현들이 터져 나왔습니다. 반대편에서 질 수 없다는 듯이 “메갈 XXX!”라는 표현도 튀어나왔습니다.

 머리가 복잡해졌습니다. 애써 편하고 자유로운 수업 분위기를 만들어 놓았더니, 그 사이로 혐오의 표현들이 비집고 들어온 것입니다. 제가 대뜸 정색을 하고 그런 표현들에 대해 문제를 제기하면 곧바로 저를 별 다를 바 없는 ‘꼰대’로 보고 더 이상 수업에 관심을 갖지 않으려 하겠지요. 그렇다고 ‘그런 표현 따위에 난 흔들리지 않는다’며 쿨한 척 하기에는…. 저 표현들을 그냥 지나칠 수가 없었습니다. 30여초 아무 말 없이 시간이 흘렀습니다. 학생들도 슬금슬금 제 눈치를 보기 시작했습니다.

한참 후 저는 여러분들이 언급한 것이 어떤 의미인지, 어떤 문제가 있는지 아냐고 반문한 뒤, 다소 길게 ‘혐오 표현’의 의미와 그 폐해들을 늘어놓았습니다. (자세한 내용은 홍성수, ‘말이 칼이 될 때’를 읽어보시길 바랍니다.)
 
▲“그들은 왜 분노할까?” 생각해본 적 있는가
 
 제 말을 들은 학생들은 도리어 격분하며(?) 반발했습니다. ‘워마드, 메갈들이 얼마나 남성혐오를 과격하게 하며, 얼마나 남성들을 잠재적 범죄자 취급하는지 알긴 하냐’고요. 수많은 사례들이 홍수처럼 쏟아져 나왔습니다. 흡사 최근 ‘혜화역 시위’를 다룬 기사에 달린 댓글들처럼 분노가 쏟아져 나왔습니다.

아차! 전략의 실패입니다. 성냥불에 기름을 끼얹은 듯, 분노는 더 커졌습니다. 이제 이야기는 젠더 간 대결로 확산되었습니다. 저는 ‘그런 특정 사이트나 단체에서 외치는 과격하고 불편한 표현을 무작정 옹호하는 것이 아니다. 다만, 그들이 왜 그렇게 분노하고 있는지는 생각해봐야 하는 것 아닌가’ 되물었습니다. 이야기가 먹히지 않더군요. 막막했습니다.

 사실, 이런 경험은 이번이 처음이 아닙니다. 지난 겨울에 제가 일하는 대안학교에서도 정도의 차이는 있었지만 비슷한 상황이 있었습니다. 제가 이런저런 이유로 졸업을 앞둔 학생들에게 4시간 동안 여성주의에 대해 특강을 할 일이 있었습니다. (여성도, 여성학 전공자도 아닌 제가 강의를 맡게 된 이유는 여성주의에 대한 감수성을 가지려고 노력하는 ‘남성’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래야 남학생들의 반발을 줄일 수가 있었거든요.)

이 수업을 하면서 제가 일종의 문턱을 발견했습니다. 남학생들과 더 이상 이야기를 이어나가기 어려운 문턱, 남성들이 여성주의적 이론, 여성주의자들의 주장을 들을 때, ‘턱’하고 발이 걸려 귀를 닫게 되는 문턱 말이죠.

 그건 바로 ‘여성은 사회적 약자다’라는 명제입니다. 제 경험상 (예전의 저를 포함해서) 많은 남성들은 이 명제를 온전히 이해 및 공감하지 못하거나, 하지 않으려고 하는 경향이 있었습니다. 이 명제를 이해하고 공감하지 않는다면 결국 이야기는 빙빙 헛돌기 마련이더라고요. ‘여자가 약자라고? 그만큼 누리는 것도 많잖아?’ 이런 식으로 되받아치기 일쑤입니다.

 다들 알다시피, 사회적 약자라는 것은 단지 여성들이 신체적으로 남성보다 약하다는 것을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사회적 권력관계 속에서 남녀의 문제를 본다는 것은 다음의 사실을 인정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사회적 존재로서 권력관계라는 촘촘한 그물에 얽혀있다는 것’, ‘그것은 남성 또는 여성의 개개인의 도덕적 품성, 인간됨과는 아무런 관련이 없다는 것’. ‘남성, 여성 모두 개별적으로 벗어나고 싶어도 끝내 벗어날 수 없는 것’, ‘권력관계는 다층적이라는 것 즉 성별 권력관계에서 여성은 남성과의 관계에서는 약자이지만, 나이에 의한 권력관계에서는 어린이/청소년에 비해 강자의 위치에 있다는 것’, ‘권력관계 속에서 강자는 언제나 개인의 의도와는 무관하게 가해자의 위치에 설 수 가능성이 크다는 것’ 등.

다소 거칠게 나열했습니다만, 남성들이 이런 전제들을 받아들이지 않은 상황에서 사회적 약자로서 겪게 되는 여성의 고통을 듣게 되면, 남성들이 겪는 고통을 내세우며 누가 더 아픈지 겨루려고 애쓸 뿐입니다. 연이어 거친 말들이 오갈수록 화해와 공존의 가능성은 희박해보입니다.
 
▲‘2등’시민 청소년 처럼, 여성들도 그들만의 고통이 있지 않을까요?
 
 다시 처음의 교실 상황으로 돌아와봅시다. 남학생들의 반발을 마주한 뒤에 저는 다른 방식을 취했습니다. 권력관계를 이해시키는 방식으로 말이죠. 남학생들이 사회적 권력관계에서 약자의 위치에 놓여 있는 상황에 대해 이야기를 시작했습니다. 그 위치란 바로 청소년입니다. 청소년들은 ‘2등’ 시민입니다.

공식적인 투표권도 없는 청소년은 사회적 약자입니다. 투표권뿐만 아니라 학교에서 집에서 자기의 삶에서도 나이가 어리고 ‘미성숙’한 존재라는 굴레에 갇혀 어른들의 지도와 훈계에 휘둘리고 있습니다. 한국의 청소년들이 세계 최장시간 학습노동에 짓눌리고, 대학을 졸업해서도 마땅한 일자리가 없어 비정규직이나 알바를 떠돌 수밖에 없는 헬조선의 현실을, 청(소)년들의 그 고통을 아무리 외쳐도 돌아오는 반응은 “우리 때는 더 어려웠어, 임마!” “피할 수 없는 고통은 즐겨야지”, “그렇게 버티질 못하고 사회생활 어떻게 하려고 하냐?” 등 핀잔만 듣기 일쑤입니다.

자신들의 고통을 있는 그대로 인정하고 공감할 생각은 없이, 오직 자신들이 보고 싶은 것만 보고 듣고 싶은 것만 듣는 어른들의 모습에 다들 분노하더군요.

 그 분노 앞에서 저는 다음과 같이 이야기했습니다. “여성들도 자신들의 고통이 있지 않을까요? 겉으로 드러나는 과격한 표현만으로 그들을 섣불리 판단하지 않고, 일단 있는 그대로 이해하려는 노력이라도 해야 하지 않을까요?, 그렇지 않으면, 여러분들이 방금까지 그토록 분노하며 비판했던 어른들과 무엇이 다르다고 할 수 있겠습니까?”
추교준
 
 추교준님은 인문학이 잘 팔리는 시대에 어떻게 하면 근본적이고 급진적인 인문학이 가능할지 고민하는 사람입니다. 대학원에서 철학을 공부하고 있으며 대안학교에서 학생들을 만나고 있습니다. 한 번씩 시민단체 활동가들 어깨너머로 인권을 함께 고민하기도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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