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는 `인간에 대한 기록’
인간의 `공통성’처럼 역사 또한 반복된다

▲ 김충선.

 2014년 7월에 개봉한 `명량’은 역대 최다 관객 수를 기록한 영화입니다. 2014년 12월23일 기준으로 영화진흥위원회가 집계한 `명량’의 관객 수는 1761만1849명입니다. 또한, `명량’은 제51회 대종상 영화제에서 최우수작품상·남우주연상·기획상·기술상을 수상 했고 35회 청룡영화상에서는 감독상과 최다관객상을 수상했습니다. 관객복과 상복을 모두 거머쥐었으니 대단할 따름입니다.

 “최민식이 만들어낸 이순신 장군은 그 같은 리더를 갈망하는 대중들에게 극장 안에서나마 진정한 리더를 만난 듯한 대리만족을 안겼다.”

 “`명량’의 성공은 이순신을 빼고 말할 수 없다. 감동의 중심에는 이순신이 있었다.”

 “이순신 장군의 리더십과 삶에 대해 확인하고 살펴볼 수 있어서 좋았다.”

 위와 같은 언론 보도에서 알 수 있듯이 `명량’ 흥행의 중심에는 이순신 장군이 있었습니다.

 `명량’에서 이순신 장군을 연기한 배우 최민식은 2014년 부산국제영화제 오픈토크에서 다음과 같이 말했습니다. “우리 마음 속에 충무공이 자리 잡고 있었던 것 아닌가. 그분을 너무 그리워하고, 갈구하고 있는데 그런 열망이 `명량’으로 표출된 것 같다.”

 세월호 사건을 지켜보며 리더에게 실망한 국민은 이순신 장군과 같은 영웅의 출현을 간절히 원했을 것이며, `명량’의 이순신 장군을 통해 카타르시스를 느꼈을 것입니다. `명량’의 티켓파워가 이를 증명해줍니다.

 

 “명분없는 전쟁”귀화한 김충선

 

 이순신 장군은 임진왜란 속에서 탄생한 영웅입니다. 임진왜란은 우리가 잘 모르고 있지만 바로잡아야 할 용어 중 하나입니다. 임진왜란을 글자 그대로 풀이해보면 `임진년에 일어난 왜구의 난동’입니다. 묻고 싶습니다. 임진왜란이 과연, 단순한 일본의 난동이었나요? 아닙니다. 그것은 참혹한 전쟁이었습니다. 난동이 아닌 전쟁이었기에 임진왜란은 `임진전쟁’ 또는 `조일전쟁’으로 바로잡아야 합니다. 이글에서는 임진전쟁으로 순화하겠습니다.

 일본 전국시대. 유명한 가문의 후계자였던 사야가. 그의 아내와 딸을 볼모로 협박한 도요토미 히데요시. “조선에 출병하지 않으면 아내와 딸이 무사하지 못할 것이다.” 어쩔 수 없이 조선을 침략한 사야가. 무참히 살해되는 조선인 모녀의 모습과 겹쳐지는 자신의 아내와 딸. “명분 없는 전쟁을 일으킨 왜군에 환멸을 느낀다.” 부산진 함락 다음 날. 사야가가 조선군에 보낸 한 통의 편지. “조선으로 귀화하고 싶다.” 하사 받은 새 이름. 성은 김해 김(金). 이름은 `충성스럽고 어진 마음’ 충선(忠善). 그 후 왜군에 함락된 18개의 성 복원. 1624년 이괄의 난 때 승리. 1636년 병자호란 때 승리. 화약제조법 전수. 조총기술 전수. 조선의 명장으로 활약했던 영웅. 사야가 김충선. <역사e 1부 챕터 5 영웅과 역적 사이 중>

 `역사 e’는 EBS에서 방영 중인 교양프로그램 `역사채널e’를 책으로 엮은 것입니다. `우의 역사’도 `좌의 역사’도 아닌 `가려진 역사’ 다시 말해, `역사 e’에는 조명 받지 못하거나 왜곡된 진실들이 담겨 있습니다. 몇 페이지 넘기지 않았는데 머리가 띵해졌으며, 며칠 밤을 고민하게 만든 책이었다는 것이 저의 독서 후기입니다. 읽기도 힘들지만, 읽은 후가 더 힘들었습니다. 역사에 대한 무지의 무게에 짓눌렸기 때문입니다.

 

 구사일생 돌아왔지만 내쫓긴 환향녀

 

 1636년 병자호란. 당시 조선의 인구 1000만 명. 청나라로 납치된 조선인의 숫자 50만 명! 유독 사대부 집 여인을 노렸던 청나라 군사들. 그들이 기대한 것은 납치한 조선인들을 가족에게 되팔아 얻는 돈! 갈수록 커지는 포로 교환비. 하지만 간신히 되돌아온 그녀들을 기다리는 것은 소박맞을 운명과 세상의 싸늘한 시선. 정절을 잃은 여인의 자손은 과거 응시자격 박탈! 출세 금지! 가문으로부터 버림받은 수많은 여인들이 선택한 길. 자결. 가문의 명예를 위해 부인을 며느리를 버릴 수 있었던 시대. <역사 e 2부 챕터 3 고향으로 돌아온 여인들 중>

 `역사 e’에는 김충선처럼 더할 나위 없이 고마운 인물과 함께 오해로 얼룩진 인물들도 그려져 있습니다.

 병자호란 때 청나라에 납치됐다 돌아온 조선의 여인들(환향녀·還鄕女·그토록 그리던 고향으로 돌아온 여인들)이 대표적입니다. 구사일생으로 살아 돌아온 환향녀에 대한 조선인들의 시선은 곱지 않았습니다. 대부분의 사대부 집안들은 청나라에서 돌아온 며느리들을 정절을 잃어버린 더러운 여자로 취급해 쫓아냈습니다. 집에서 내쫓긴 여성들은 나무에 목을 매거나 강물에 몸을 던졌으며 더러는 청나라로 돌아가기도 했습니다. 또한, 문란한 여자를 일컫는 화냥년이라는 말도 환향녀에 뿌리를 두고 있습니다. 이제 와서 환향녀의 아픔을 어루만질 수는 없지만 적어도 화냥년이라는 말은 앞으로 삼가야겠습니다.

 우리 역사에서 백정이라는 말이 처음 등장하는 것은 고려시대였다. 당시 백정은 우리가 지금 생각하는 소나 돼지를 잡은 사람이 아니었다. 원래 백정은 농민을 가리키는 말이었다.

 고려에서는 소나 돼지를 잡는 사람을 `화척’ 또는 `양수척’이라 불렀다. 이들은 주로 한반도로 흘러들어온 북방의 유목민들이었다. 세종은 `화척’이나 `양수척’ 같은 호칭을 일반 백성을 뜻하는 `백정’으로 합쳐 부르게 했다. 하지만 조선의 백성들은 이를 거부했으며, 이때부터 백정은 `도살업을 하는 무리’로 의미가 변했다. 조선의 백성들은 북방 유목민들을 천민집단으로 따돌렸다. <역사 e 2부 챕터 5 조선의 이방인 백정 중>

 제가 사는 동네 인근에는 도축장이 있습니다. 대통령도 함부로 들어가지 못하는 곳이 도축장인지라, 도축업에 종사하시는 분들의 처우를 가늠하기 힘듭니다. 하지만 도축업에 대한 이미지가 여전히 밝은 것 같지는 않습니다. 또한, 한우에 열광하고, 여기저기 삼겹살 굽는 냄새가 진동하며, `치느님’이라는 상업성 짙은 단어를 남발해가며 치킨을 하느님과 동격으로 여기는 세태가 고기에 관해 이중적인 모습을 보인 조선시대와 별반 달라 보이지 않습니다. 백정에 담긴 `특정 집단에 대한 배타적 뉘앙스’가 사라지지 않는 한 고기에 대한 우리의 이중적 태도는 여전할 것입니다.

 

 인간 행동은 과거나 현재 모두 비슷

 

 1942년 6월. 네덜란드 암스테르담. 다락방에 숨은 한 소녀는 펜을 들었다. 자전거도 빼앗기고 전차나 자동차도 탈 수 없다. “저녁 9시부터는 거리에 나갈 수도 없다. 아무것도 할 수 없는 금지된 생활의 연속이다.” 일기에 적힌 열세 살 소녀의 기억. 안네의 기억. 역사의 기억.

 1960년 4월. “지금 광화문 네거리와 시청 앞에서 대학생들이 데모를 하고 있어 나도 뒤를 따라가보니 온통 사람들로 거리가 막혔지 뭐니.” 소녀의 일기에 적힌 “민주주의를 수호하라.”

 1980년 5월. 소녀는 신문기사를 모으기 시작했다. “왜 사실을 사실대로 보고하지 않는가. 왜 정부에 유리한 내용만을 발표하는가. 구경하던 어린이, 할머니까지 총으로 무차별 살해한다. 쓰러져가는 많은 시민들을 보았는가? 직접 보지 않은 사람은 이 사태를 이야기할 수 없다.”

 1942년 6월 홀로코스트 당시의 안네. 1960년 4·19 혁명 당시의 여고생. 1980년 5·18민주화운동 당시의 여고생. 자신이 본 것을 잊지 않기 위해 일기를 쓴 세 소녀. 역사를 잊지 않기 위해 일기를 쓴 세 소녀. 기억을 잊지 않기 위해 일기를 쓴 세 소녀. <역사 e 3부 챕터 2 기억을 기억하라 중>

 “과거를 기억하지 못하는 이들에게 과거는 반복된다.” 미국의 철학자 조지 산타야나의 말입니다. 안네가 일기를 쓴 것도, 4·19와 5·18 당시에 여고생들이 일기를 쓴 것도 과거를 기억해서 과거의 잘못을 반복하지 않겠다는 의지의 표명입니다. 허나, 과거와 현재는 엄연히 다른데 과거가 반복될 수 있을까요?

 미국의 저명한 신화종교학자 조셉 캠벨은 말합니다. “인간의 마음이라는 것은 그 인간이 어디에 살든 기본적으로 같다. 같은 기관, 같은 본능, 같은 충동, 같은 갈등, 같은 공포를 가졌으니 인간은 같을 수밖에 없다.” 공자는 이러한 인간의 공통점을 인(仁·씨앗)이라 명명하며 “인간은 모두 같은 씨앗을 가지고 있다”고 말했습니다. 역사는 인간의 행동에 관한 기록입니다. 또한, 조셉 캠벨과 공자의 말처럼 인간의 공통된 특성은 변하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과거의 행동과 현재의 행동은 비슷할 수밖에 없으며, 인간 행동의 기록인 역사도 시간을 거슬러 유사함을 가질 수 있습니다.

 

 21세기 김충선·백정·환향녀…

 

 생활양식의 변화로 쉽게 알아보지 못할 뿐 `역사 e’에 담긴 인물들을 오늘날에도 찾아 볼 수 있습니다. 일본의 역사 왜곡을 지적하는 소수의 일본역사학자들은 21세기 김충선입니다. 열악한 환경과 차별 속에서 한국의 3D업종을 떠받치고 있는 외국인 노동자들은 이 시대의 백정입니다. 역사는 끊임없이 반복되어 왔고, 끊임없이 반복 될 것입니다. 그래서 역사는 모르면 위기요, 알면 기회입니다. 세월호를 잊지 말아야 하는 것도 결국 우리 모두의 안전 보장과 상식이 통하는 세상을 만들기 위해서입니다. 20140416 결코, 잊지 맙시다!

 김충선. 이순신 장군과 더불어 임진전쟁에서 꼭 기억해야 할 인물입니다. 김충선은 처음부터 임진왜란을 명분 없는 전쟁으로 보았다고 합니다. 또한 전쟁 중에 늙은 부모를 업고 도망치는 조선인의 모습에 큰 감명을 받아 500여 명의 부하들과 함께 조선군에 가담해 혁혁한 공을 세웠습니다. `명량’의 배경이 된 1597년 정유재란(정유재란 또한 정유전쟁으로 바로 잡아야함)때에도 `바다에는 이순신, 육지에는 김충선’이라 할 만큼 많은 공을 세웠습니다. 병자호란 때에는 스스로 군사를 모아 적군 500여 명을 사살했으며, 이후 인조가 내린 벼슬도 마다하고, 후학을 양성하다 72세의 나이로 조선에 잠들었습니다.

 백정은 본래 농사를 짓는 평범한 백성을 의미하는 말이었습니다. 조선인들의 북방 유목민들에 대한 배타적인 감정은 백정의 의미를 백성에서 도살업자로 바꿔놨습니다. 조선시대의 백정은 노비만도 못한 대우를 받았습니다. 어린아이에게도 머리를 숙여야했고 결혼식 때 가마를 이용하거나 장례식 때 상여를 이용하지도 못했습니다. 평민들 앞에서도 담배를 피우거나 술을 마실 수 없었으며, 길에 다닐 때는 백정을 의미하는 대나무 패랭이를 썼습니다. 양반, 상놈, 너, 나 할 것 없이 고기라면 환장했던 조선인들이지만 고기를 다루는 백정에 대한 처우에 있어서는 이중적인 모습을 보였습니다.

김태균<인문학공간 소피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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