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면앙정과 주변 상수리 나무들.
 숲속 나무들이 조용히 바쁘다. 4월의 숲은 형광빛으로 반짝인다. 땅 속 뿌리가 물을 모아 줄기로 올리면 가지들은 꽃눈을 틔우고 잎눈을 밀어낸다. 나무들은 종일 초록 물을 내뿜는다.

 생기 넘치는 4월 중순에 면앙정을 올랐다. 2월에 보았던 우람한 상수리나무를 보고 싶어서였다. 면앙정 상수리나무는 굵은 줄기에 연약한 이파리를 달은 채 햇볕을 한껏 받아들이고 있었다. 가지 끝에 작고 빨갛게 피는 암꽃은 너무 높아 보이지 않고, 연노랑 수꽃을 잎겨드랑이에 주렁주렁 매단 나무는 초록보다 노랑에 가까웠다.

 5월 첫날에 다시 면앙정 계단을 밟았다. 상수리나무는 2주일 새에 잎이 무성해지고 짙어졌다.

 ‘왜 상수리나무를 심었을까?’

 상수리나무는 민가 주변에서 많이 자라는데 일부러 심어서 가꾼 숲이 대부분이다. 그만큼 쓰임새가 다양했다. 우선 상수리나무 열매인 도토리를 가루내어 묵을 쑤어 먹었다. 지금이야 묵이 별미지만 흉년이 들거나 먹을 게 귀했던 시절에는 허기를 면해주던 구황식품이었다. 선조 임금이 임진왜란 피난 길에 도토리 음식을 먹고 감탄하여 매일 상에 올리라고 한 이후에 상수리나무라는 이름을 얻었다는 설이 있는 것만 보아도 도토리가 중요한 식량자원이었음을 알 수 있다.

 목재는 곧고 단단해서 차량의 바닥재나 탄광의 갱목으로 널리 쓰였다. 차곡차곡 쪼개 쌓아올린 장작더미는 밥을 짓고 구들을 덥히는 땔감이었다. 고등어를 굽는 숯도 참나무로 만든 참숯이 으뜸이었다. 근래에는 숯의 항균성을 앞세워 습기 제거제·옷감·주방세제·숯공예·신발 밑창 등 다양한 상품으로 재가공 되고 있다.

 상수리나무 잎은 지방 성분이 많은 왁스 층을 함유하고 있어서 연료용으로 좋지만 논과 밭에 넣으면 좋은 퇴비가 되었다. 더구나 맛난 표고버섯도 키워내니 더할 나위 없이 좋은 진짜 나무, 참나무이다.

 상수리나무는 인간에게만 유용한 것이 아니다. 상수리나무 한 그루는 그 자체로 숲속생태계를 이룬다. 도토리는 다람쥐·청서·어치·멧돼지 같은 야생동물을 살찌우는 영양 식품이면서 곰팡이의 에너지원이 되기도 한다. 어린 싹은 들쥐들이 갉아먹고, 좀 더 자란 이파리는 노루가 뜯어 먹는다. 장수풍뎅이·사슴벌레·왕오색나비·흑백알락나비 등의 곤충은 상수리나무의 수액을 먹기 위해 모인다. 상수리나무 한 그루에 의지하는 동물이 100종 가까이 된다고 하니 놀랍다.

 상수리나무는 지면에서 첫 가지까지의 높이가 매우 높은 수종이다. 면앙정 상수리나무도 5m는 족히 자란 후에 옆으로 가지를 뻗어 전체적으로 합죽선 수형을 이루었다. 사람으로 치면 단단하게 잘 뻗은 몸매를 가진 청년일 것이다. 이런 상수리나무가 두 아름이나 되는 줄기로 든든하게 버티고 서서 양팔을 벌리니 가지가 하늘을 가릴 정도로 풍성하였다. 상수리나무 한 그루가 드리운 그늘은 온 동네 사람이 모여 잔치를 벌여도 될 만큼 넓었다. 면앙정 주변에 심어진 200년 된 상수리나무와 그의 후손들이 숲정이를 이루었다. 아래에서 보나 위에서 보나 사방이 푸르러 청풍을 들인다는 말이 실감났다.

 

 십년을 경영하여 초려삼간 지어 내니

 나 한 칸, 달 한 칸, 청풍 한 칸 맡겨 두고

 강산은 들일 데 없으니 둘러 두고 보리라.

 

 면앙정 송순의 시조를 읊으며 돌계단을 내려오는데 겨울 내내 야생동물의 눈을 잘 피하고 버틴 도토리 한 알이 갈고리 모양의 뿌리를 내밀고 있었다. 땅속에 뿌리를 내리지 못했으니 살아남지 못할 것이 자명하였다. 나무 한 그루가 일년을 경영하여 13개월 만에 수많은 도토리를 생산하고 떨구지만 그 중 한 알 정도만이 어른 나무가 된다고 한다. 이토록 힘겹게 어른이 된 나무는 주변 생물에게 잎·열매·껍질·그루터기까지 모두 내어준다. 200년 전 면앙정의 주인은 나누는 삶을 의식하고 상수리나무를 심었을까? 오늘 면앙정 상수리나무가 참살이 세 글자를 생각케 하였다.

성미현<광주생명의숲 숲해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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