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억의 저장소, 생의 버팀목
‘나의 살던 고향’

▲ `나의 살던 고향’을 새긴 간판은 고향의 이름에 부끄럽지 않게 살겠노라는 자기 다짐과 성찰의 푯대이기도 했으리라. 광주 양동시장.
 <나는 북관(北關)에 혼자 앓어 누워서/ 어늬 아침 의원(醫員)을 뵈이었다/ 의원은 여래(如來)같은 상을 하고 관공(關公)의 수염을 드리워서/ 먼 ㅤㄴㅖㅅ적 어늬 나라 신선 같은데/ 새끼손톱 길게 돋은 손을 내어/ 묵묵하니 한참 맥을 짚드니/ 문득 물어 고향(故鄕)이 어데냐 한다/ 평안도(平安道) 정주(定州)라는 곳이라 한즉/ 그러면 아무개씨(氏) 고향이란다/ 그러면 아무개씨(氏)를 아느냐 한즉/ 의원은 빙긋이 웃음을 띠고/ 막역지간(莫逆之間)이라며 수염을 쓴다/ 나는 아버지로 섬기는 이라 한즉/ 의원은 또 다시 넌즈시 웃고/ 말없이 팔을 잡어 맥을 보는데/ 손길은 따스하고 부드러워/ 고향도 아버지도 아버지의 친구도 다 있었다>

 (백석, `고향’)

 

 광주 양동시장 이재옥(74) 할아버지는 `영광상회’라고 고향을 간판에 걸고 온갖 약초를 팔고 있다.

 “아픈 사람 낫게 하고 약한 사람 강허게 하고” 꼭 그리만 되라는 맘이었다.

 “다 나섰다문 좋제. 못 나슨 사람도 있었겄제.”

 명의라고 간판을 내건 일도 없건만, 못 나았을 그 사람이 걸리는 그 맘이다.

 “내 고향이 영광 대마 남산리여. 영광서 오셨다고, 고향사람인께 암만해도 낫겄지라 그러심서 일부러 찾아들 오셔.”

 떠올려보기만 해도 마음자리 녹자근 보드라와지는 말 `고향’.

 다순 추억이든 아린 상처든 곤궁한 기억이든 그 저장소의 문을 열 적에 물큰하게 사무치는 고향이라는 이름.

 

 <경로당에 모여/ 기억 속에 똬리 틀은 고향 자랑을/ 국수 타래처럼 풀어내던 노인들/ 점심으로 라면을 끓였는데.// 만물 박사 평양 김씨/ 라면 한 개 풀면 오십 미터라 한 것뿐인데/ 셈이 빠른 황해도 최씨 노인/ 휴전선 이십 리는 라면 여덟 상자라/ 속없이 이야기한 것뿐인데// 오늘 라면은 매웠나 보네요/ 노인들 눈자위가 붉은 것을 보면/ 라면을 그대로 남긴 것을 보면…>

 (정춘근, `라면 여덟 상자’ 중)

 

 `휴전선 이십 리는 라면 여덟 상자’라는 거리 너머, 가볼 날을 기약할 수 없는 고향은 서럽고 쓰라리다.

 크고 번듯한 간판이 있건만, 굳이 자그만 `수제’ 간판을 전등 아래 또 달아 두었다. 광주 양동시장 `고흥집’.

 “우리 아버지가 써다주신 것이어요.”

 어머니 김항덕(76)씨와 함께 장사를 하는 딸 유승희(50)씨의 말.

 “어머니가 여그서 40년 동안 장사를 해서 우리 4남매를 다 키워내셨죠. 어머니가 장사 스승이셔요. 저는 6년째 배우고 있습니다.”

 고흥이 본토배기인 아버지 유석승(76)씨는 `대영상회’라는 간판을 두고도 별칭인 양 `고흥집’이라고 굳이 써서 간판을 만들어다 주었다.

 “째깐하게 써졌는디 고흥분들은 이 간판 보고 왔다고 반가와라 해요. 아무 뭣도 없이 그냥 서로 좋아해요. 고향은 그런 것인가 봐요.”

 임실 관촌읍, 두 몸인 듯 한 몸인 간판을 내어건 `관촌신발집 고향사진관’의 김정우(82)·이옥희(81) 부부. 남편은 사진을 업으로, 아내는 신발장사를 업으로 자식을 키우며 해로하였다.

 “사진 찍으러 왔다가 신도 한 컬레씩 사서 신고 가셔.”

 임실 성수면 삼봉리가 고향인 이옥희 할매는 네 살 때 엄마 잃고 외할머니 손에 자라 스무 살에 혼인했다. 무엇을 갖고 싶다는 맘을 꿈에도 품어보들 못하고 어른이 됐다.

 “전에는 신발도 귀혀. 신발이란 것이 `장만’을 하는 것이었어. 애기들 데꼬와서 새신 신겨놓고 어매도 애기도 좋아해. 오진 꼴 많이 봤제. 혹간에 신발값보다 갖고 온 돈이 크게 짝아도 그냥 신겨갖고 가시오했어. 못 받을 폭으로 줘. 안 갖다 준 사람은 없어. 못 갖다 준 사람은 있었겄제.”

 새신을 신고 팔짝 뛰어보려는 남의 집 아이를 실망시키고 싶지 않았던 신발가게 아짐이 웃고 있는 곳, 고향.

 “늙은이는 걱정허들 말고 지발 존 일에 니그들이나 잘 살아라 잉!”

 땡볕에 비바람에 흙투성이로 살아야 하는 촌으로 다시는 돌아오지 말라고 등떼민 부모들이 사는 고향. 구부정해서 안쓰럽고, 굿굿한 대로 짜안한 고향.

 

 <이미 우리에게는/ 태어난 곳이 고향이 아니다/ 자란 곳이 고향이 아니다/ 거기가 고향이 아니다/ 거기가 고향이 아니다/ 산과 들 온통 달려오는/ 우리 역사가 고향이다>

 (고은, `고향에 대하여’ 중)

 

 `슬픔도 노여움도 없이 살아가는 자는 조국을 사랑하고 있지 않다’는 네크라소프의 말을 기억한다. 태어나고 자란 곳이 아니라, 과거의 기억과 추억의 저장소가 아니라, 시방 달려오는 미래가 고향이라면 박제된 과거가 아니라 지금부터 새로 지어갈 미래가 고향이라면 우리는 11월 바람찬 거리에 꺼지지 않는 촛불을 들어야 할 것이다.

글=남인희·남신희 `전라도닷컴’기자

사진=박갑철 `전라도닷컴’ 기자·최성욱 <다큐감독>



※이 원고는 월간 `전라도닷컴’(062-654-9085)에도 게재됐습니다.

[드림 콕!]네이버 뉴스스탠드에서 광주드림을 구독하세요

저작권자 © 광주드림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