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60년대 경양방죽

▲ 완전매립 직전의 경양방죽 항공사진.

 일제강점기 말엽인 1940년대 그 일부가 매립됐지만 해방 후까지 경양방죽엔 아직 물이 넘실거렸다. 경양방죽 전면 매립이 본격적으로 논의되기 전인 1964년 1월, 광주의 한 지역신문은 항공사진과 함께 경양방죽을 소개했다. 좀 생뚱맞다 싶지만 신문은 대뜸 방죽을‘광주의 바이칼 호수’라고 치켜세웠다. 수질이 깨끗해서 그랬는지, 넓어서 그랬는지는 알 수 없다. 하지만 바이칼 얘기를 꺼낸 것이 좀 과하다 생각했던지 신문은 금세 ‘하늘에서 보면 크나큰 송편 떡 같다’고 좀 더 현실적인 표현으로 말을 돌렸다.

 

연못에서 방죽으로, 다시 쓰레기통 전락

 그런데 하늘에서 내려와 방죽 곁을 걸으면 실상은 전혀 딴판이었다. 조선시대에 이곳을 지나던 시인묵객들이 그렸던 모습이나 정취는 온데간데없었다. 방죽은 이제 악취가 진동하는 곳이었다. 신문은 ‘방죽이 연못에서 방죽으로, 다시 쓰레기통으로 변했다’고도 개탄했다.

 그리고 이곳을 메워 아예 공설운동장으로 만들자는 의견도 있다고 전했다. 공설운동장은 당시 광주 최대 관심사 중 하나였다. 광주는 65년 전국체육대회(체전)을 앞두고 있었다. 이를 위해서는 대형 공설운동장이 필요했다. 이때 공설운동장 후보지로 몇 군데가 거론됐다. 지산동의 교도소와 그 사역장 부지, 용봉동의 전남대 교내, 신안동의 태봉산 일대, 임동의 기존 공설운동장 자리, 그리고 계림동의 경양방죽이었다. 물론 최종적으로 임동의 기존 운동장을 고쳐 쓰는 것으로 결정됐지만 이미 경양방죽은 언제든 매립 가능한 곳으로 간주되고 있었다.

 1967년 4월 같은 신문은 다시 경양방죽을 다뤘다. 이때는 ‘콩 한 되를 볶아먹으며 돌아도 다 못 돌만큼 컸던’ 방죽의 매립이 거의 기정사실화된 상황이었다. 당시 신문에 비친 경양방죽은 어떠했을까? 사람들은 경양방죽의 최대 수원이 광주천이란 사실을 알았다. 광주천과 방죽을 연결하던 도랑의 존재도 알았다. 당시 금남로3가의 법원 옆 지금의 중앙로 자리엔 아직 도랑이 남아 있었다고도 했다.

 

방죽 매립 소식에도 여론은 무반응?

 방죽에 신비감을 보태주는 얘기, 즉 방죽의 굴착과 관련한 전설도 차고 넘쳤다. 요즘은 방죽의 굴착자를 김방이란 특정인물로 몰아가는 추세지만 당시엔 견훤의 어머니이었다는 남원부인, 서방에 살던 이씨 등 전해지는 방죽 굴착자도 여럿이었다. 방죽의 굴착을 견훤의 시대로까지 거슬러 올라가는 것은 특별한 근거도 없고 그렇게 볼 정황도 없었지만 우리가 전해들어온 것보다 방죽에 관한 전설은 훨씬 다양하고 풍부했던 모양이다.

 그렇다면 방죽의 매립으로 광주는 무엇을 하려고 했던 것일까? 1967년 5월 광주시는 매립지의 상당부분을 주택지로 만들고 그 분양으로 생긴 돈으로 매립비용을 충당할 생각이었다. 도랑 치고 가재 잡겠다는 것이었다.

 그런데 한 가지 궁금증이 든다. 방죽 매립에 대한 광주지역의 항의나 저항이 없었던가 하는 것이다. 필자가 본 당시 지역신문에서는 이런 움직임이나 분위기를 전한 기사가 없다. 1930년대 서슬 퍼런 일제강점 중에도 방죽의 부분매립을 반대했던 결연함은 다 어디로 간 것일까? 속단할 순 없지만 60년대 방죽의 전면매립 때 지역사회의 ‘무반응’과 그것을 낳은 배경은 앞으로도 곱씹어 볼 대목이다.

 물론 매립과정을 둘러싼 갈등이 전혀 없지는 않았다. 매립 전 경양방죽의 둑길에는 100여 채의 민가들이 있었다. 둑길 끝에 있던 몇 채의 기와집을 빼면 대부분은 초가집이거나 판잣집이었다. 더구나 이 둑길은 시유지였으므로 이 건물들은 불법 건축물이었던 셈이었다. 이곳 거주자들은 대부분 엿장수이나 노점 같은 행상으로 생활했다.

 

방죽 매립 중 흔적도 없이 사라진 철거민들

 이후 2년에 걸친 악몽 같은 가뭄의 징후들이 나타날 즈음인 67년 8월, 물 부족으로 민심이 흉흉한 가운데 매립사업이 진행됐다. 먼저, 둑길 위에 길게 늘어선 이들 불법 건축물에 대한 철거작업부터 시작됐다. 많은 이들이 보상을 받을 길 없이 철거를 지켜봐야 했다. 그들 중엔 이런 판잣집에서조차 세 들어 살아야 했던 젊은 부부가 있었다. 남편은 스물 둘, 아내는 스무 살이었다. 아내는 출산을 앞둔 만삭의 임신부였다. 그녀는 철거반원들이 집을 부수는 광경을 한동안 묵묵히 지켜보더니 어디론가 사라졌다. 그리고 한참 뒤에 누군가 비명을 질렀다. 그녀가 독극물을 마시고 목숨을 끊은 채 발견됐던 것이다. 다음날 ‘철거민 30여명이 시청으로 난입, 기물을 부셨다.’

 매립 후에 이들 철거민은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몇 년 뒤엔 당시 자살한 임산부 얘기조차 잊혀졌다. 대신 방죽 일대의 땅값은 치솟았다. 69년 이곳 땅값은 도로 주변을 기준으로 평당 7만5000원이었는데 1년 만에 10만 원으로 뛰었다. 도로에서 떨어진 매립지 안쪽의 땅값도 3만 원대였다. 옛 둑길 아래쪽에 해당하는 중흥동에는 시교육청과 중흥초교 그리고 번듯한 주택들이 들어섰다. 복덕방도 40여개나 성업 중이었다. 경양방죽은 그렇게 매립됐다.

조광철 <광주시립민속박물관 학예연구사>



‘조광철’님은 태생이 목포, 그러나 광주에 대한 누구보다 극진한 애착은 갖은 사람. 숨겨진 광주 이야기를 찾기 위해 옛 지도를 살피고, 토박이들의 살아있는 증언을 듣고, 기록의 습관을 유전자 속에 각인시켜 놓은 사람. 그의 가장 큰 기쁨은 증언과 조사를 통해 흐트러진 시간의 파편을 끼워 맞추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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