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바타 씨의 소들이 초원에서 한가롭게 풀을 뜯고 있다.
개인적이라면 개인적일 이야기일 수도 있겠다. 지난 7월1일부터 10일 새벽까지 몽골의 하늘 아래 있었다. 몇몇 지인들과 몽골을 여행했다. 애초 취재 목적이 아니었지만 거의 10일 동안이나 편집국을 비운 죄(?)로 유·무형의 압박(?)이 가해졌다.(고 느꼈다.) 하여 경험했던 몽골에 대한 이야기를 몇 차례에 걸쳐 지면에 풀어볼까 한다. 짧은 기간 동안 내가 엿본 몽골의 단편적, 파편적 기록 쯤 되겠다. 독자 여러분의 양해 부탁드린다. <편집자주>

 
가도 가도 끝도 없는 초원을 달리는 길. 이제 ‘새롭지 않을 만큼’ 질리도록 초원 위에 있을 것임을 깨달은 어리석은 여행객들은 목을 좌우 위 아래로 꺾어가며 지구의 표면에 리드미컬하게 반응하며 차에서 잔다. 오래 잔 것 같은데 눈 떠보면 초원. 운전사 나츠가는 얼마나 피곤할까. 생각하면서도 잠에 늪에 빠져 허우적 대기를 반복하는 길. 그리고 닿은 곳은 초원 위의 2층집. 진짜 몽골 유목민의 집에서 하룻밤 신세를 질 것이라고 가이드 빌궁이 말했다. 나츠가 씨와는 꽤 가깝게 ‘아는 사이’ 인 누군가의 집에서 하룻밤 신세를 지게될 듯 했다. 보통 유목민들은 게르에 살지만, 우리가 묵을 곳은 2층 건물로, 한국에서 이주노동자로 일을 하고 번 돈으로 집을 지었다는 나츠가 씨의 설명을 들었다. 한국에서 이주노동자였던 누군가가 다시 몽골 유목민으로 돌아와 산다. 호기심이 일었다. 곧 만날 터.
 
 ▶한국선 이만수, 몽골선 바타인 그

 2층집서 구릿빛 그을린 피부의 체격좋은 남자와 그의 아내가 사람좋은 얼굴로 우리 일행을 반겼다. 우리는 “샘배노”라고 인사했지만 그는 “안녕하세요”라고 인사했다.

 “우와 한국말 하시네요?”

 그는 가이드 ‘빌궁’처럼 유창하진 않았지만 한국말을 곧잘 했고 알아들었다. 예컨대 초원 위 화장실을 보고 경악하는 우리에게 “괜찮아” “갔다와”했으며, 용기를 ‘장전’하고 화장실을 성공하고 돌아온 우리에게 “시원해?”라고 묻기도 했다. 그리고 자신의 인생 이야기도 들려줬다. 그는 자신이 서울 마장동에서 물건을 배달하는 일도 했고 경기도 광주의 자동차 시트커버 만드는 공장에서도 일을 했다고 소개했다. 2003년 쯤 한국에 갔고 3년 일을 하고 몽골로 돌아왔다고. 그리고 자신의 이름은 ‘바타’인데 한국 이름은 ‘이만수’였다고 했다. 우리는 ‘만수 아저씨’라고 그를 불렀다.

 우리는 몽골방식대로 손님 접대를 받았다. 집 안으로 들어서자마자 그의 아내가 사탕이 가득 담긴 바구니를 내밀었다. 소파에 앉아 있으니 노란 국수를 꼬아 뭉쳐놓은 것 같은 무언가와 하얀 색 마실 것이 나왔다. 노란 건 ‘아롤’이라고 하는 간식. 말린 우유가루로 반죽을 해 틀에 찍어 말린 몽골의 유제품으로 먹으면 온몸을 꼬게 되는 강력한 신맛이 난다. “화장실 가는 데 좋다”고 빌궁이 말을 보탠다. 마실 것으로 내온 건 뜨끈한 ‘수테차’. 전날 마신 술이 해장(?)되는 느낌? 숭늉같은 고소한 맛이 났다. 우유에 차(茶), 소금, 물을 섞어 끓이는 수테차는 몽골 사람들이 항상 곁에 두고 마시는 음료. 그렇지만 식사 때 곁들여 마실 때는 든든해서 음료라기 보다 ‘국물’ 같았다. 촉촉하게 보이는 ‘으름’도 맛보았다. 우유를 끓인 후 윗부분의 지방을 걷어서 응고 시킨 것인데 주로 빵에 발라 먹는다고.

 ‘만수 아저씨’는 나란히 앉은 우리 일행들에게 작은 병을 건냈다. ‘호륵’이라는 코담배로 주인이 손님에게 ‘환대’의 표시로 권한느 것인데 주로 남자들끼리의 예절이라고 했다. 손바닥과 손바닥을 맞닿게 해 마치 바톤 터치하듯 병을 건내 받은 후 뚜껑을 살짝 열고 냄새를 맡으면 된다고. 몽골 사람들은 코담배 병을 아주 귀하게 여기는데 주로 ‘옥’같은 것으로 만든다고. 부자들은 한 병에 몇억 원씩 하는 코담배 병을 갖고 있기도 하단다.
 
 ▶소도 몰고 소젖도 짜고

 저녁엔 우리가 준비해간 삼겹살로 ‘파티’를 할 참이었다. 빌궁이 삼겹살 저녁을 준비하기로 했다. 그 동안 우리는 낮동안 풀어놓은 소들을 우리로 몰아 넣으러 가는 만수 아저씨를 따라 나섰다. 오후 7시였지만 해가 짱짱했다. 만수 아저씨는 한국에서 일해 번 돈으로 100여 마리의 양과 십여 마리의 소와 몇 마리 말을 키운다고 했다. 소들은 집에서 가까운 곳에 삼삼 오오 모여 풀을 뜯고 있었다. 소는 그저 풀을 뜯었을 뿐이겠지만 한폭의 목가적인 그림이 됐다. 평화로운 풍경. 하지만 소몰기가 시작되자 곧 역동적 풍경으로 뒤바뀌었다. 만수 아저씨는 능숙하게 소를 몰아 집 곁에 있는 우리로 소를 들여보냈다. 소를 몰 때 ‘헉’소리를 냈다. 우리 일행도 아저씨를 도와 소를 몰았다. 우리 중에서도 ‘군계일학’의 소몰기 스킬을 뽐낸 이가 있었는데 마치 한 마리의 소가 된 듯 우렁차게 ‘헉’을 외치며 초원을 달려다니는 ‘그녀’가 인상깊었는지 만수 아저씨는 그만 ‘그녀’의 이름 `유리’을 외워버렸다. “유리는 소몰기 잘해!” 만수 아저씨는 우리는 ‘유리’들로 통칭하기로 한 듯 했다. 무슨 일만 있으면 ‘유리’를 불렀다.

 집 밖에 있던 소가 모두 집합했다. 젖을 짜는 게 그 다음 중요한 일과라고 했다. 젖을 짜야 ‘아롤’도 만들고 ‘수테차’도 만들고 ‘으름’도 만들 터. 유목민에게 우유는 없어서는 안될 중요한 식량이다. 아저씨가 소를 몰고 그의 아내가 젖을 짰다. 우선 송아지를 먼저 데려와 묶어 놓고 다음 어미소를 데려와 젖을 먹여 젖이 돌게 한 다음 다시 송아지를 잠시 떼어놓고 젖을 짠다. 양동이 가득 하얀 우유가 가득 찼다. 우유는 다양한 요리로 변주돼 아침 상에 오를 터였다.

 소도 몰았고 젖도 짠 우리 일행과 만수 아저씨와 그의 아내가 집으로 돌아오니 삼겹살 파티가 준비됐다. ‘흥’이 많은 우리는 빌궁 나츠가, 만수 아저씨인 바타, 그의 아내도 함께 식사자리에 모셨다. 흥이 많은 우리는 “삼겹살엔 쏘주지”를 외치는 만수 아저씨를 위해 한국서 공수해 간 소주팩들을 거하게 풀었다. 운전하느라 고생한 나츠가 아저씨도 소주잔을 연신 들었다. 서로 말은 잘 안통했지만 또 통하기도 했다. 만수 아저씨는 한국에서 일했을 때 일들을 들려줬다. 의심 많은 우리는 “혹시 임금체불 같은 걸 당하지 않았냐”고 물었지만 “사장님은 좋았다”며 “한국에 가면 꼭 ‘만수는 잘 살고 있다’고 안부를 전해달라며 전화번호까지 종이에 적어 주었다. 한국에서의 그는 일요일 쉬면서 전국노래자랑 보는 게 낙이었다고 했다. 육고기가 주식인 그에게 한국 음식은 너무 고기가 적었기 때문에 그는 늘 식사 때 마다 “고기 더 많이”를 외쳤다고. 그는 제육볶음과 김밥○○의 김밥을 좋아했다고.

 그러나 몽골에서 가족과 함께 유목민으로 사는 삶을 그는 더 사랑하는 듯했다. 늘상 평화로운 건 아니라고 했다. 지금은 여름이라 살기 좋지만 겨울이 되면 가축들을 데리고 산 위로 올라간다고 했다. 겨울의 매서운 추위와 엄청난 양의 눈 때문에 산 으로 올라간다고.별이 뜨는 시간이 되자 ‘흥이 많은’ 우리는 집밖으로 나와 돗자리를 깔고 둥그렇게 모여서 술자리를 이어갔다. 별이 쏟아졌다. 노래가락이 흘러나왔다. “당신은 나의 동반자~영원한 나의 동반자~” 한국에선 이만수였고 몽골에선 바타가 부르는 노래가 별 쏟아지는 컴컴한 초원 위로 퍼져나갔다.
황해윤 기자 nabi@gjdream.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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