옷을 패션으로 만드는 힘은 상상력이다

▲ 수지 모거스턴 `엉뚱이 소피의 못 말리는 패션’(비룡소) 중. 신문에 난 소피.
 황달 걸린 것처럼 누런 런닝구
 대야에 양잿물 넣고 연탄불로 푹푹 삶던 런닝구
 빨랫줄에 널려서는 펄럭이는 소리도 나지 않던 런닝구
 백기(白旗) 들고 항복하는 자세로 걸려 있던 런닝구
 어린 막내아들이 입으면 그 끝이 무릎에 닿던 런닝구
 아침부터 저녁까지 지게를 많이 져서 등판부터 구멍이 숭숭 나 있던 런닝구
 너덜너덜 살이 헤지면 쓸쓸해져서 걸레로 질컥거리던 런닝구
 얼굴이 거무스름하게 변해서 방바닥에 축 늘어져 눕던 런닝구
 마흔일곱 살까지 입은 뒤에 다시는 입지 않는 런닝구
 - 안도현 ‘아버지의 런닝구’
 
 제 몸에 의미를 부여하는 순간, 아이는 ‘어림’에서 ‘젊음’으로 넘어간다.

 어느 날, 아이의 입술에 불이 났다면 사춘기가 온 것이다. 솜털 보송한 민낯을 한 꺼풀 분으로 덮기 시작했다면 타인의 눈으로 자기를, 특히 자신의 외모를 들여다보게 된 것이다. 20년을 훌쩍 먼저 살아본 어른의 눈에야 생긴 그대로가 가장 예쁘고, 있는 그대로가 사랑스러움을 알고 있으나 그 시각이란 것도 시간이 흐른 후에야 겨우 얻게 된 혜안인 바. 다른 눈으로 아이를 보면 지나치게 과한 눈썹도, 붉게 도드라진 입도, 그 서투름으로 인해 도리어 순수하고 귀엽다. 그렇게 아이들은 시도하고 겪어내면서 `어림’에서 `젊음’으로 깡충 성장해간다. ‘제 몸’에 주목하고 나름의 의미를 부여하는 순간이 어림과 젊음을 결정짓는 한 방인 것. 그러므로 성장을 위한 아이의 시도를 되바라진 어른 흉내로 섣불리 치부하지 말라. 그건 계도가 아니라 몰이해이니. 그런데 여기 아주 엉뚱발랄한 소녀가 있어, 초등학교에 갓 입학하면서부터 모두의 시선을 한 몸에 받는다면? 단순함과 균형은 아이가 옷맵시를 낼 때 질색하는 두 낱말이고, 활기와 화려함의 가짓수가 아이가 좋아하는 옷차림의 경향이라면? 소피는 그런 소녀다. 당연히 소피를 맡은 담임선생님은 아이의 이상한 옷차림에 어찌할 바를 모르고 반 아이들에게 소피는 괴상한 아이로 통한다. 가령 이렇다.

 소피가 보기에 괴상한 것은 오히려 반 아이들이었다. 얼마든지 다르게 모양을 낼 수 있는데도 애들은 왜 늘 똑같은 청바지에 티셔츠를 걸치고 오는지 알 수 없는 일이었다. 교실에 있는 의자마다 똑같은 푸른색 엉덩이, 푸른색 허벅지, 푸른색 종아리가 있다는 건 얼마나 끔찍한 일인가!
 - 엉뚱이 소피의 못 말리는 패션/비룡소
 
 모자는 느낌표, 스카프는 쉼표…
 
 그렇다고 이 소녀가 옷 사는데 많은 돈과 시간을 들이리라고 오해하지 마시라. 색깔과 무늬만 눈에 들어오면 옷장에서 심심해하던 아빠의 와이셔츠도, 서랍 속에서 잊혀져가던 엄마의 긴 치마도, 버려질 날만 기다리던 처량한 한 짝 양말도 모두가 소피의 패션 아이템으로 간택되었다. 소피가 학교의 건전한 미풍양속을 해친다고 우려한 학교로부터 집으로 경고문이 온 날, 소피의 부모는 소피에게 묻는다. “얘야, 왜 그렇게 옷을 여러 겹으로 입고, 액세서리를 잔뜩 달고, 양말은 항상 다른 색으로 신는 거니?”

 소피는 대답도 세 가지 방식으로 한다. 첫 번째 대답. “아침만 되면 뭘 입어야 될지 모르겠어서 이것저것 다 입고 가는 거예요.” 두 번째 대답. “이렇게 해야 옷 입은 기분이 나요.” 세 번째 대답. “그러니까 나는 시를 쓰는 것처럼 옷을 입는 거예요. 내 몸은 종이고요. 두 손은 만년필, 두 눈은 영감의 창이에요. 모자는 느낌표, 스카프는 쉼표, 레이스는 말줄임표예요.” - 엉뚱이 소피의 못 말리는 패션/비룡소

 모자는 느낌표, 스카프는 쉼표, 레이스는 말줄임표라니. 세 번째 대답은 진실이며 시이고 문학이다. 자기가 왜 이렇게 입는지에 대한 자기만의 해석, 내 선택과 태도에 대한 스스로의 의미부여. 스토리를 만드는 능력은 누구에게나 똑같이 보이는, 그래서 밋밋하기 그지없는 사실과 일상에 색을 입히고 빛이 돌게 한다. 객관과 상식만으로도 충분히 살아갈 수 있는 사회는 “이렇게 살라”는 규칙과 규격이 정해져있어 편하기 그지없을지 몰라도 따분하고 답답하다. 게다가 그런 사회의 진짜 무서운 점은 사유의 게으름뱅이와 의존적 순응주의자를 대거 양산한다는 점이다. 전 지구인의 노예화. 생산과 유통, 소비의 시선으로 세상을 파악하는 경제인이 21세기 들어 가장 먼저 파악한 것도 가령 이 지점이었다. 더 이상 규격화된 대량생산체제로는 기업 간의 경쟁에서 살아남기 어려우리란 것. 상품이 예술이 되게 하라! 상품이 예술이 되는 지점은 그 상품에 어떤 스토리와 아우라, 개성이 깃드느냐에 달렸다. 상품은 기계가 만들지만 스토리는 사람이 쓰고 짓는다. 그래서 부모의 우려와 선생님의 꾸지람에 굴복하지 않고 자기성깔을 잘 지켜낸 오늘날의 소피들은 요새는 전부 구글에, 픽사에, 아마존에 있다.
 
 소피의 못 말리는 패션
 
 그러나 학교는 지식함양 이외에 개성과 창의력의 장(場)이어야한다는 화두는 슬로건으로는 오래 묵었을지언정 실제로는 실행 제로인가보다. 새로운 것을 요구하면서 새로운 것이 등장하면 당황해 어쩔 줄을 모르는 기성의 모순. 그래서 머리카락을 스물여덟가닥으로 묶거나 낙엽을 주워 옷에 붙이는 것으로 가을의 한 자락을 교실로 초대하고 싶었던 소피의 시도는 번번이 비난과 오도의 표적이 된다. 그러다 마침내 교장선생님의 경고성 요구로 부모님이 소피를 심리치료사에게 데려간 날, 신문에는 이런 기사와 사진이 실렸다.

 “터번은 이국의 친구 알리바바를 위하여, 세 겹 목걸이는 찰랑찰랑 소리가 나는 악기, 색이 다른 세 개의 벨트는 조국 프랑스의 국기, 자투리 실로 뜬 숄은 알록달록한 할머니의 사랑… 열 살 난 소피는 추억과 사랑과 음악과 시로 옷을 차려 입는다. 이 아이가 새로운 유행을 만들어 나갈 것인가?”

 요상한 차림을 하고 길을 걷던 소피를 본 기자가 인터뷰를 했고, 소피의 대답을 그대로 신문에 실었던 것. 재미있는 일은 지금부터다. 선생님이 신문에서 오려낸 소피의 기사를 학교게시판에 붙인 다음날, 우리가 상상하는 그 일이 벌어지고 만다. 선생님은 소피의 자랑을 입에 침이 마르게 하고 다니시고, 한 주가 흐르자 아홉 명의 아이들이 할아버지 와이셔츠, 질질 끌리는 원피스, 코까지 덮는 스카프 등을 걸치고 나타났던 것이다! 한 달이 흐르자, 학교는 그야말로 온통 소피, 소피, 소피들로 뒤덮였다. 그럼 원본 소피는 어떻게 되었느냐고? 것도 우리가 상상하는 대로다. 소피는 주름치마와 하얀 블라우스, 흰 양말에 단화를 신고 아무 것도 걸치지 않고 깔끔하게 학교에 갔다.
 
 이해력은 낯섬을 경험하는데서 커진다
 
 소피가 옷을 남과 다르게 입었던 것은 나와 다른 사람의 ‘다름’을 ‘표현’하기 위해서였다. 왼발과 오른발이라는 서로 다른 이름을 가진 각각의 발에 다른 색과 모양의 양말을 신기는 건 소피에게 당연한 일이자 발에 대한 배려다. 다름을 이해하고 인정하고 촉발시키기. 그러나 선생님과 아이들은 소피의 의도와 저의를 이해하지 못한다. 인간 개개인에게는 서로 다른 능력과 추구하는 개인성이 있다. 소피가 다른 사람과 다른 점이 있다면 이것이다. 소피는 인간이나 식물, 곤충과 같은 개념들에 사로잡히지 않고 사람과 사물들, 동물과 식물의 다른 디테일들을 유심히 보고 섬세하게 이해한다는 것. 그래서 소피의 눈 속에 포착되는 대상은 같은 것 하나도 없이 저마다 아름답다. 학교까지 걸어가는 길을 그토록 소피가 좋아하는 이유도 언제나 어제와 다른 세상이 발견되기 때문이다. 이해는 삶의 지평을 넓히고 새로움의 문을 연다. 그리고 이해는, 국어시험이 아니라 이질적이고 낯선 것들과 맞닥뜨려 그 다름을 한껏 포용해볼 때 생긴다. 세상과 대상을 이해하는 사람은 세상 만큼이나 크다. 내가 나 자신에게 하는 안 돼와 못 해를 포함해 이해의 적은 ‘안 돼’와 ‘못 해.’다. 아이가 나의 경험으로는 이해되지 않는 상상과 사유를 즐길 때, 용기와 시도를 존중하고 존경하라. 그리고 나의 협소한 이해의 폭을 넓히기 위한 배움의 장으로 활용하라. 새로운 무언가를 만나고 있는 아이를 향해 ‘오!’할 것인지 `야!’할 것인지는 우리들 각자에게 달렸다. 그러나 그 대가는 클진저.
박혜진 <지혜의숲 연구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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