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능력, 그리고 책임과 사랑
초능력을 가져도 신이 될 수 없는 우리

▲ 영화 ‘크로니클’, 조쉬 트랭크 감독.
 어릴 적 꿈속에선 늘 날아다녔다. 날았다기보다는 ‘점프’에 가까웠다. 마치 달에 있는 것처럼 길고 높게, 수도 없이 점프했다. 알 수 없는 미래 도시를 구경했고, 이름 모를 산맥을 가로지르기도 했다. 범죄조직에게 쫓길 때도 있었고, 또래 아이들과 함께 놀기도 했다. 정신없이 날다가 땅에 닿는 순간 꿈에서 깨곤 했다.

 내 비행은 늘 좀 불안정했다. 그러니까, 강을 따라 유유히 나는 기러기처럼 자연스럽고 멋지진 못했다. 그 정도의 경지는 포유류인 내 상상력 밖의 일이었을까? 상식적으로 할 수 없는 행동이라는 이성적인 생각이, 언젠가 떨어지고 말 거라는 두려움이 꿈속에서도 항상 따라왔다.

 난다는 것은 인간의 오랜 열망이 아닐까? 사람이 가질 수 없는 능력 중에 내가 제일 갖고 싶었던 게 ‘공중부양’ 능력이었다. ‘초능력이 딱 한 개만 생긴다면, 무조건 이거.’ 틈만 나면 이렇게 상상하곤 했다. 지금은 생각이 좀 바뀌었지만.
 
 
 ▶어느날 초능력을 갖게된 10년 소년들
 
 ‘크로니클’이라는 영화가 있다. 평범한 세 명의 10대 소년이 어느 날 초능력을 갖게 되는 이야기다.

 매트, 스티브, 앤드류. 세 소년은 숲 속 땅굴에서 꿈틀대고 번쩍이는 무언가를 발견한다. 광물 같기도, 생명체 같기도 한 그것을 목격한 그날 이후, 그들에게 생긴 것은 일종의 ‘염력’이다. 작은 손짓만으로 물체를 이리 저리 직일 수도 있고, 손등을 포크로 찔러도 다치지 않는다. 특별한 힘을 갖게 된 소년들은 자신들만의 불가사의한 능력을 맘껏 휘두른다.

 슈퍼에서 장을 보는 사람의 카트를 조종해서 당황시키기도 하고, 가게에 진열된 곰 인형을 공중에 띄워 아이를 놀래키기도 한다. 시럽이 뿌려진 팬케이크 위에 성모 마리아를 나타나게 해 식당 직원을 골탕 먹이는 유치한 장난도 친다. 그러는 새 소년들의 힘은 점점 커져, 공중을 날아다니는 경지에까지 이른다. 비행연습 하는 장면을 보고 있으면 마치 내가 날고 있는 것처럼 불안하면서도 가슴이 쿵쾅쿵쾅 뛴다. 소년들은 그때만큼은 오직 자신의 ‘행복’을 위해 구름 사이를 이리저리 날아다닌다.

 앤드류가 처음으로 사람을 죽이면서 모든 것은 더 이상 장난이 아니게 된다. 우발적인 사고로 소년들은 혼란에 빠지고, 그 와중에도 힘은 제어하기 힘들 정도로 계속 커진다. 앤드류는 점점 폭력적으로 변하고, 소년들의 능력 때문에 도시는 점차 혼란에 휩싸인다.

 ‘초능력을 가진 자가 모두 영웅은 아니다.’

 이 영화의 카피 문구다. 언젠가 카페에서 세 소년은, 이 특별한 능력을 무엇에 쓰고 싶은지 이야기한다. 철학도 매트는 자신 안에 있는 이타심을 말하며, 막연하지만 모두를 위해 옳은 일을 하고 싶다고 말한다. 활달한 스티브는 이렇게 대답한다. “난 모든 걸 잘하진 못하니 잘하는 모든 걸 할 거야.” 그 애는 정치인을 꿈꾼다.

 소극적인 앤드류는 딱히 뭘 하고 싶은지, 자기가 뭘 원하는지 모르겠다고 대답한다. 때리는 아빠가 싫고, 엄마가 안 아팠으면 좋겠다. 누군가 자길 좀 알아봐 줬으면 좋겠다가도, 자신만의 벽을 만들어 뒤로 숨고 싶어 한다. 학교 축제에서 마술을 부려 주목을 받고 즐거워하다가도, 증오심에 괴롭히는 아이의 치아를 뽑아버린다. 자신을 윽박지르는 아빠를 던져버리지만, 아픈 엄마를 위해서 강도짓을 해 약값을 구한다.

 감정적이든 육체적이든 모든 욕망은 충족되지 못한다. 쇼펜하우어. 영화에서 초능력은 충족되지 못한 욕망에 기름을 붓는 역할을 한다. 앤드류는 마침내 ‘포식자’가 되고 싶다고 생각한다. 초능력이 한 우울한 소년을 지긋지긋한 약자의 삶에서 해방시킨 것이다. 앤드류의 분노와 좌절은 초능력을 만나 끝없이 폭주한다.

 능력을 갖는다는 건 나를 지킬 무기가 생긴다는 것이다. 무기는 강할수록, 많을수록 좋다. 초능력은 거기에 더해서 어떤 ‘판타지’, ‘꿈’을 충족시켜준다. 유치하긴 해도 누구든 한번쯤 꿈꿔 봤으리라. 과학이 지배하는 현실 세계는 차갑고 팍팍하기 그지없고, 종교는 저마다의 교리를 내밀며 자신들의 신을 믿으라고 한다. 만약 내게 초능력이 있다면, 누구도 믿을 필요가 없지 않을까? 오직 나만을 믿고 살아갈 용기가 솟지 않을까?
 
 ▶‘초능력을 가진 자가 모두 영웅은 아니다’
 
 요즘 내가 제일 필요로 하는 것은 고통을 느끼지 않는 능력이다. 끔찍한 치과 치료를 받고 있기 때문이다. 그냥 아예 ‘자가 치유’ 능력 같은 게 좋을까? 그럼 병원 안가고 침대에 누워서 뚝딱뚝딱 아픈 델 치료할 수 있을 텐데. 아무도 날 보지 못하는 ‘투명인간’도 좋겠다. 어디든 갈 수 있는 ‘순간 이동’ 능력이 있다면, 항공료 걱정은 안 할 텐데. 시험기간엔 책을 읽는 순간 머릿속에 모조리 저장되면 좋겠다.

 근데 ‘독심술’ 같은 건 싫다. 굳이 들여다보고 싶지 않은 타인의 내면이나, 나에 대한 솔직한 감정을 속속들이 다 알아버리는 거다. 그로 인해 내가 감당해야 하는 상처들…. 그건 능력이 아니라 짐이다. 그렇다고 맘대로 타인의 정신을 지배하기도 싫다. 그 사람의 자아를 침해하는 행위니까. 빅브라더 따윈 되고 싶지 않다.

 ‘시간 이동’이란 것도 그렇다. 슈퍼맨이 사랑하는 여자를 구하기 위해 지구를 수백바퀴 돌아 시간을 되돌린 게 난 왠지 반칙 같다. 만약 그러다가 잘못되기라도 하면 어떡해? 사랑하는 사람이 죽으면 나라도 그럴 것 같아서 무섭다. 시간의 흐름을 거스르는 건 뭐랄까, 정말로 신의 영역을 침범하는 것처럼 느껴진다.

 어설프고 나약한 게 인간이다. 인간은 초능력을 가져도 결코 신이 되지 못한다. 만약 내가 내 능력만 믿고 날뛴다면, ‘더 높은 힘’이 있어서 날 운명의 소용돌이에 집어넣을 것 같다. 앤드류가 무너지고 파괴되었던 것처럼. 슈퍼맨은? 분명 걔도 벌 받았을 거야. 이렇게 걱정이 많아서야! 난 역시 모험가는 못될 체질이다. 아무튼, 초능력이 생긴다면 정신 바짝 차려야지.

 최근에 정세랑의 소설 ‘재인, 재욱, 재훈’을 재미있게 읽었다. 여기선 세 남매가 초능력을 갖게 된다. 우울하고 비관적인 ‘크로니클’과는 달리, 이 책은 따뜻하고 발랄하다. 세 남매는 각자의 능력을 이롭게 사용해서 소중한 사람을 구한다.

 늦은 밤 세 남매는 칼국수 집에 들른다. 형광 빛이 감도는 칼국수를 먹은 그들은 각자 한 가지씩 불가사의한 능력이 생긴다.

 맏딸 재인은 단단한 ‘손톱’이 자라난다. 강도와 경도가 최고에 달하는 식물성 손톱. 그녀는 이 걸로 무엇을 할 수 있을까 고민하다가, 얇은 판을 만들어 함께 일하는 연구소원들의 가운에 기워 넣는다. 또 데이트 폭력을 당하는 친구 정아에게 호신용 네일을 만들어 선물한다.

 둘째 재욱은 다가올 위험을 예지하는 ‘눈’을 갖게 된다. 시야가 붉게 물들면 조만간 위험한 상황이 불어 닥칠 징조다. 그는 사막에서 쓰러져 있는 두 소녀를 발견한다. 테러로 인해 조난당한 두 소녀를 어떻게 안전한 곳으로 보낼 수 있을까? 재욱은 고민하고, 이내 행동한다.

 막내 재훈은 ‘엘리베이터’를 마음대로 조종할 수 있게 된다. 재훈은 처음엔 학교에 늦지 않기 위해 능력을 유용하게 사용한다. 그러나 이 능력은 학교가 위험에 빠졌을 때 친구들의 목숨을 구하는 결정적인 열쇠가 된다.

 세 남매를 움직인 건 이타심이다. 그들은 곁에 있는 사람을 돕기 위해 자신의 능력을 썼다. 초능력이라는 불가사의하고 무시무시한 무기를 이롭게 쓸 수 있었던 힘은 바로 사랑인 것이다. 적어도 이 책에선, 사랑이야말로 우리가 가진 최고의 능력이라고 말한다.

 ‘사랑’이라는 범(凡)한 능력은, 우릴 더 나은 방향으로 이끌어 가고 있는 것일까?
 
 ▶큰 힘에 따르는 책임, 그리고 사랑이라는 희망
 
 하지만 지나치게 낙관적이잖아. 세상은 그렇게 우호적이지 않고, 현실에선 사랑이 모든 걸 이기지 못한다. 앤드류도 엄말 사랑해서 약값을 구하려고 돈을 훔쳤다. 그 앤 처음부터 나쁜 애가 아니었다. 똑같이 세 사람에게 초능력이 주어졌는데, 한 쪽은 불행하고 한 쪽은 행복한 게 슬프다. 왜 다를까?

 ‘크로니클’의 세 소년은 갑자기 너무나 막강한 힘을 부여받았다. 소년들은 쉽게 주어진 그 능력을 감당해낼 수 없었다. 달콤하고 특별한 힘은 판단을 흐리게 했고, 내면을 갉아먹었다. 사랑조차 폭력적이고 협소한 것으로 만들었다.

 ‘재인, 재욱, 재훈’, 세 남매의 능력은 그에 비해 사실 별 것 아니다. 고작 단단한 손톱 같은 게 얼만큼 많은 사람을 구할 수 있을까? 다가올 위험을 예지한다고 그 위험이 사라지나? 기껏해야 엘리베이터 따위를 위아래로 움직인다고 뭘 얼마나 할 수 있을까? 세 남매의 능력은 모든 문제를 해결해주진 않았다. 그래서 그들은 이 특별하고도 작은 선물을 어떻게 쓸 수 있을까 깊게 고민하고 행동했다. 그들이 가진 사랑의 힘은 그렇게 발휘되었다.

 사랑하는 누군가를 구하려는 마음은 약이 될 수도, 독이 될 수도 있다. 우린 모두 각자 가진 능력을 어떻게 쓸지 선택하고, 항상 그에 대해 책임을 진다. 가볍거나, 무겁거나. 초능력을 가진 모두가 히어로가 된다면 언제나 해피엔딩일 것이다. 하지만 세상은 내가 맘먹은 대로 착하게 굴러가 주지 않는다. 그건 초능력을 갖게 되는 일 따위 일어나지 않는 현실에서도 마찬가지다.

 초능력이라는 커다랗고 달콤한 선물이 주어졌을 때, ‘지혜’라는 추가 옵션도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그래서 나도 구하고, 너도 구하고, 모두 다 구할 수만 있다면. 특별한 능력 한 개도 없고, 그닥 지혜롭지도 못한 난 생각해본다. 판타지(fantasy) 아닌 하드코어(hard-core) 장르의 세상을 우린 용케도 잘 살고 있다, 오늘도. 초인적인 힘을 발휘하여.
김연우 <조선대 국문과 2년, 청년인문학 소피움 연구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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