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민이 갖춰야 할 공감 능력을 고민하며

▲ 세월호 진실규명을 외치며 시작한 세월호 천일순례가 지난 8월11일 1000일을 맞았다. 사진은 시계방향으로 봄, 여름, 가을, 겨울 시민상주들의 순례 장면.
 “저는 인연 코너를 통해, 지난 촛불로부터 길어올 수 있는 시민교육의 요소들을 저 나름의 생각으로 정리하고 있습니다. 그간의 생각들을 매듭짓는 마지막 주제로 공감, 또는 공감 교육에 대해 고민해볼까 합니다. 여기서 ‘공감’이란 단순히 함께 느끼는 것을 넘어서 타인의 입장에 서 보고, 타인의 고통에 함께 아파하는 마음의 능력, 더 나아가 그 고통의 사회적 원인에 대해 함께 분노하는 힘을 말합니다. 결론적으로 말하면, 이러한 타인과 세계에 대한 공감 능력은 민주사회의 시민이 갖추어야 할 수많은 역량들을 굳건히 떠받치고 있는 주춧돌이라고 생각합니다. 이는 어쩌면 당연한 이야기입니다. 타인, 즉 다른 사람의 입장에 서본다는 것은 다름에 대한 인정과 포용, 다름과 공존하겠다는 태도를 전제합니다. 교실에서의 토론 장면을 떠올려볼까요? 자신의 생각을 끝까지 관철시키려는 목소리를 높이는 학생이 가득한 교실과 자신의 생각을 넓히기 위해 여러 의견들에 두루두루 경청을 하는 학생들이 가득한 교실. 여러분들이라면 어떤 교실에서 토론하고 싶습니까? 잘 들으려는 사람이 많으면, 서로의 입장에 서보려고 하는 사람이 굳이 말을 유려하게 하지 않아도 됩니다. 설득력을 높이기 위해 논리적 무장을 하지 않아도 됩니다. 탁월한 말, 힘 있는 말만 주목받지 않고, 어떤 말이든 존중받으며 자신을 드러낼 수 있습니다. 민주주의가 제대로 구현되는 순간이겠습니다. 이러한 공감 능력을 배우고 익히는 데에 도움이 되는 프로그램들도 이미 많이 있습니다. 우리 현실에 맞게 적용할 수 있겠지요. 잠깐 소개를 드리자면, 아기를 교실에 초대해서 아기의 성장, 가족과의 관계, 소통의 과정을 면밀하게 관찰하고 또 함께 하는 법을 배우는 ‘공감의 뿌리’. 어떤 문제가 있을 때, 가해자와 피해자의 이분법을 넘어서, 모두의 회복을 추구하는 ‘회복적 서클’ 또래 친구들끼리 공동체 내의 문제와 갈등을 조율하고 해법을 찾는 ‘또래중조프로그램’ 등 다양한 활동들이 있습니다. 이런 활동 속에서 공감의 능력을 배우고 익힌다면, 시민교육은 더욱 풍성해질 것입니다.”
 
▶세월호 참사 속 되새겨본 공감
 
 이런 내용으로 공감 교육에 대해서 글을 썼지만, 어제 밤에 결국 다 갈아엎었습니다. 글을 다시 읽어보니, 마른 행주 쥐어짜듯, 저의 생각은 온데간데없고, 모두가 하는, 그래서 딱히 하나마나한 말들이 지면을 가득 채우고 있는 것으로 보였기 때문입니다. 문제는, 사회적 고통에 대해 ‘정말 공감해본 적 있는가?’ ‘나는 나의 생각이라는 울타리를 넘어설 수 있는가?’ ‘공감이란 정말 가능할까?’ ‘사회적 문제에 관심을 갖는 것은 내가 공감하기 때문이 아니라, 단지 머리로 인지하고 있기 때문이 아닐까?’ 등의 걸림돌이 마음 한 켠에 무겁게 자리 잡고 있었습니다.

 개인적인 경험을 이야기해볼게요. 저는 3년 전 세월호 참사 이후, 수개월간 매주 토요일에 진행하는 ‘기다림의 버스’를 타고 팽목항에 찾아갔던 적이 있습니다. 텅 빈 체육관에 미수습자 가족들이 남아 있습니다. 절망의 공간입니다. 그곳에 두어 시간 유가족들과 마주 앉아 있다가 광주로 돌아오곤 했습니다. 그 버스에 수차례 올랐으면서도 저는 정작 유가족들에게 위로의 말 한 마디도 전하지 못했습니다. 그들의 절망의 깊이를 저는 알 수 없었기 때문입니다. 그 절망 앞에서 저는 무력함을 느낄 뿐이었습니다. 그 절망이 너무 깊어 보여서 뛰어들 엄두를 못 내고, 그저 뛰어들 용기가 없는 저 자신을 매번 확인하고 돌아올 뿐이었습니다.

 제가 한 일은 무엇인가요? 가방에 노란 리본을 달고, 그 뒤에 시민상주모임에서 한 번씩 참여해서 노란길을 걸어도, 저는 무기력함을 떨쳐낼 수 없었습니다. 정말 타인의 고통에 공감할 수 있을까요? 제 개인적으로 안 되는 것일까요? 아니면, 원래 이렇게 어려운 일일까요? 또는 이렇게 헤아릴 수 없는 고통 앞에서 어찌할 바를 모르는 것, 무력함을 느끼는 것 또한 공감의 과정이 아닐까? 그리하여 ‘함께 느끼려는 능력이 공감 능력이 아닐까?’, ‘그 과정에서 기존에 자신의 것이 아닌 어떤 감정이나 생각을 겪었다면, 그것을 두고 공감했다고 할 수 있지 않을까?’ 라고 되묻고 또 그렇게 합리화 해보기도 합니다. 아직 뚜렷한 답은 없습니다.
 
▶공감하고 실천, 어떻게 가능할까?
 
 도대체 공감이란 무엇이며, 어떻게 할 수 있을까요? 또는 그런 능력은 어떻게 길러질 수 있을까요? 공감에서 중요한 요소들은 무엇이고, 그것들은 시민교육에서 어떤 의미가 있을까요? 애초에 이 글을 통해 정리하려고 했던 물음들을 다시금 여러분들과 함께 묻고 싶습니다.

 그리고 이 물음에 대한 아이디어를 구하기 위해 ‘세월호 광주시민모임’ 활동을 했던 분들에게 이렇게 물어보고 싶습니다. ‘여러분들은 3년이 넘는 시간 동안 어떻게 그렇게 매주 세월호를 기억하기 위해 몸부림 칠 수 있었나요? 어떻게 그 아픔에 공감하고 그렇게 실천할 수 있었습니까?’ 라고 말이죠. 이 분들의 대답으로부터 시민교육-공감교육의 실질적인 아이디어들을 채울 수 있지 않을까 조심스레 기대해봅니다.
추교준
 
 추교준님은 인문학이 잘 팔리는 시대에 어떻게 하면 근본적이고 급진적인 인문학이 가능할지 고민하는 사람입니다. 대학원에서 철학을 공부하고 있으며 대안학교에서 학생들을 만나고 있습니다. 한 번씩 시민단체 활동가들 어깨너머로 인권을 함께 고민하기도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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