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읍 농소동 상흑마을 분수 모정

▲ 정읍 농소동 상흑마을 모정. 복분자밭에 쓰는 긴 물호스를 모정 주변 바닥에 설치해 분수처럼 물줄기를 뿜어내는 ‘생활의 지혜’를 발휘했다.
 지난 7월22일 중복날은 정읍 농소동(흑암동) 상흑마을의 ‘워터파크’ 개장일이었다.

 “물가상에 앙거 있는 것 맹기여.”

 “뺑뺑 돌아서 물을 핑핑 핑긴게 보기만 해도 시원혀.”

 소박하지만 어엿한 분수에 둘러싸인 상흑마을 모정.
 
복분자밭 물호스로 만든 분수

 수십 갈래 물줄기가 공중으로 솟구치며 물방울을 흩뿌린다. 쨍쨍한 여름 한낮에 이런 호사가 없다.

 복분자밭에 쓰는 긴 물호스를 모정 주변 바닥에 설치하고 인근의 지하수 물을 끌어와서 뿜어내는 분수.

 “대지의 중력을 거슬러… 물의 운명에 거역하여 하늘을 향해서 주먹질을 하듯이 솟구친다…가장 물답지 않은 물.”

 이어령은 분수를 그렇게 묘사했다. 가장 물답지 않은 물에 환호하는 데는 애 어른이 따로 없다.

 워터파크가 별것이더냐. 작년에 상흑마을 통장 강현주씨가 꾀를 내 제안한 묘수 덕분에 모정 앞 분수는 명물이됐다. 시설비도 없고 유지비도 들지 않는다. 공공건축가라는 직함은 없지만 거기 사는 사람들의 일상을 가까이서 들여다보고 모든 이를 위한 놀이마당 ‘핫플레이스’를 창조해낸 사람이다.

 <물 한 주먹 덥벅 쥐어 양치질도 퀄퀄 허고, 물 한 주먹 덥벅 쥐어 가슴도 훨훨 씻어보면, 에! 시원허고 상쾌허다. 삼각산 올라선들 이에 더 시원허며, 동해수를 다 마신들 이에서 더 시원허리. 얼씨구절씨구 지화자 좋네, 툼벙툼벙 장히 좋네>

 판소리 ‘심청가’ 중 ‘심학규 황성 가는 대목’이다. 염천에 길을 가다 시원한 물줄기를 만났으니 “에! 시원허고 장히 좋네” 탄성이 절로 나왔을 터.
 
찌그럭짜그럭 다툼 없이 지어낸 공공건축

 “분수가 물을 뿜어댄게 뜨거운 바닥도 식고, 물바람 날린게 기분학상으로도 시원하고 실제로도 시원하고.”

 노인회장 고광호(71)씨의 자랑이다.

 근처 공사현장에서 일하는 이들도 점심시간에 잠시 낮잠을 청하러 상흑마을 모정을 종종 찾는다.

 “뭐이 성가셔. 좋제. 우리 동네가 나쁘문 오겄어?”

 박창호(79) 할아버지의 넉넉한 말씀.

 “우리 마을 사람들이 머리도 좋고 부지런하고 우멍허들 않고 진실혀. 단합도 잘 되고 인심도 좋고.”

 모정도 온 동네 사람들이 합심해 지었노라고 그 내력 찬찬히 들려주신다.

 “농사 열심히 진다고 어느 해에 나라에서 주는 다수확상을 탔는디 그 상금을 동네다 희사를 해서 지은 것이여. 그때 여럿이 탔어. 근디 내가 그 사람들한테 말했지. 니야내야 할 것 없이 그 돈을 전부 희사해서 모정을 짓자고. 한(하나) 앞에 그 돈이 10만원썩이었어. 그때는 큰 돈이여.”

 욕심없이 돈을 내놨는데도 돈이 모자라서 집집마다 돌아다니며 굿을 쳤다.

 “있는 사람은 쌀 한 가마니썩 내놓고이 동네서 젤로 없는 사람도 쌀 서 말썩 내고. 젤로 가난한 사람이 쌀 서 말을 척 내논게 다른 사람들도 그 밑으로는 못 내놓지. 웬만한 사람은 닷 말 이상을 냈어. 그래갖고 지섰지.”

 1975년에 지은 모정. 박창호 할아버지는 어제 일인 양 소상하게 모정의 탄생기를 그려낸다.

 “서끌(서까래) 할 나무가 없었어. 야찬 산에는 없고 저어 높은 뽕아리(봉우리) 같은 데 가야 있응게 마을 사람들이지게 지고 먼 길 걸어가서 욈겨 왔제. 그때는 나무 비어서 가져오다 들키문 산림계에 벌금 물고 그런 시상이여. 근게 해질 때 비어갖고 와서 저녁에 깎거갖고 지푸락 같은 것으로 살짝 덮어놔. 사실은 불법이지. 그래도 어짤 수가 없었어. 산림계에서도 동네 모정을 지을라고 한나씩 져다 놨다고 사정 이야기를 하문 저도 사람인게 입을 딱 오므리고 돌아가고 그랬어.”

 그렇게 온 동네 사람들이 마음을 내고 몸공을 들여 지어낸 모정이다. 짓는 과정도 티끌없이 투명하고, 짓는 과정을 모두 공유할 수밖에.

 “찌그럭짜그럭이 없이 지었어. 어떤 놈이 묵는가 어떤 놈이 나쁜 짓 헌가 그런 거 따질 필요도 없이. 관청이나 이런 데 도움 없이 부락민들의 힘으로 지슨게, 다 울력해서 지슨게.”

 그래서 오랜 세월 누구나 알뜰하니 살뜰하니 건사해 온 마을의 공유재산. 수시로 십시일반이 행해지는 곳이기도 하다. 모정 한가운데 자리한 텔레비전도 동네 임성자(75) 반장이 얼마 전 내놓은 것.

 “아들이 나 보라고 50인치를 집에 갖다 놨는디 너무 커. 나는 혼차 산께 함께 볼라고 내놨어. 안 아까와. 여러 사람이 같이 본께 좋제. 다 댕개도 우리 모정같이 테레비 큰 디 없다고 그래. 야가 나오기한자(조차) 잘 나와. 통장이 거그다 이름을 써붙일란다 허글래 마다 그랬어. 내 맴으로 허고자와서 헌 일인디 뭐 떠들어.”
 
“나무 존 냄새도 맡고 사람 존 애기도 듣고”

 이곳은 테레비도 없고 좁장한 모정이지만 웃음꽃은 한가지로 핀다.
 “사뭇 뜨걸 직에는 많이들 나오신게 빠짝빠짝 앉제. 글도 집에서 선풍기 틀고 있느니 여그 나와서 웃지. 나무 존 냄새도 맡고 사람 존 애기도 듣고.”

 남자 모정과 내외하듯 거리를 두고 앉은 상흑마을 여자모정.

 “남자 모정은 옛날부터 있던 것이여. 여자 모정은 인자 10년 넘어. 지둥이 나무가 아녀, 쐬로 맨들았어. 비 맞아도 썩지 마라고. 끄져오니라고 얼매나 힘들었제.”

 비에도 바람에도 걱정 없이 든든한 모정이 들어서기 전에 여자들은 나무 아래 쎄멘바닥에 둘레둘레 앉아 노는 것이 고작이었다.

 “맨바닥 우로 헌 방자리(장판) 한나 내와서 깔문 아따 고실고실 좋다고 다독다독 만쳐 보고 그리 살았어. 옛날 어매들은 뜨걸 때 뜨거운 중도 모르고 살고, 출 때 춘 중도 모르고 살아. 아무리 뜨겁다손 쉴 참도 없어. 여름에는 보리방애 찧어서 널었다가 빼깨서 삶아서 확독에다 갈아서 보릿대로 불때갖고 밥해묵고 시한에는 연기 퐁퐁 나는 쌩솔개비 져다 불때서 밥해묵고.”

 째깐헌 오두막집 방 한 칸에서 집집이 그 많은 애기들을 다 키우고 여름을 살아냈다.

 “포리도 손님 오신 줄 알고 어디로 가불었네. 손님 대접헌다고.”

 물을 좀 덜 담은 페트병을 물베개 삼아 누운 김정순(75) 할매가 내어놓는 귀빈 환영사가 그러하다.

 “아직에 논두럭 풀 쪼깨 뜯고 시치고 밥 조깨 떠묵고 나왔어.”

 모정에 나오기 전 할매들의 오전 일정은 거개 그러하다.

 찌그러진 양푼에 옥수수가 세 개 남았는데 할매들은 그걸 다 집어서 객의 손에 일일이 들려주어야 직성이 풀린다.

 “아까 지비들 오기 전에 묵어 불었네. 안 글문 큰 놈 두 개씩은 줄 것인디.”

 그것이 밤에 누워 생각해도 짠할 것 같다는 말에 “대차 그러겄그만” 화답이 이어지는 어매들의 모정. 염천에 열불을 끄는 것은 청량하기 이를 데 없는 사람의 마음임을.
글=남인희·남신희 ‘전라도닷컴’ 기자/사진=박갑철 ‘전라도닷컴’ 기자

※이 원고는 월간 ‘전라도닷컴’(062-654-9085)에도 게재됐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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