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소녀가 자전거를 타면 새로운 우주가 창조된다
전능하지 못한 신이 세상을 바꾸는 방법

▲ 영화 ‘와즈다’는 자전거를 타고 싶은 한 소녀가 마침내 자전거를 타고 달릴 수 있게 되는 이야기다.
 초등학교 때 반마다 리틀 전도사들이 바글바글 했다. “친구랑 같이 오면 달란트 몇 장씩 더 줄게, 많이들 데려와라.” 온 동네 교회 목사님들이 예배할 때 이런 말이라도 하나보다 생각했다. 아무튼 다들 전도에 열심이었는데, 내 친구도 그랬다. 어느 일요일 친구를 따라간 교회 건물은 크고 웅장했다. 꼭대기엔 금장 십자가가 번쩍거렸다.

 지루한 예배가 끝나자 영화를 틀어 줬다. 우리는 공짜로 나누어준 과자를 까먹으며 영화를 봤다. 예수님이 흠씬 두들겨 맞아 온 몸이 시퍼렇게 멍들었다. 강제로 가시관을 씌우자 얼굴에 핏줄기가 흘러내렸다. 십자가에 못이 박혀 피와 살점이 튀겼다. 그때부터 속이 메슥거리고 식은땀이 났다. 난 얼굴이 파랗게 질려서 영화가 빨리 끝나기만을 기다렸다.

 집에 돌아와서야 엄마를 붙잡고 울음을 터뜨렸다. 징그럽기도 징그러웠지만, 무엇보다 분하고 억울했던 것이다. “나한테 원죄란 게 있대. 예수라는 사람이 내 죄를 대신 뒤집어쓰고 죽었대, 십자가에 못 박혀서. 엄마, 난 죄 없는데? 있다고 해도 지가 뭔데 맘대로 내 죄를 뒤집어쓰고 난리야? 너무 짜증나….”

 착한 아이였던 난 너무 화가 났다. 나쁜 짓 같은 건 절대로 하고 싶지 않았다. 사람 모두가 날 때부터 죄를 달고 태어난다고? 무슨 헛소리야, 내 뜻대로 이 세상에 온 것도 아닌데. 아무리 생각해도 엉터리 죄목이었고, 피 칠갑 십자가는 협박으로밖에 보이지 않았다. 며칠 동안 귓가에 이상한 목소리가 들렸다. “니가 그 남자를 죽인거야. 넌 벌 받아야 해. 일요일마다 교회에 나와서 잘못을 뉘우치렴. 그럼 하나님이 널 용서해 주실 거야.” 근데 갑자기 왜 이 얘기를 하고 있냐.
 
▲종교에 대한, 답없는 단상
 
 저번 학기에 세계 종교의 역사를 다루는 수업을 들었다. 학기동안 딱 한 번의 과제가 있었는데, 에세이 한 편을 써 내는 것이었다. 대충 이런 주제였다. 각자 자신이 생각하는 이상적인 종교의 모습을 제시하라. 종교란 무엇이라고 생각하는지, 앞으로의 종교는 어떤 방향으로 나아가야 한다고 생각하는지.

 ‘종교란 넓고도 맑은 샘물이어야 한다.’ 내 글의 요지는 이랬다. 중세시대에 집시와 이교도들은 성당에 들어가지 못했고, 인도의 힌두교에서는 브라만만이 구원받고…. 몇 가지 예를 들어가며 그럭저럭 세 페이지 넘는 글을 썼다. 그러니까 차별하지 말고 누구든 안으로 들이자! 돌려받은 과제물에 적힌 교수님의 코멘트는 이랬다. “글쎄, 그렇게 해서 우리가 도달하려는 곳은 대체 어디일까?”

 별로 좋은 점수를 받지 못할 운명의 과제물을 다시 뒤적여 보는데 갑자기 어렸을 때 저 사건이 떠오른 것이다. 영혼 없는 글을 쓰게 된 이유는 사실 여기에 있다. 난 종교가 싫다. 보다시피 첫 만남부터 최악이었고, 살아온 골목마다 십자가는 구원이 아니라 태클이었다. 돌이켜보면 이런 일도 있었다.

 막내 고모 결혼할 때다. 고모 부부는 결혼식 날짜를 일요일로 정했다. 다들 평일엔 일이 바쁘고 일요일에 쉬니까. 그런데 할머니가 다니는 교회 목사님이 갑자기 날짜를 바꾸라는 거다. “주일에는 교회에 나와서 예배를 드려야죠. 그리고 도시 나가면 마귀들에 홀립니다.” 할머니의 성화에 결국 막내고모는 일요일 말고 다른 날 결혼식을 올렸다. 그때 깎아먹은 부주는 예수님이 따로 갚아 주시나? 도시에는 마귀 같은 거 없던데요, 피곤에 찌든 샐러리맨들이나 가득할 뿐.

 그래 맞다. 울타리 안으로 모두 다 받아들인다 치자. 과연 그들에게 무엇을 줄 수 있냔 말이다. 구원? 행복? 그거 다 거짓말이잖아. 인생에 만병통치약이 어디 있어 대체. 게다가 불합리하고 부조리한 것들은 또 왜 이리 많은지. 답 없는 인생을 살면서 그나마 일찍 내린 결론은 난 종교를 믿지 못하는 부류의 인간이라는 것이다. 그래선지 사는 게 녹록치 않다.
 
▲“상금 타면 자전거 살 거예요”
 
 와즈다는 자전거를 타고 싶어 하는 소녀가 마침내 자전거를 타게 되는 이야기다. 사우디아라비아 최초의 영화라고 한다. 게다가 아랍권 최초 여성 감독의 영화다. 작품이 유명한 이유는 특별한 성과 때문이다. 이 영화로 인해 사우디아라비아에서 여성이 자전거를 탈 수 있게 되었다고 한다. 고작 영화 한 편이 이토록 위대한 결과를 이끌어 내다니. 대체 어떻게 가능했지? 호기심이 솟았다.

 와즈다는 자전거가 타고 싶다. 하지만 여자는 자전거를 탈 수 없다. 엄마도, 선생님도 모두 안 된다는 말 뿐이다. 와즈다는 친구 압둘라가 자전거를 타고 등교하는 것을 부러운 눈길로 바라만 본다. 와즈다는 엄마에게 묻는다. “왜 여자는 타면 안 돼?” 엄마는 대답한다. “자전거 타면 나중에 아이 못 가져.”

 와즈다의 엄마는 아들을 낳지 못했다. 아빠의 집에서는 두 번째 장가를 들라고 난리다. 엄마는 아빠의 마음을 잡아두려 애를 쓴다. 그러나저러나 와즈다의 관심사는 오직 자전거다. 압둘라가 자기 자전거를 빌려준다. 둘은 옥상에서 몰래 자전거를 타는 연습을 한다. 와즈다는 또 엄마 몰래 돈을 모으기 시작한다. 스포츠 경기 응원 팔찌를 만들어 팔고, 록 음악 테이프들도 팔았지만 어림도 없다. 와즈다는 코란 암송 대회에서 일등을 해서 상금을 받아내기로 결심한다.

 매일 코란 구절을 열심히 외운 끝에 와즈다는 드디어 암송 대회에서 1등을 차지한다. 와즈다는 무대 위에서 기쁜 얼굴로 말한다. “상금을 타면 자전거를 살 거예요. 이미 탈 줄 알아요.” 결국 상금은 팔레스타인에 기부된다. 아빠는 그날 두 번째 장가를 들고, 엄마는 잘 보이려고 빨간 드레스를 사려던 돈으로 와즈다에게 자전거를 선물한다. 엄마는 와즈다를 꼭 껴안으며 이렇게 말한다. “세상에서 니가 제일 행복했으면 해.”

 영화를 보기 전에는 코란에 여자들 자전거 타지 말라고 적혀 있기라도 한 줄 알았다. 아니면 법에 그런 조항이라도 있다던가. 당연히 그런 거 없다. 그럼 정말로 자전거 타면 아이 못 가진다는 말을 믿는 단 말이야? 영화를 보다 보면 알 만 하다. 까르르 웃고 떠들며 등교하는 여학생들을 혼내면서 선생님은 이렇게 말한다. “여자의 목소리는 벗은 몸과 같아.” 이렇게나 막힌 사회에서 가능할 리가 없다.
 
▲창조는 작은 것에서부터 시작되고
 
 실제로 사우디에서 어떤 방식으로 여성이 자전거를 타는 것이 가능해졌는지 궁금했다. 영화를 본 후 검색해봤지만 자세한 것은 알 수 없었다. 아마도 사회 구성원들 인식에 변화가 있지 않았을까 추측해본다. 그 어디에도 적혀있지 않은 단지 불문율. ‘여자는 자전거 같은 거 타는 거 아니다.’ 아마도 영화를 본 여성들이 용기를 내어 하나둘씩 자전거를 타고 나와 보지 않았을까? 그랬더니 천지가 개벽하지도, 처녀막이 어떻게 되지도, 세상이 망하지도 않았다. 단지 몇몇 사람들의 눈총을 받았을 뿐.

 이상적인 종교의 모습은 대체 어떤 걸까? 난 종교가 어떻기를 바라지? 다시 한 번 생각해본다. 일단, 서로를 침범하지 않고 존중하는 태도가 필요하다. 또, 이로운 교리만을 채택하고 낡은 것은 버릴 줄 알아야 한다. 그리고 모든 것은 사랑으로 이루어 낸다. 맹목적인 믿음을 강요하지도 말고 생색을 내어서도 안 되고….

 생각의 꼬리를 물수록 꿈같은 소리다. 말도 안 돼. 유토피아가 있다고 해도 종교가 저렇진 않을 거다. 아예 없으면 없었지. 아, 그렇군! 언젠가 우리는 종교가 더 이상 필요하지 않게 되지 않을까? 모두가 이상적인 인간이 된다면 종교는 무의미하니까. 온 인류가 신이 되고 성인군자가 된다면 말이다. 존 레논도 노래했지 않은가. 상상 해봐요, 천국도 지옥도 없는 세상을….

 드레스를 사려던 돈으로 딸에게 자전거를 선물한 와즈다의 엄마. 와즈다가 찜한 초록색 자전거를 팔지 않고 기다려준 가게 아저씨. 남몰래 자기 자전거를 빌려주고 타는 방법을 가르쳐주던 압둘라. 이들이 모두 신처럼 느껴진다. 신은 불가능한 것을 가능하게 하지 않나! 그것이 빵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로 오천 명을 배불리 먹이는 일이 아니라, 한 소녀가 자전거를 타게 하는 일일 지라도.

 불가능한 일은 가능해지기 전까지는 그 세계의 위법이다. 그러니까 신은 가끔 나쁜 짓도 할 줄 알아야 한다. 신은 낡은 세계를 부수고 새로운 세계를 창조해낸다. 우리의 힘이 비록 전지전능하진 못하지만, 있는 힘껏 벽을 때려서 견고한 질서에 균열이 생기게 할 순 있다. 언제나 작은 것에서부터 창조가 시작되고, 그 힘의 원천은 물론 사랑이다. 소중한 이를 위해 힘을 낸다면, 아마도 그때 온 우주가 도와주지 않을까. 어라? 이거 정말 종교 같잖아.

 아! 그렇다면 우린 서로에게 신이 되고 성인군자가 되어야 하는 구나. 자전거를 타고 싶은데 그럴 수 없는 아이에게 신은 어떤 말을 할까? 그다지 전지전능하지 못한 신은 말이다. “너의 죄를 내가 뒤집어 써줄게. 잘못이 있으면 같이 나누자. 이제 우린 공범이야. 자전거를 사줄게. 자, 마음껏 달리렴.” 이렇게 말하겠지. 단, 보조바퀴를 단다든지 하는 생색은 치워두고.
김연우 <조선대 국문과 2년, 청년인문학 소피움 연구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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