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약자 혐오’ ‘자신 비하’ 말고 다른 재미는 없을까?

▲ 광주의 한 팬시점에 진열된 노트들은 청년들의 자조적 현상을 표현한 말들을 디자인으로 사용했다.
 두어 달 전에, 광주드림에서 기사 하나(‘청춘들의 ‘절망’ 파는 학용품 ‘마케팅’’, 17년 9월 1일 기사)를 봤습니다. 기사 속 사진에는 표지에 “오늘도 영혼탈곡”, “건들면 물어요”, “이번 생은 망했어요”등의 글자가 적혀있는 노트들이 나열되어 있었습니다. 아니나 다를까 이 노트를 만든 특정 문구 브랜드는 예전에도 외모와 성별, 학력 차별을 조장하는 디자인으로 지역의 시민사회들의 비판을 받았던 것이 있는 곳이었습니다. 그런데 그때는 문제가 선명해보였고, 그에 따라 시민단체에서 인권위에 진정서를 넣음으로써, 문제제기를 적극적으로 했었습니다만, 이번에는 (저 개인적으로는) 뭔가 문제인 듯한데, 구체적으로 무엇이 문제인지 잘 보이지 않았습니다.

 이 기사를 보면서 섣불리 문제를 규정하기 어렵더군요. ‘현실의 고통과 모순에 저항해야지 왜 무기력하게 소비하는가, 저런 자조적인 표현을 여과없이 받아들이는 것 자체가 문제야!’라고 생각하다가는 자칫 ‘꼰대스러운’ 생각으로 치우칠 수 있겠다 싶었습니다. 반면, 저런 표현을 쓰면서 요즘 말로 ‘웃픈(웃기면서도 슬픈) 디자인이네!’라고 생각하며 웃어넘기기에는 그 뒤에 깔려있는 자조와 냉소, 무력함이 하루 종일 머릿속을 떠나지 않았습니다.
 
▲‘청춘의 절망 파는 학용품 마케팅’ 기사를 보고

 사실 우리의 현실이 그렇잖나요? ‘이생망’이라는 말이 전혀 과장된 말이 아니죠. 이 글을 쓰고 있는 11월 6일, 저녁 뉴스 (JTBC 뉴스룸)에, 취업을 하기 전부터 직업병을 얻는, 쉴 새 없이 알바 뛰는 청년들의 고통스런 상황을 뉴스로 내보내더군요. 불확실한 미래를 견뎌내기 위해 오늘을 저당 잡혀 살지만, 결국 그 미래에 가닿기도 전에 나가 떨어져 버리는 우리의 모습입니다. 이런 현실에 대해서는 아무 말도 안하면서, 그저 저 노트의 글귀를 가지고 남의 일 이야기하듯 왈가왈부하는 것도 뭔가 비겁하다는 생각을 하기도 했습니다.

 그렇게 기사를 보면서 심란하고 혼란스런 마음을 가지던 그 때, 문득 다른 점에 눈길이 가기 시작했습니다. 예전에 문제제기를 받았던 혐오 표현이나 이번 기사에 나온 냉소적, 자조적인 표현들이 모두 하나의 공통점을 지니고 있는 듯 보였지요. 적어도 이 디자인들을 생산하고 또 소비하는 사람들은 이런 문제적인 표현들을 두고 ‘재미있다’고 여긴다는 점입니다. 혹시나 해서 이 문구 브랜드의 홈페이지를 찾아 들어가 보니, 아니나 다를까, 브랜드를 소개하는 문구가 다음과 같았습니다. “재미있는 콘텐츠의 대표 브랜드” 어떤 문제적인 상황을 ‘재미있는’ 상황으로 여기는 현상이, 저에게는 이 노트 표지의 아래에 깔려있는 진짜 문제로 보였습니다. 더 나아가 이런 현상은 단지 이 브랜드뿐만 아니라 사회적인 현상으로 봐야 한다는 생각으로 이어졌고요.

 ‘뽀로로’, ‘아는 형님’, ‘남남북녀’, ‘러브인아시아’, ‘웃찾사’ 등 정규 방송들뿐만 아니라, 요즘 청소년들이 즐겨본다는 유튜브의 특정 BJ동영상들은 사회적 약자를 혐오하는 표현들이 공공연히, 끝없이 자극적으로 쏟아져 나오고 있습니다. 심지어 자기 자신에 대해서도 ‘나 급식충임!’이라고 거침없이 희화화한다고 하더라고요. 이렇게 전국의 교실 곳곳에 이런 자기와 타인에 대한 혐오 표현들이 장난에서 장난으로, 놀이에서 놀이로 널리 펴져 나가고 있습니다. (경향신문, ‘왜곡·편견의 목소리 대중매체·온라인서 무차별 증식·확산돼’, 17년 10월 8일 기사)

 여기까지 읽으신 분들 중에서는 ‘재미’라는 것이 어디까지나 개인의 취향인데, 이를 사회적인 차원에서 문제 삼는 것은 자칫 개인의 자유를 침해하는 ‘월권’라고 생각할 수도 있겠습니다. 과연 그럴까요? 재미를 누리는 것이 개개인마다 다르다고 할지라도 문화권마다 유머코드가 조금씩 다른 것은 결국 재미도 사회적으로 구성되는 측면이 있다는 것을 반증합니다. 더 나아가 사람들이 재미를 느끼는 요소나 방식이야말로 그 사회가 어떤 사회인지를 드러내준다고 할 수 있습니다. 저 문구 디자인들을 보면서 재미를 느끼는 것이 온전히 개인의 취향이었다면 문구회사에서 대중들을 대상으로 저런 상품으로 내놓지 않았겠죠. (그리고 이런 질문을 던질 때만이 사회적으로 학습된 재미가 아니라 개인으로서의 고유한 재미를 찾을 수 있는 가능성이 더 커진다고 생각합니다.)
 
▲“결국 재미도 사회적으로 구성된다”

 제가 여기서 재미나 웃음의 본질에 대해 ‘원래 어떠해야 하는 것’이라고 훈계할 능력도, 마음도 없습니다. 앞서 혐오와 비하를 ‘재미’있다고 여기는 사회적인 현상 앞에서 ‘우리는 오늘날 무엇을 재미있다고 여기고 있으며, 우리는 무엇을 재미있는 것으로 여기면 안 되는가?’ 라는 질문을 던질 필요가 있다는 말씀을 드리고 싶은 것입니다. 더 나아가, 다음의 물음들을 함께 고민해주시길 요청 드리는 것입니다. ‘청(소)년들이 소비하는 일상의 재미는 어떤 것들이 있나요?’, ‘소비하는 재미와 누리는 재미는 어떤 공통점과 차이점이 있을까요?’, ‘오늘날 약자를 혐오거나 자신을 비하하는 것 말고 다른 종류의 재미는 없을까요?’, ‘청(소)년들이 미래를 불안으로 가득 채우고 현실에 눈을 감은 채, 약자 혐오와 자기 비하를 소비하면서라도 일상을 겨우 버티고 있는 상황에서 질적으로 다른 종류의 재미를 누리기 위해서는 누가, 무엇을, 어디서부터, 어떻게 해야 할까요?’ 청년들이, 청소년들이, 교사들이, 학부모들이, 더 나아가 관련되어 있는 모든 관련 당사자들이 힘을 모아 이런 질문들에 대해 구체적으로 답을 찾기 시작할 때 그 결과가, (곧바로 청소년 및 청년 문제의 해결로 이어지지는 않더라도 최소한!) 저 노트의 디자인을 보면서 웃는 사람들이 줄어들 게 만들 것이라 생각합니다.  추교준
 
추교준님은 인문학이 잘 팔리는 시대에 어떻게 하면 근본적이고 급진적인 인문학이 가능할지 고민하는 사람입니다. 대학원에서 철학을 공부하고 있으며 대안학교에서 학생들을 만나고 있습니다. 한 번씩 시민단체 활동가들 어깨너머로 인권을 함께 고민하기도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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