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신의 날개

▲ 앙리 마티스의 ‘흘러내리는 머리카락’.
아무도 그에게 수심(水深)을 일러 준 일이 없기에
흰 나비는 도모지 바다가 무섭지 않다.

청(靑)무우밭인가 해서 내려갔다가는
어린 날개가 물결에 절어서
공주(公主)처럼 지쳐서 돌아온다.

삼월(三月)달 바다가 꽃이 피지 않아서 서글픈
나비 허리에 새파란 초생달이 시리다.
- 김기림 ‘바다와 나비’

추락하는 것은 날개가 있다.

11월, 지천으로 뚜욱뚝 은행잎 진다. 걷다가 내려다보면 어느새 낙엽, 발길에 채이고 있다. 뒹구는 모든 것들이 한때, 팔랑팔랑 날았던 잎이다. 하늘 높이 빛을 받았던 것들은 영글어 인간의 바구니로 들어가고, 마지막 남은 감 몇 알 제 무게를 이기지 못하고 가지를 늘여 그림자 땅으로 떨어진다. 잎은, 줄어드는 빛과 다가올 추위를 감당하기위해 나무가 버리는 제 몸의 일부, 아는지 모르는지 은행잎 천진하게 샛노랗 흔드리며 떨어진다. 다들 날고 있다.

영면한 독일시인 잉게보르크 바흐만은 시, ‘놀이는 끝났다’에서 ‘추락하는 것은 날개를 가집니다’고 썼었다. 어떤 욕망도 없었다는 듯 바람 한줌에 뚝뚝 떨어지는 잎을 보며 무성했던 여름을 생각한다.

모든 추락하는 것들은 한때 높이 올랐던 것들, 떨어지는 것은 모두 한번쯤 하늘로 제 날개를 펼쳐 날아보았던 것들. 그러므로 11월, 떨어지는 것들은 위대하다. 추락하는 것은 날개가 있다.

▲한때는 존재했으나 이제는 박제가 돼버린

아이들과 이상의 ‘날개’를 읽었다. “박제가 되어버린 천재를 아시오?”로 시작해 “날개야 다시 돋아라. 날자. 날자. 날자. 한 번만 더 날아 보자꾸나.”로 마무리되는 그의 자서전적 단편은 난해하고 두서없다.

그러나 무릇 두서없음이 우리 의식의 일상적 흐름 아니던가. 그래서 내게 그의 소설은 무엇보다 사실적이며 현실을 대변하는 리얼리즘의 결정체. 소설속의 ‘나’는 박제가 된 천재, 스스로를 좁은 방안에 가두고 남모를 꿈에 골몰한다. 일상적 자아로서의 그는 하는 일 없고 따라서 당연히 재능도 능력도 없으리라 여겨지는 실패한 인생, 무릇 백수건달. 그러나 그는 한때 존재했으나 이제는 굳어서 박제가 되어버린 날개를 살피며 문득, 겨드랑이가 가렵다.

이상, 일제강점기를 살아간 시인이자 소설가, 지식인. 일제강점기에 세계를 인식할 수 있는 예리한 촉수를 가진 이가 선택할 수 있는 현실적 대안은 무엇이었을까. 백범이나 안창호처럼 독립에 몰두하는 길, 혹은 매국의 길.

그러나 섬세한 감수성을 가진 청년 이상의 꿈은 시인이었다. 시대와 불화하는 자아, 현실과 이상의 괴리를 타협하지 못하는 자아는 어디로 가야하는가. 덧붙여 한 가지 더, 가족의 바람과 개인의 바람의 불화. 이상의 가족사는 우울하다.

가난한 아비의 가난을 대물림 받은 어린 이상은 자식이 없던 큰아버지의 양자로 입적되어 두 아버지를 섬기는 분열의 운명을 산다. 남다르게 총명했던 어린 조카를 양육하고 학비를 대는 조건으로 큰 아버지가 요구한 진로는 건축가의 길, 그러나 이상이 꿈꾼 세계는 몽상가로서의 삶. 본래적 자아를 상실한 존재가 가야할 길은 스스로의 날개를 꽁꽁 잡아매고 비척비척 두 발로 걷는 길. ‘인간’으로서의 길이었을 것이다. 그리고 그는 당연한 삶의 귀결로 짧은 생을 마감한다.

▲어떤 시도도 우리의 추락을 막지 못하리

그는 실패했는가, 역으로 그의 실패는 그의 날개를 증명한다. 생의 물리적 물질적 성공만이 성공인 것은 아닐 것이다. 동시대가 인정하는 존경과 흠모가, 재능과 노력 전체를 증명하는 것은 아닐 것이다.

스물여섯 살의 젊은 김해경(이상)은 추락했으나 그의 좌절은 그의 동경과 스스로 결코 꺾지 않았던 재능을 증명하며 몇 편의 시와 소설로 남았다.

그래서 책을 덮으며 우리 모두는, 사회적 인정을 위해 전력투구했던 거짓 날개 대신, 어린 한때 예감했던 진짜 날개의 흔적을 더듬으며 불현듯, 겨드랑이가 가렵다고 느끼는 것이다. 모두에게 있는 이 날개, 그러나 이제는 없는 이 날개. 책을 함께 읽은 아이도 어른도 11월, 바람을 타고 자신의 날개를 찾는다.

그리고 듬성듬성 깃털을 부리로 추스르며, 날자고, 날 것이라고, 바람은 두렵지 않다고, 떨어지는 것은 날개가 있다고 시큰한 눈을 들어 서로를 향해 거울처럼 씨익 웃어 보이는 것이다.

날개는 누구에게나 있다. 날개를 펼쳐 날아보려는 누군가에게 “얘야, 그건 날개가 아니란다.” “그렇게 날지 말고 이렇게 안전하게 걸어보렴.” 부정하는 시대와 사람만 거스를 수 있다면, 어떤 시도도 우리의 추락을 막지 못하리.
박혜진 <지혜의숲 연구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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