순창 유등 큰애기 서옥자는 열일곱 살 되던 해 시월달에 혼인을 해서 첩첩산중 도왕마을(순창 적성면 석산리)로 들어왔다.

 사인교 가매를 남자 너이가 매고 오는디 질이 어치게나 구부구부 꼬불탕허고 쪼부장헌지 가매 안에 든 새각시는 가매 벽을 손으로 발로 버투고 앙거서도 행이나 궁그러질깨비 노심초사하였다.

 가매에서 내린 그 집에서 시방까지 예순일곱 해를 살았다.

 “여가 산중에 산중이라. 멧돼야지가 저 앞에까지 니래(내려)와. 어디를 갔다가 조깨 저물게 오문 막 식식식식 달아나. 나같이 째깐해도 사람이 왔다고 무서와라고 달아나.”

 그런 산것에서 멧돼지 묵고 삐둘기 묵고 나 묵고 자석들 믹이는 그 일을 해마다 멈추지 않았다.

 “나는 농사를 지슨 사람이여. 농사를 지슨 사람은 씨가시(씨앗) 여야(넣어야) 헐 때 씨가시를 여. 거둘 때는 거두고.”

 서옥자에게 ‘안다’는 것은 ‘한다’는 것이었다. 맘에 품은 것은 몸을 늘 쓰고 또 써서 꼭 결실을 맺었다.

 “오늘 시방 아무 일을 해야 헐 때인게 머슬 히야겄다 그 계획만 그날 지캐. 인데까 그렇게 살아나왔어.”

 올 봄에도 어김없이 씨가시를 준비하고 밭에다 씨가시를 넣었다.

 “나는 버르쟁이가 일을 미롸놓들 안혀. 넘 앞으로 다 해불제 넘 뒤로는 안혀.”

 그리하여 햇살 좋은 요며칠 여기저기 벼랑박에 기대놓은 깻단이 톡톡톡톡 잘 말라가고 있으니. 돌아오는 추석에는 자식들 앞에 새로 짠 참지름병을 내놓을 일이 떳떳한 것이다.

 스무 해 전에 영감님이 떠나고 나서 사방이 캄캄막막했을 때도 논으로 밭으로 발걸음을 밀었던 것은 “어매 어매” 부르는 자식들 소리였다.

 “어매라는 자리는 강헐 수배끼 없어. 내가 이길란다 허고 꽉 버투고 이겨내야제. 어매라는 그 자리는 엄살을 허들 못허는 자리여.”
글=남인희·남신희 ‘전라도닷컴’ 기자

사진=박갑철 ‘전라도닷컴’ 기자

※이 원고는 월간 ‘전라도닷컴’(062-654-9085)에도 게재됐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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