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의 작가도 물론 중요하지만 글을 번역한 사람을 믿을 수 있어 책을 선택하게 되는 경우도 있을까? 나에게는 당연히 있다. 일본 작가 오가와 요코의 장편소설 ‘박사가 사랑한 수식’이 그랬고, 이 책 ‘네 개의 그릇’이 그렇다. 한강의 소설 ‘채식주의자’가 맨부커 인터내셔널 상을 받고 세상의 주목을 끌 수 있었던 결정적 이유도 사실은 그 책을 소개한 번역가의 몫이 컸다고 생각한다. ‘박사가 사랑한 수식’의 역자는 김난주 씨인데 일본문학 번역의 1호이자 1인자이다.

 그래서 이런 책들은 원작이 주는 감동을 뛰어 넘는 뭔가가 분명 있을 것이라 믿어 의심치 않는다.

 자 그럼, 이제 그림까지도 꼭 꼼꼼하게 보아야 할 ‘네 개의 그릇’ 속으로 들어가 보자. 그림을 볼 수 없는 독자들을 위해 그림 설명은 글 옆에 나란히 있는 괄호 안에 넣어두겠다.
 
▲사실을 바꿀 순 없어도 생각할 순 있다
 
 책 안에서는 무엇이든지 상상할 수 있어요. 책 안에서는 무엇이든지 쓸모가 있지요. 보통 그릇 네 개도요. (종이를 오려서 만든 네 개의 반원, 이것이 바로 네 개의 그릇이다. 그리고 찬장에 잘 정리된 그릇들) 왜냐하면 이야기 속에서 별안간 비가 쏟아질지도 모르잖아요. (하늘에서 글자 비가 갑자기 내리면 당황한 사람들은 우산이 된 그릇을 뒤집어 쓴다)

 아니면 느닷없이 해가 쨍쨍 빛나면요? 그럴 때 필요할 수도 있어요. (이제 그릇은 사람들 얼굴에 썬그라스가 된다) 갑자기 아주 무거워져서 깜짝 놀랄 수도 있어요. (그릇 두 개를 이어서 바퀴 모양을 만들고 그것을 역기처럼 드는 남자의 그림) 그러다 다음번엔 팔랑팔랑 가벼워질 수도 있어요. (바람개비가 된 그릇, 그런데 아주 자세히 보면 바람의 줄기가 글자이다. 이야기 바람이 부는 것이다. 그럼 아이는 바람개비를 돌리는 바람을 작은 손으로 가린다. 물론 다 가릴 순 없겠지만 말이다) 먼 여행 이야기나 (섬이 된 그릇, 거북이 된 그릇) 한밤중에 일어나는 이야기에도 필요하지요. (잠든 이의 머리 맡에 놓인 시계가 된 그릇, 그리고 달이 된 그릇) 이렇게 평범한 그릇이지만 이상한 나라에서도 다 쓰일 데가 있죠.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가 떠오르는 토끼 그림, 그 옆에 그릇 세 개를 위로 차곡차곡 쌓아 만든 나무) 계산하는 걸 배우는 데 쓸 수도 있고요. 마찬가지로 알파벳이나 다른 것을 배우는 데 쓸 수도 있어요. (대문자 R B P에 들어가 있는 작은 그릇들) 만약 아이들이 해달라고 하면, 아이들이 나오는 재미있는 책을 만들어 봐요. (아이들의 모자가 된 그릇, 그리고 그 아이들이 탄 자동차의 바퀴는 당연히 남은 두 개의 그릇)

 어른들은, 어른들이 나오는 슬픈 이야기를 만들어 달라고 할지도 몰라요. (군인의 전투모가 된 그릇, 탱크 바퀴가 된 그릇, 군인의 얼굴에는 심술이 가득하다) 만약 출판사에서 조금은 재미있고 조금은 슬픈 책을 만들자고 하면요? (웃거나 울고 있는 아이들의 입 모양이 된 네 개의 그릇) 왜냐하면 책 안에서는 어떤 이야기라도 다 할 수 있으니까요. 이렇게 끝없이 상상을 계속할 수도 있어요. (글을 쓰고 있는 듯한 사람의 뒷머리에 있는 그릇, 그리고 그 앞에 놓인 스탠드가 된 그릇)

 그런데 보통 그릇 네 개로 꾸민 이 책은, 무언가 중요한 것이 될 수도 있어요. 어떤 사람은 너무 많이 가지고 있다고 말할 수도 있고, (식탁 위에 놓인 커다란 그릇) 어떤 사람은 너무 적게 가지고 있다고 말할 수도 있어요. (슬픈 눈으로 작은 그릇을 보고 있는 사람)

 이 책과 네 그릇이 그 사실을 바꿀 수는 없다고 해도 곰곰이 생각해 볼 수 있게 만들 수는 있어요. (네 개의 그릇이 피자처럼 잘게 나눠져 접시에 담겨 있다)

 그리고 마지막에 덧붙여진 문장은 ‘이 책의 그림은 도서관에서 오랫동안 아무도 빌려 보지 않는 버리는 책들의 종이를 사용해서 만들었습니다. 종이는 다시 살아났습니다’라는 문장이다.

 이 책은 마지막 문장에서 알 수 있는 재생지의 질감을 살려 만들어졌다. 종이 재질만큼이나 독특한 구성과 그림이 가득 찬 ‘책과 상상력에 대한 책’이다. 이 책을 한 번 보고 나면, 작가의 다른 책도 쉽게 알아볼 수 있을 만큼 독특한 그림책이다. 책 뒷표지에는 네 개의 그릇이 지구로 변해 있다. 반원에 불과했던 것이 무수히 많은 것들로 변화한 것이다. 실로 상상력의 극치라 할 수 있다.
 
▲발가락으로 (상상)할 수 있는 것들
 
 작가 이보나 흐미엘레프스카는 1960년 폴란드에서 태어나 코페르니쿠스 대학 미술학부를 졸업하고 그림책 작가로 활동하고 있다. ‘생각’과 ‘발가락’ 출간을 계기로 한국을 방문하여 우리 문화에 많은 관심을 갖게 되었고, 특히 한글 자모의 간결한 논리성에 매혹되어 ‘생각하는 ㄱㄴㄷ’, ‘생각하는 ABC’ 글자 그림책 작업을 하였다. 뛰어난 감수성과 철학적 깊이가 돋보이는 책들을 여러 권 펴내 독자들의 많은 사랑을 받고 있으며 ‘생각하는 ABC’로 국제 아동도서원화전 황금사과상을, ‘마음의 집’과 ‘눈’으로 볼로냐 라가치 대상을 두 번 수상했다. 개인적으로는 ‘마음의 집’이라는 책도 굉장히 좋았다. ‘발가락’이라는 책은 교과서에 실리면서 유명해졌는데 이 책에선 맨 처음에 발가락 그림이 등장한다. 이후 이 발가락이 펭귄 열 마리도 될 수 있고, 태평양의 섬들도 될 수 있고, 올라갔다 내려갔다 하는 다리가 될 수도 있고 영화관이 될 수도 있다는 것을 보여준다. 발가락 그림을 기본으로 둔 채, 그 그림을 다른 사물 혹은 생물로 변주하는 것이다. 이 책이 작가의 변주기법이 처음 사용된 책이라고 할 수 있겠다.

 작가는 책을 소개하는 곳에서 ‘이 책의 힘으로 사회적 불평등을 없앨 수는 없겠지만 이 책 덕분에 그것에 대해 생각을 할 수 있다’고 했다. 고작 반원 네 개가 이뤄낸 성과에 비하면 인간이 할 수 있는 일은 얼마나 무궁무진한가!

 그리고 내가 믿고 책을 보게 만든 번역가 이지원 씨는 한국외국어대학교 폴란드어과를 졸업하고 폴란드의 대학에서 미술사와 어린이책 일러스트레이션을 공부하고 미술사 박사학위를 받았다. 지금은 학생들을 가르치면서 어린이책 기획과 연구에 힘쓰고 있다. 이지원 씨와 이보나흐미엘레프스카가 역자-작가 관계로 지낸지 13년이 되었다고 하는데 그 둘은 비즈니스 관계를 넘어 좋은 친구로 지내고 있다고 한다. 이 씨 말에 따르면 작가는 지루함과는 거리가 먼 사람이라고 했다. 변화를 시도하는 행위, 그 자체를 즐기며 그 성격이 작품 속에서도 고스란히 드러난다고 했다. ‘생각하는 ㄱㄴㄷ’ 책을 만들 때도 이지원 씨가 한국어를 한 글자씩 써가면서 함께 책 만드는 작업을 진행했다고 한다. 기역으로 시작하는 글자는 고드름, 기차 그런 식으로 설명하면 작가가 그 중 좋은 걸 고르는 식으로 진행했다고 하는데 어쨌든 두 사람의 협업이 우리에겐 좋은 책을 만날 기회를 더 넓힌 셈이다. 또한 이지원 씨의 남다른 그림책 사랑이 더 따뜻한 문장으로 책에 생명력을 더 불어넣었으리라 생각한다.

 ‘네 개의 그릇’에 핵심 키워드는 변주와 상상력, 그리고 이야기이다. 이 세 가지에 가장 능통한 대상은 바로 아이들이다. 이보나 흐미엘레프스카의 책은 너무 철학적이어서 어렵다는 말도 있고, 아이들 보다는 어른들을 위한 책같다는 말을 많이 듣기도 하지만 ‘네 개의 그릇’책은 아이들과 함께 얼마든지 놀면서 볼 수 있는 책이라고 생각한다.

 내 아이와 함께 책처럼 네 개의 반원을 가지고 이것 저것 만들어보는 것이다. 그리고 이야기도 만들고. 이때는 반원을 크게도 만들고 작게도 만들어 다양하게 변주할 수 있으면 좋겠다. 물론 색도 다양하게 선택할 수 있도록 하고, 반원을 작게 잘라도 상관없다. 마음껏 놀다보면 예상하지 못했던 새로운 것들이 탄생할 것이다. 그럼 그것에 박수를 치며 놀라워 하고 칭찬해주자. 우리 아이들의 상상력과 이야기꽃이 만나 놀라운 창작품을 만들어 냈을 때 어른들이 할 일은 감탄임을 명심하자. 조언은 필요없다. 오직 과장된 감탄만 있으면 된다.
 
▲다시 생각하면 보물이 될 수 있는 법
 
 단순함의 아름다움, 상상력의 힘, 네 개의 그릇으로 세상을 이야기하고, 두 개의 지구로 온 마음을 일깨우자는 뒷 표지의 마지막 문장은 그래서 딱 맞는 이 책의 결론이기도 하다. 단순하지만 아름다운 것들, 그리고 그것을 생각해내는 무한한 상상력의 힘, 단지 네 개의 그릇일 뿐인데 세상의 많은 것을 담아내고 이야기 할 수 있다.

 도서관의 버리는 책들로 만든 살아있는 이야기는 또 하나의 메시지를 담고 있는 것이다. 아무 생각없이 쓰레기통으로 던져지는 것도 다시 생각해 보면 보물이 될 수 있는 마법, 이 책은 그런 마법이 아이들의 상상력에서 시작되는 것을 알려주는 듯하다.

 물론 작가 이보나 흐미엘레프스카의 상상력으로 태어난 보물이지만, 아이들은 어쩌면 작가가 생각 못한 것들까지도 생각해낼지 모른다.

 이보나 흐미엘레프스카의 인터뷰 내용 중 인상적인 내용을 소개해본다.

 ‘제 독자들이 누구일지, 나이가 몇 살일지 생각해본 적이 없어요. 저는 제 자신을 위한 책을 만들려고 애쓰고 그 안에서 다양한 진짜 얼굴들을 상상해내려고 해요. 저는 소녀이고 엄마면서 인생 경험이 있는 나이든 사람이에요. 제 자신은 어떤 일에선 성숙하지만 어떤 일에선 성숙하지 못해요. 제가 하고 있는 일에 대해서 확신하지만 가끔은 전혀 자신이 없을 때도 있어요. 저는 제 자신 안에 있는 모든 사람을 위해서 책을 만드는데, 만약 정해진 독자가 있다면 책을 만드는 게 더 힘들 것 같아요. 세상 모든 열 살짜리를 위해서 책을 만든다면 그리고 그 열 살짜리가 한 명 한 명 다 다르다고 가정하면 그래도 작가로서 빠져나갈 구멍이 있지 않을까요?’

 자신을 위한 책을 만들려고 애쓰고, 그 안에서 다양한 진짜 얼굴을 상상해낸다는 말이 마음에 와 닿는다. 책을 읽는다는 것은 그 안에서 자신을 위한 이야기를 찾아내고, 다양한 진짜 내 얼굴을 찾는 것이 아닐까? 굳이 네 개의 그릇 속에 담긴 진짜 내 얼굴을 찾는다면, 나는 때로 갑자기 내리는 비를 막는 우산 같은 사람이 되고 싶었고, 더운 햇살을 막아주는 썬글라스가 되고 싶었고, 식탁 위에 놓인 정성이 가득 담긴 음식같은 사람이 되고 싶으나, 바퀴가 하나 빠진 자동차처럼 덜컹 거리고, 작게 작게 나뉜 피자 조각처럼 옹졸하기도 했던 것 같다.

 아이들이 이 책을 보면 이런 생각까지 하게 되는 걸 바라지는 않으나 어른이라면 반원을 나라 생각하고 자신을 돌아볼 수도 있을 것 같다.

 작가가 말한 자신을 위한 책이 되기 위해서 말이다.
이하늘 <인문학공간 소피움 연구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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