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elf-blind, 스스로 눈먼 자들의 광기(狂氣)
‘효(孝)’ 혈육마저도 파괴시키는 죽음의 이데올로기

▲ 효(孝)는 죽음의 이데올로기다. ‘효 이데올로기’는 자식마저도 잡아먹는다.
 심청은 ‘沈淸’일까 ‘沈靑’일까? 그녀 마음이 티없이 맑고 고와서 아버지를 위해 몸바쳤으니 맑은 ‘沈淸’일 것도 같고, 그 차갑고 시퍼런 바다에 청상(靑裳)을 던졌으니 또한 ‘沈靑’일 법도 하다. 그런데 ‘淸’이면 어떻고 ’靑’이면 또 어떠랴“ 맑디맑은 것과 푸르디푸른 것은 인지상정으로 좋은 것이어서 우리 딸 심청의 이름으로 제격이 아닌가?

 심학규는 ‘沈鶴奎’일까 ‘沈學奎’일까? 유학(儒學)으로 시작해서 유교(儒敎)로 끝나는 유가(儒家)의 나라에서 배운다(學)는 것은, 특히 유학(儒學)이라는 것은 단연코 ‘오로지’다. 공자께서 ‘학이시습’을 붙들고 ‘불역열호’를 외쳤던 뜻을 모르는 바는 아니지만 그래도 거기에 ‘출세’의 길이 굳이 없었다고 보기는 어렵지 않을까? 죽어서도 ‘학생부군신위’로 자리매김되어야 명복(冥福)을 받았다고 하는 판이니 ‘學’이라는 글자는 사람의 이름자로 씀에 부족함이 없다 하겠다.
 
▲어떤 아비, 내 귀를 즐겁게 해 주렴!

 그런데 ‘鶴’이라고 다를까? 주구장창 서책 옆에 끼고 사서오경을 달달 외어 백일장에 향시에 소과를 넘고, 초시에 복시를 거쳐 전시에 이르니 대과 또한 넘어서고, 나랏님이 관복으로 내어주던 그 옷에 떠억하니 학이 수놓아져 있질 않은가? 하여, 공자의 말씀을 불경하게도 세속적으로 풀이해보니 ‘배우고 때로 익히면 또한 출세하지 아니한가’로 보는 것도 아주 이상할 것은 없다. 그래서 심학규는 ‘沈鶴奎’이고 또한 ‘沈學奎’다. 그의 이름에서 ‘學’과 ‘鶴’은 본질적으로 차이가 없다.

 사람의 이름은 소망을 담는다. 심학규라는 이름 속에는 절절한 소망이 담겨 있다. 몰락한 양반 찌끄러기의 소망이 뭐 별건가? 이름에 담긴 소망일 밖에. 하지만 그 꿈은 이룰 수 없는 꿈이다. 꿈은 높고 현실은 낮으니 아이러니다. ‘화수분’의 ‘화수분’처럼, ‘감자’의 ‘복녀’처럼.

 좌절된 소망은 비뚤어진 욕망으로 나타난다. 본인이 이루지 못한 ‘출사’와 ‘출세’의 과업은 고스란히 누군가에게 전가된다. 오호 애재라! 슬프게도 그 당사자는 핏줄이다. 딸이다. 출사도 못하고, 그리하여 출세도 못하는 딸은 책임을 떠넘긴 자들이 지은 이데올로기를 완수해야만 하는 비극을 맞이한다. 그렇다. 명백히 ‘孝’는 무서운 이데올로기다. 효도는 사류(士類)들이 만든 죽음의 이데올로기인 것이다.

 아비가 눈을 뜨면 달라지는 게 있을까? 눈 감고 평생 비럭질만 해온 몰락 사류가 할 수 있는 일이란 게 도대체 뭘까? 기껏해야 혼자 남겨진 아비 걱정 안하고 밤늦게까지 뼈빠지게 더 일할 수 있는 행복을 딸에게 선물하는 것? 이 칠칠치 못한 아비에게 필요한 것은 생물학적 개명이 아니라 사회학적 눈뜸이다. 되지도 못할 것에 욕망을 드러내보았자 뒤뚱거리는(奎) 우스꽝스런 학(鶴)꼴 밖에 나지 않겠나?

 세월이 흘러도 연인들끼리 나누는 유치찬란한 닭살 멘트, ‘자기, 나 얼마나 사랑해?’. 대답을 해야만 하는 연인은 양팔을 찢어져라 벌리며 ‘이따만큼’이라고 하거나 ‘하늘만큼 땅만큼’을 외쳐야 이 전통적 주술에서 빠져나올 수 있다. 하지만 이 주술은 시효가 있다. 파릇파릇한 ‘젊은것들’이 아니라면 부디 삼가야 할 부비트랩이다. 필경 ‘미친’ 소리 듣기 십상이다.

 어이없게도 어떤 아비가 딸들에게 그랬다. 아비를 얼마만큼 사랑하냐고. 아비는 늙은이가 되었고 딸들은 출가를 했다. 보통의 경우라면 웃고 넘길 일이었지만 아비는 진지했고 딸들은 심각했다. 왜? 대답 여하에 따라 막대한 재산이 좌우되므로.
 
▲사랑과 재물을 상거래하듯

 리어왕은 지금 자식들에게 사랑을 구걸하고 있다. 좋은 소리와 나쁜 소리를 구별하지 못하면 바른 지도자가 될 수 없다. 어디 지도자만 그러한가? 쓴소리와 단소리의 구분은 공적 영역에서나 사적 영역에서나 두루 필요한 덕목이다. 그런 점에서 리어왕은 왕으로서나 아비로서나 자격미달이다. 사랑과 재물을 등가교환하려는 이 천박한 상거래 행위는 결국 자신을 파멸시키고 혈육을 살해하고 국가를 위태롭게 한다.

 심학규가 눈을 떠서 좋을 일이 없듯(결말의 개명 말고) 리어왕의 귀가 즐거운 건 비극이 아닐 수 없다. 즐거운 건 중독되기 쉽고 중독되면 마비되기 쉽다. 쾌락은 이성을 마비시킨다. ‘아버지가 저를 사랑하는 것만큼 저도 아버지를 사랑합니다’라는 이 현명하고도 당연한 말을 알아듣지 못하고 싹퉁머리 없는 이기적인 계집이라고 생각한 아비는 이미 이성의 귀를 잃었다.

 비루한 욕망에 사로잡혀 눈을 잃고 귀를 잃은 자들이 가련한 딸들을 짖누르고 짖누른다. 아비들의 죄가 무겁다.
김시인 <인문학공간 소피움 대표>

[드림 콕!]네이버 뉴스스탠드에서 광주드림을 구독하세요

저작권자 © 광주드림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