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상 속 미투 운동 마주하기<2>

 지난 글에서 당분간 기회가 될 때마다 인연 지면을 통해 ‘대안학교에서 미투 운동을 고민하고 실천하는 기록’을 남기겠다고 호기롭게 이야기 했었습니다. 허나 문제가 생겼습니다. 학내에서 일어나는 일상적인 성차별·폭력에 대해 문제제기 하고 싶다던 학생들이 함께 할 사람과 함께 나눌 사례들을 모아서 만나기로 했는데, 그 뒤로 별 다른 소식이 없는 겁니다.

 학생들을 기다리다가 한 번은 제가 쉬는 시간에 직접 학생을 찾아가서 ‘한 동안 소식이 없었는데 어떤 상황인지’ 물어보았습니다. 돌아온 답변의 요지는 다음과 같았습니다. ‘검정고시 등 이런저런 일정이 있어서 여유가 없었다. 바쁜 일이 끝나면 찾아가겠다.’ 그러나 학생들이 말한 검정고시가 끝난 지 일주일이 지났지만 여전히 기별이 없는 상황입니다. 저는 어떻게 해야 할지 막막해졌습니다.

 만나서 자세히 이야기 나누어봐야겠지만 짐작컨대 차별과 폭력을 마주할 때의 그 분노가, 그 날선 생각들이 시간이 지날수록 일상의 일들에 휩쓸려 점차 무뎌지고 있는 듯 보였습니다. 절박했다면 이런저런 일들을 제쳐놓고 이 문제에 집중했겠지만 그렇지 않았거든요. 어쩌면 당연한 일인지도 모르겠습니다. 일상이 가지고 있는 위력이랄까요? 일상은, 수없이 되몰아쳐서 굵은 바위를 작은 모래알로 깎아버리는 파도처럼, 차별과 폭력의 고통을 어느 정도 감내할 수 있을 만한 경험으로 깎아버립니다.
 
▲상담자·교사의 역할, 학생들 상황은?
 
 저는 이렇게 일상에 휩쓸려가는 학생들을 보며 어떻게 해야 할지 고민했습니다. 첫 번째 방법은 ‘상담자’로서 학생들과 만나는 것입니다. 여느 상담 활동과 마찬가지로 문제 해결의 주체는 학생들이고, 학생들의 자발적인 의지가 발휘될 때 까지 기다리는 것입니다. 학생들보다 앞서나가거나 뒤쳐지지 않고, 나란히 가면서 학생들에게 필요한 정보나 방법을 알려주고 학생들이 할 수 있는 만큼 도와주는 역할이겠죠. 만약 제가 성급하게 학생들의 생각보다 더 앞서 나가서 학생들을 이리저리 이끈다면, 문제의 해결은 오히려 어려워질 수 있습니다. 또는 학생들은 이 문제 해결에서 들러리로 전락하겠지요. 따라서 묵묵히 학생들을 지지하면서 지켜보고 기다려야 할 것입니다.

 다른 방법도 있습니다. ‘교사’로서 학생들과 만나는 것입니다. 이곳은 학교이며, 특히 대안학교입니다. ‘이 문제를 해결하는 일’만큼 중요한 것은 ‘이 문제를 해결하는 방법을 학생들이 배우고 익히는 일’일 것입니다. 그 결과 삶의 현장에서 다양한 문제들에 가로막혔을 때, 학교에서 문제를 해결해본 경험을 떠올리며 그렇게 적극적으로 문제를 해결하는 주체로 성장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그렇게 보자면 학생들이 문제를 해결하려는 의지를 다시 세울 때까지 하염없이 기다리고, 또 학생들이 이렇게 일상에 휩쓸려 문제의식이 무뎌지다가 일이 흐지부지되면 개인적으로 안타까워하고 마는 것이 아니라 함께 의지를 세우는, 다양한 방식의 적극적인 개입이 필요할 수도 있겠지요. 사실 학생들의 입장에서는 이런 종류의 문제를 해결하는 것이 낯설고 어려운 일입니다. 이럴 때 일수록 교사가 적극적으로 말 걸고, 옆에서 필요한 도움을 주고, 학생들이 성장할 수 있는 계기로 만드는 다양한 노력을 해야겠지요.

 이렇게 학생들의 차별과 폭력의 경험 그리고 그 문제의식들이 일상에 휩쓸리지 않도록 때로는 기다려주고 때로는 옆에서 끌어주면 학생들이 문제를 해결하려는 실천을 감행할 수 있을 것이라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여기까지 생각하면서도 제가 뭔가 놓치고 있다는 느낌을 지울 수가 없더군요. 곰곰이 따져보니 저는 저의 역할에 대해서만 생각했지, 학생들의 상황에 대해서는 별 다른 고민이 없었다는 사실을 확인했습니다. 정말 ‘학생들의 차별과 폭력의 경험 그리고 그 문제의식들이 일상에 휩쓸리지 않도록 때로는 기다려주고 때로는 옆에서 끌어주면 자연스럽게 학생들은 문제를 해결하려는 실천을 감행’할까요?
 
▲수동에서 능동적 실천으로 ‘혁명’
 
 사실 어떤 문제를 겪었을 때, 그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실천을 곧바로 하진 않습니다. 수많은 사람들이 문제를 겪어도 그 문제를 해결하려는 사람은 소수입니다. 여기에는 수많은 사례들이 있겠지만, 요즘 언론에 종종 등장하는 ‘대한항공 조 씨 일가의 갑질 문제’를 떠올려보죠. 조 씨 일가의 갑질은 오랫동안 이어져왔고, 거기에 대해 많은 사람들이 문제임을 알고 있었지만, 여기에 전면에 나서 문제제기를 하고 싸운 사람은 박창진 사무장이 유일했습니다.(경향신문 인터뷰:http://news.khan.co.kr/kh_news/khan_art_view.html“artid=201804210600085&code=210100) 조 씨 일가의 갑질을 겪은 동료 직원들은 박창진 씨와 함께 문제를 해결하려고 노력하기 보다는 오히려 땅콩회항 사건 후 복직한 박창진 씨를 감시하고 따돌리는 데에 적극적으로 동참했다지요. 어떻게 같은 일을 겪고도 어떤 사람은 문제를 해결하려고 실천하는데, 어떤 사람들은 방관하거나, 그 실천을 방해하려고 할까요? 이 차이는 어디서 오는 것일까요? 이 질문에 대한 답을 얻지 못하면 앞에서 생각한 이런저런 노력들이 무슨 의미가 있을까요?

 이 질문에 대한 답을 저는 현재 가지고 있지 않습니다. 다만, 당사자로서 문제를 겪은 뒤에 그 문제를 해결하려고 애쓰는 일은 ‘자연스럽게’ 이어지는 일이 아니라는 것은 알고 있습니다. 더 나아가 ‘당하고 겪어서 고통을 느끼는 일’(passion: 수동)과, 그것을 ‘바꾸고 해결하려고 애쓰는 일’(action: 능동)은 사실상 정반대 종류의 일이며, 이처럼 ‘수동성’에서 ‘능동성’으로 극적인 방향 전환을 위해서는 ‘일상’이라는 거대한 파도를 가로질러야 한다는 점을 확인했습니다. 곱씹을수록 참 어마어마한 일들입니다. 이렇게 보자면 피해당사자가 차별과 폭력의 경험을 폭로하는 행위는 그 자체만으로도 매우 적극적이고 능동적인 실천입니다. 그래서 미투 ‘혁명’이라고 이름을 붙이나 봅니다.

 ‘도대체 수동적으로 당한 뒤에 어떻게 정반대로 능동적인 노력하게 될까요?’ ‘이렇게 하기 위해서는 어떤 역량(competence)들이 필요할까요?’ ‘학생들이 이런 역량들을 배우고 익히기 위해서는 무엇을 어떻게 해야 할까요?’ 학생들을 기다리면서 혹은 말을 건네면서 이 문제들에 대해 곰곰이 생각해봐야겠습니다.
추교준
 
 추교준님은 인문학이 잘 팔리는 시대에 어떻게 하면 근본적이고 급진적인 인문학이 가능할지 고민하는 사람입니다. 대학원에서 철학을 공부하고 있으며 대안학교에서 학생들을 만나고 있습니다. 한 번씩 시민단체 활동가들 어깨너머로 인권을 함께 고민하기도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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