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 겨울에 제주의 쓰레기위생매립장에 간 적이 있다. 살면서 맡아본 적 없었던 극심한 악취가 코를 찔렀다. 쓰레기는 시각적으로도 그 존재감을 강하게 드러냈다. 자세히 보면 무엇인지 알아볼 수 있을 것만 같은 물체들이 본색을 감춘 채 산더미처럼 쌓여있었다. 방금 막 도착한 트럭에서는 그 해 수확되었을 귤들이 새하얀 눈 위에 무더기로 쏟아졌다.

 쓰레기장은 어느 도시에서나 ‘깨끗한’ 이름을 가지고 있다. ○○시 자원회수시설, 음식물자원화시설, ○○시 쓰레기위생매립장. 이런 이름들에서는 코를 찌르는 악취나 거대한 오물덩어리를 상상할 수 없다. 굳이 상상해야 할 이유는 또 무엇인가.

 그런데 그 어마어마한 쓰레기를 만나고 난 뒤, 나는 ‘나의 쓰레기’를 조금씩 의식하게 됐다. 물건을 사면서는 곧 쓰레기가 될 포장재가 먼저 보였다. 고작 20분 커피를 마시는데 200년 동안 썩지 않을 컵이 딸려 나왔다. 배달 음식을 시켜먹으면 남는 빈 그릇도 아주 선명하게 자기가 거기 있는 이유를 물었다.
 
▲커피 한잔에 200년 안썩을 컵 딸려나와
 
 이 쓰레기들은 이제 어디로 갈까?

 이탈로 칼비노는 소설 ‘보이지 않는 도시들’에서 이렇게 말했다.

 ‘매년 도시가 확장되기 때문에 쓰레기장은 점점 더 멀리 물러나야 합니다. 버려지는 양이 늘어나면 늘어날수록 쓰레기 더미는 점점 더 높아지고 겹겹이 쌓이고 반경을 넓혀갑니다. 게다가 새로운 물건들을 만드는 도시의 기술이 발전할수록 쓰레기의 질도 더 좋아져서 시간과 악천후와 부패와 연소에 저항력을 키워갑니다. 도시를 에워싼, 파괴되지 않는 쓰레기 요새가 산맥처럼 사방에서 도시를 압도합니다.’

 소설 끝에서 이탈로 칼비노는 우리가 사는 지옥에서 벗어나는 방법을 두 가지로 제안한다. 하나는 이미 많은 사람들이 하고 있는 대로, 지옥을 받아들이고 그 지옥이 더 이상 보이지 않을 정도로 그것의 일부분이 되는 것이다. 다른 하나는 지옥의 한가운데서 지옥에 살지 않는 사람과 지옥이 아닌 것을 찾아내 지속시키고 그것들에게 공간을 부여하는 것이다.

 우리는 저 너머의 쓰레기 요새를 감지하지 않아도 될 만큼 편리하고 깨끗한 도시에 살고 있다. ‘장소에 따라서는 숨쉬기에 괜찮은 것 같고, 나무들이 싱그러운 녹색을 유지하는 듯하며, 강아지들이 행복하고 활기차 보인다.’ 그런데 왜 우리는 쓰레기 요새를 끊임없이 상기할 수밖에 없고, 끝내 모르는 척 할 수 없을까. 쓰레기 없이 살아갈 수 없기 때문이다. 나무젓가락이나 테이크아웃 컵, 엄청나게 편리하고 깨끗한 쓰레기들이 이 도시를 만들고 있기 때문이다.
 
▲내 손에서 떠날 뿐, 이 세상에 남는 쓰레기
 
 나는 여전히 종종 일회용품을 쓰고 손쉽게 내다버린다. 텀블러를 챙기지 않은 날에도 땡볕을 걸으면서 아이스커피를 마시고 싶고, 한밤중에 컵라면의 유혹을 떨치기 어렵다. 숱한 일회용품을 바라보는 내 심정은 이렇다. 나무젓가락을 쓰지 않고 서랍에 고이 보관하는 것이 나을까, 휘리릭 써버리고 집밖으로 내보내는 것이 나을까. 어느 쪽이라도 쓰레기라는 것을 부정할 수 없다. 이 견고한 쓰레기 요새에서 벗어나기 위해 우리는 안팎으로 쓰레기를 줄여야 한다. 가능한 제도적으로.

 근사하고 숭고했을 상품들, 나의 쓰레기가 그 지독한 악취와 오물덩어리가 된다는 생각을 하면 하릴없이 마음이 무거워진다. 이 죄책감은 분리수거를 완벽하게 성공한다고 해서 사라지는 것이 아니다. 쓰레기는 내 손에서 떠날 뿐, 이 세계에 그대로 머물러 있기 때문이다. 우리는 쓰레기와 영영 격리될 수 없을 것이다. 쓰레기는 우리보다 더 오래 살아남을 것이다. 그러니까 이 쓰레기 요새에서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은 동료 인간, 바다생물들, 지구에 대한 모호하고 불확실한 책임을 다하는 것일지도 모른다. 주의를 기울이며 계속 배워나가며.
은별

※제목은 브라이언 딜, 한유주 역, ‘쓰레기’(플레이타임, 2017) 가운데서 따온 것이다.

 ‘은별’님은 술과 커피를 좋아합니다. 나의 기쁨과 사회적 고통의 간극을 어떻게 좁힐 수 있는지 게으르지만 계속해서 물어보고 싶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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