탕자는 결국 돌아오고야 말았다. 오래 전 제 발로 떠났던 자신의 고향으로, 집으로 말이다. 그는 떠나 있는 동안 집의 진수성찬 대신 야생 도토리를 먹었고, 따뜻한 방안의 침대가 아닌 차디찬 들판에서 추위에 떨었다. 그는 집으로 돌아왔을 때 한없이 부끄럽고 슬펐지만 이미 돌아왔기에 어쩔 수가 없었다. 그는 떠나는 데에 실패했고, 끝내 돌아오고야 말았으므로 ‘탕자’라는 이름밖에는 남지 않았던 것이다. 탕자라는 이름을 가진 자는 그 혼자만이 아니다. 지금까지 수많은 탕자가 있었고 앞으로도 수많은 탕자가 생겨날 것이다. 많은 이들이 필연적으로 돌아올 수밖에 없다는 사실은 비극적이다. 그러나 가장 비극적인 것은 돌아온 이들이 그저 ‘탕자’일 뿐이라는 것이다.

 탕자가 돌아왔을 때 집에서는 잔치가 열렸다. 가족들은 그를 타이르거나 책망했고, 또는 위로했지만 그것들과는 무관하게도 그는 집으로 완전히 돌아오고 만 것이었다. 이제 그는 아버지의 뒤를 잇고, 형의 일을 도우며 어머니를 보살피는 이상적인 가족의 일원으로 살아가야만 한다. 어찌 보면 방랑보다는 훨씬 나은 삶일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는 도토리의 맛을 잊지 못했고 들판의 공기를 지워내지 못했다. 어쩌면 그는 돌아온 것이 아니다. 세상이 잔인하게도 그를 돌려보낸 것이다. 다만 그는 거기에 맞설 힘이 없었을 뿐이고.

 사실은 떠났던 사람들의 대부분이 그렇게 돌려보내진다. 그러면, 떠나지 않은 사람들은? 꽤나 많은 수의 그들은 집에 만족하고, 그 구성원으로써 의무를 다한다. 그들의 눈에는 떠나는 자들이 멍청해 보일 것이다. 그래서 돌아온 이들에게 탕자라는 이름을 주었다.

 떠났음에도 탕자로 불리지 않는 방법은 진정으로 떠나는 것뿐이다. 자신의 질서와 신념에 기반한, 완전히 새로운 곳을 개척하는 것 말이다. 세상은 겁과 무지를 시작으로 돈과 명예, 재능, 출신, 운 그리고 그 외의 모든 것들과 함께 겁 없던 소년을 옥죈다. 세상의 정의도, 그런 세상에 살고 있는 사람들도 너무나 차디차다. 무수히 많은 탕자들은 꿈을 포기하고 현실과 타협하는 법을 배우며, 이내 자식들에게 떠나지 않는 법을 가르친다. 그 자식들은 어느새 어른이 되어, 떠났지만 떠나지 못한 이들에게 탕자라는 이름을 붙인다. 그렇게 해서 수많은 탕자들은 생겨난다. 결국 현실에 굴복하고 말았던 수많은 사람들에 의해서 말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탕자들은 없어지지 않는다. 가혹한 현실에서도 여전히 떠나고 도전하는 사람이 존재하며 끝내 자신의 세계를 만들어 내는 사람들도 존재한다. 현실과 이상의 괴리는 필연적인 비극이지만 그 사이에 있는 우리들은 비극으로만 이루어진 존재는 아닐지도 모른다. 현실이 아무리 차가울지라도 어떤 사람들은 그것을 끝내는 녹여내고 말기 때문에, 우리는 이 세상을 계속 살아가는 것이 아닐까. 설령 녹이지 못한다 할지라도 그들의 최선에는 비극을 넘어서는 무언가가 있을지도 모른다.

 탕자들은 마치 부활하지 못한 예수 같다. 그들의 우상과 같이 십자가에 매달려 있는. 그들은 부활하지 못하기에 더욱 비극적이다. 그러나 현실에서 과연 예수는 부활했었는가. 나는 탕자들의 탄생을 기뻐해야 할지, 슬퍼해야 할지 모르겠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예수를 비웃지 않기 때문에 그들 또한 위대하다고 생각한다. 그들은 애도가 아니라 경배받아 마땅하다.

 인간은 항상 주어진 질서를 벗어나려 하고 끊임없이 실패한다. 나약한 인간에게 현실은 너무 잔인하고 냉정하다. 아직도 탕자는 존재한다. 그 많은 실패들에도 불구하고 아늑한 집을 떠나는 것이다. 탕자는 결국 집으로 돌아오고야 말았다. 어쩌면 그의 동생도 돌아올 수밖에 없을지 모른다. 그러나 과연 그것들이 의미가 없는가. 거의 필연적인 비극에 저항하는 인간은 멍청한 게 아니라 위대하다고 말하고 싶다. 사실 나도, 탕자의 귀향이 비극이라는 것을 안다. 알고 있지만, 완벽한 비극만은 아니었노라고 말하고 싶을 뿐이다.
이수아 <경신중 3년, 인문학공간 소피움>

[드림 콕!]네이버 뉴스스탠드에서 광주드림을 구독하세요

저작권자 © 광주드림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