철학하는 탕자들, 세상을 발효시키는 효모
스스로 추방된 자들의 ‘철학적 출가’

▲ 거친 세상에서 돌아온 아들을 맞이하는 아버지와 거친 세상으로 아들을 보내는 아버지. 이카루스의 비행은 권력화되고 성역화된 부조리한 세상에 저항하는 철학적 발효다.
 그는 굴뚝에서 연기가 오르는 자기 집 지붕을 알아 볼 수 있을 만한 저녁 때쯤 언덕배기에 이르렀다. 그러나 그는 자기의 초라한 모습을 조금이라도 숨겨 보려는 생각으로 어둠의 장막이 내리기를 기다리고 있었다. 멀리서 아버지의 낯익은 음성이 들려왔다. 저절로 무릎이 꿇렸다. 그리고 땅바닥에 쓰러져 얼굴을 들 수가 없었다. 자기가 그분의 아들이라는 생각에 이르자, 아버지를 치욕스럽게 만든 것이 부끄러워 낯이 뜨거워졌다. 그는 더 이상 그 자리를 지키고 서 있을 수 없어서언덕을 내려가 뜰안으로 들어섰다.

 개는 그를 알아보지 못하고 마구 짖어댔다. 탕자는 하인들에게 말이라도 붙여보려고 했지만, 의심많은 그들은 슬슬 피하며 안으로 들어갔다. 드디어 주인이 나타났다. 주인은 방탕한 자기 아들을 대뜸 알아 보았다. 주인은 아들을 기다리고 있었던 모양이다. 주인은 두 팔을 벌려 반갑게 아들을 맞았다. 아들은 그제서야 그 앞에 다가가 무릎을 꿇었다. 한 팔로 얼굴을 가리고 오른손은 치켜들고 아버지께 용서를 청했다.

 “아버지! 하느님과 아버지께 죄를 지었습니다. 감히 아버지를 부를 수조차 없는 불초 죄인이오니 이제는 아들로 생각지 마시고 머슴으로나마 써 주십시오.”

 “내 아들아! 네가 내게로 돌아온 오늘이야말로 하느님의 축복받은 날이다! 여봐라, 어서 들어가 장 속에 넣어 둔 가장 좋은 옷을 가져 오너라. 그리고 내 아들의 발에 신발을 신겨 주고 손가락엔 값진 반지를 끼워 주어라. 그리고 외양간에 가서 살찐 송아지를 잡고 잔치 준비를 하여라. 죽은 줄로만 알았던 내 아들이 살아 돌아 왔으니 이보다 더 기쁜 일이 어디 있겠느냐?”
- 앙드레 지드의 ‘돌아온 탕자’
 
 ▲탕자의 귀환, 그리고 가족과의 논쟁
 
 널리 알려진 탕자의 이야기는 신약성서 누가복음에서 기원한다. 예수 그리스도가 죄인과 세리에게까지 친절을 베풀자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이 못마땅해 했는데, 여러 예를 들어 그들의 질투를 무마하는 이야기가 누가복음 15장에 전한다. 예수는 잃어버린 한 마리 양에 관하여, 되찾은 드라크마 한 잎에 대하여, 그리고 회개한 한 명의 죄인을 이야기하면서 탕자 이야기를 꺼낸다. 분깃한 몫의 재산을 탕진하고 돌아온 둘째 아들을 꾸짖지 않고 오히려 잔치를 베풀며 환대하는 아버지를 원망하자, 아버지는 맏아들에게 잃어버렸던 아들과 아우를 되찾은 행운을 함께 기뻐해야 하지 않겠느냐며 그를 설득한다는 것이다.

 예수가 말하고자 하는 바는 무엇인가? 하느님의 품에 든 것이든 그러지 않은 것이든 모두가 소중한 것이라는 말이며, 율법주의라는 획일적 틀로 사람들을 갈라 특정한 부류들만 고귀하고 나머지는 배격해도 좋다는 못된 신앙적 행태를 비꼰 일갈이다. 이미 기독교 성경에 나온 이야기를 앙드레 지드는 ‘리바이벌’한 것일까? 그러나 이 위대한 작가의 ‘돌아온 탕자’는 재탕이 아니며 표절은 더더욱 아니다. 작가의 탕자 이야기는 패러디를 넘어서는 풍자다.

 지드의 탕자는 집으로 돌아와 안락하고 행복한 생활을 하는 것으로 그려지지 않는다. 탕자는 바로 다음날부터 가족들과 일대일 대화를 나누어야 한다. 첫날은 아버지와, 다음날은 형, 그리고 그 다음날은 아머니. 가족들은 탕자가 이 모든 과정을 완수해야만 가족의 일원으로 받아들이겠다는 심산이다.

 아버지는 집과 광야, 재물과 가난, 덕성과 망상에 관해 질문을 했고 탕자는 자유와 행복과 욕망의 가치에 대해 답변했다. 아버지는 살진 송아지의 달콤한 맛이 귀환을 재촉한 것이 아니냐는 공박에 거친 도토리의 향긋한 맛으로 호소했다. 형은 규범의 미덕과 오만의 부덕, 선량하고 순종적인 태도와 그렇지 못한 것에 대해 묻는다. 형은 아버지의 집이 모두가 기거해야 할 품이라고 말하고 탕자는 아버지의 품이 세상의 전부일 수는 없다고 말한다. 어머니는 가족과 형제에 대해서, 그리고 행복한 가정에 관하여 아들에게 이야기한다. 어머니는 배고픔과 추위, 결혼과 가정에 대한 이야기를 한다.

 이들은 하나같이 탕자에게 똑같은 질문을 던지고 있다. 왜 집을 뛰쳐나갔으며 다시 돌아온 이유는 무엇이냐는 것이다. 성경은 나간 이유도 돌아온 이유도 묻지 않는다. 물을 이유가 없는 것이다. 왜냐하면 탕자의 가출은 쾌락과 향락이라는 이유 하나 뿐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지드의 탕자에게 가족들이 그의 여행을 묻는 건 그의 가출이 방탕이 아니기 때문이다. 가족의 질문은 철학적이며 탕자는 자기의 ‘철학적 출가’에 대해 답변하고 있다.
 
▲구도의 길 현자들의 숙명의 풍찬노숙
 
 “조나단 리빙스턴! 한복판에 나와서라. 조나단, 그대의 동료 들이 보는 가운데 치욕을 당하기 위해 가운데로 나와 서라.”

 그는 널빤지로 얻어맞은 기분이었다. 무릎이 휘청거렸고 모든 깃털이 축 처졌고 귓속에서는 윙윙거리는 소리가 났다.

 “조나단은 무책임하고 무모한 짓을 했으며 갈매기 사회의 전통과 위엄을 해쳤다. 조나단 리빙스턴! 그대는 언젠가 깨닫게 될 것이다. 무책임한 짓이 이로울 게 없다는 것을. 우리는 먹기 위해, 그리고 가능한 한 오래 살아남아 있도록 이 세상에 던져진 존재다. 그 이상의 일은 알려지지도 않았고 알 수도 없는 것이다.”

 “무책임한 짓이라구요? 형제들이여! 삶의 의미를, 삶의 더욱 높은 목적을 찾고 그것을 실천하는 갈매기보다 누가 더 책임이 있단 말입니까? 수천 년 동안 우리는 물고기 대가리나 찾아 다녔지만 이제 우리에겐 살아갈 이유가 생긴 것이 아닙니까! 배우고 발견하고 자유로워지고 하는! 단 한 번의 기회만이라도 주십시오. 내가 알아낸 바를 보여드리겠습니다.”

 “형제의 관계는 깨졌다.”
- 리차드 바크의 ‘갈매기의 꿈’

 조나단은 추방되었으나 추방의 본질은 ‘철학적 출가’다. 수천 수만 년 동안 이어져온 전통은 기실 아무짝에도 쓸모가 없는 경우가 많다. 전통과 관습이란 앙시앵 레짐(ancien regime)으로서 소수를 제외한 절대다수를 속박하는 폭력적 질서로 자리잡는다. 예수의 주유천하(周遊天下)도 석가모니의 탈가(脫家)도 철학적 출가였으며 소크라테스의 ‘노변담화(路邊談話)’도 무함마드의 히즈라도 구도의 길이었다. 진리를 찾는 구도의 길을 가는 데에 현자들은 스스로 풍찬노숙(風餐露宿)을 마다하지 않았다.
 
 “얘야, 너는 왜 집을 떠났니”

 “그 집은 저를 가둬 놓았기 때문이었어요.”

 “너무 교만하구나. 너는 바람이 몰아치는 들판에서 잠잘 수 있다고 생각하니”

 “가난한 사람들은 들판에서 자고 있습니다.”

 “소박한 네 애비가 네 속에 넣어 준 수많은 덕성은 어디에 두었니”

 “새로운 정열이 제 마음에 불을 붙였으므로 저는 더욱 아름답게 불태우려고 했던 것입니다.”

 “어제의 살찐 송아지는 네 구미를 돋우었겠구나.”

 “아버지! 아직도 저의 입속에는 제 양식으로 삼고 있던 달콤한 도토리의 향긋한 맛이 남아 있습니다.어떠한 음식도 도토리의 그 맛을 능가할 수 없다고 생각합니다.”
- 앙드레 지드의 ‘돌아온 탕자’

탕자는 방탕(蕩)하다고 비난받지만 세상을 바라보는 넓은(蕩) 안목을 갖추고도 있으며, 그리하여 부덕한 세상의 부조리를 모조리 쓸어없앨(蕩) 힘도 내장하고 있다.|||||
 
▲탕자(蕩子), 넓은(蕩) 안목으로 부조리를 쓸어없애다(蕩)

 어떤 집단이든 어떤 사회든 그들을 위협하는 적이 있을 때는 합심하고 단결하여 외부의 적을 물리치고 자기를 보호한다. 그렇다면 외부의 적이 사라지면 어떨까? 그들은 묵혀두었던 짐을 풀게 될 것이다. 그 짐보따리 속에는 그들 내부의 고약한 문제가 들어있다. 그 문제를 해결해야 비로소 모든 위기를 극복하고 평화가 도래하는 것이다. 중세의 기독교가 그랬다.

 예수의 기독교는 그의 생전이나 사후나 로마의 극심한 탄압을 받았다. 기독교인들은 스스로를 보호하기 위해 결속과 헌신과 순교를 마다하지 않았다. 오랜 시련을 견디면서 로마 속으로 파고든 기독교는 드디어 로마를 먹어치우고 그 제국의 국교가 되었다. 국가의 외피를 쓴 모든 것들은 권력화되고 성역화 된다. 서열화되고 보수화된다. 하지만 낡아빠진 곳에서도 꿈틀거리는 새로운 것들은 늘 있게 마련이다. 힘이 약한 새싹들은 짓밟히고 때로 얼어죽지만 광야의 찬바람 속에서도 살아남아 새 세상을 열어젖힌다.

 권력화되고 성역화된 기독교 내부에서도 신앙의 힘으로 구도하고 이성의 힘으로 철학하는 탕자 아닌 탕자들은 참으로 많았다. 수많은 탕자들이 추방당하고 파문당하고 불살라지는 고난을 겪으면서도 끊임없이 태어나는 조나단의 후예들처럼 탕자들은 들풀처럼 자라났다. 탕자는 방탕(蕩)하다고 비난받지만 세상을 바라보는 넓은(蕩) 안목을 갖추고도 있으며, 그리하여 부덕한 세상의 부조리를 모조리 쓸어없앨(蕩) 힘도 내장하고 있다. 그래서 탕자는, 아니 탕자라고 불리는 모든 또라이들은 늘 ‘전체를 발효시킬 효모’가 된다.
김시인 <‘인문학공간 소피움’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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