빈틈이 나를 만든다

▲ 메리 스티븐슨 커샛의 ‘엄마의 바느질’.
 김교수님이 새로운 학설을 발표했다
 소리에도 뼈가 있다는 것이다
 모두 그 말을 웃어넘겼다 몇몇 학자들은
 잠시 즐거운 시간을 제공한 김교수의 유머에 감사했다
 학장의 강력한 경고에도 불구하고 교수님은 일 학기 강의를 개설했다
 호기심 많은 학생들이 장난삼아 신청했다
 한 학기 내내 그는
 모든 수업시간마다 침묵하는
 무서운 고집을 보여주었다.
 참지 못한 학생들이, 소리의 뼈란 무엇일까
 각자 일가견을 피력했다
 이군은 그것이 침묵일거라고 말했다
 박군은 그것을 숨은 의미라 보았다
 또 누군가는 그것의 개념은 중요하지 않다고 했다
 모든 고정관념에 대한 비판에 접근하기 위하여 채택된
 방법론적 비유라는 것이었다.
 그의 견해는 너무 난해하여 곧 묵살되었다
 그러나 어쨌든
 그 다음 학기부터 우리들의 귀는
 모든 소리들을 훨씬 더 잘 듣게 되었다
 - 기형도 ‘소리의 뼈’
 
 침묵의 살은 소리이며 소리의 뼈는 침묵이다. 이렇게 적고 봐도 석연찮다. 소리 없음과 침묵은 엄연히 다르다. 소리 없는 빈 공간은 소리가 뿌리를 내리고 자라는 토대가 된다. 그러나, 침묵은 더 큰 소리다. 말로 다 전하지 못하는 의미를 위해, 말이 너의 가슴으로 들어가지 못하고 튕겨져 나올 때 막다른 골목에 도달한 내가 선택하는 것이 때로는 침묵이다. 개인보다 거대한 추상적 집단, 가령 국가와 기업 그리고 주권자들을 향한 촛불시위와 일인시위가 그렇듯 침묵은 소리보다 강력하다. 인간이 태어나면서 갖는 빈 공간, 펼쳐짐으로써의 가능성도 일종의 침묵으로 아이 내면에 늘 존재한다.
 
▲밖과 안, 무엇이 성장을 결정하는가
 
 인간의 성장과 변화는 ‘양육과 본성 중 무엇에 더 의존하는가’라는 분쟁은 이제는 해묵은 것이 되었다. 그러나 여전히 ‘본성’을 중심해야하는지 아니면 ‘어떻게 키우느냐’가 아이의 진로와 미래를 결정하는지에 대한 질문은 교육의 방향을 설정하는데 유의미하다. 그래서 잠시 책을 덮고 나로 돌아가 생각해본다.

 하버드대 심리학자 하워드 가드너는 책 ‘다중지능’에서 아이 개별마다 타고난 재능의 영역이 있음을 밝혔다. 연초(年初) 학교에서 초등 고학년과 중1을 대상으로 행하는 다중지능검사도 분야별 문항을 통해 아이가 지닌 강점을 찾는 것이 목적이다. 신체운동지능, 자연친화지능, 공간지능, 언어, 논리수학, 음악, 자기이해, 인간친화지능 등 여덟 가지를 묻는데, 아이러니하게도 검사지 결과에 따라 부모님들의 희비가 엇갈린다. 가령, 언어와 논리수학, 공간지능이 뛰어난 경우 안도의 한숨을 쉬는 것인데 여타 지능이 아무리 우수해도 학교성적이나 진학에 직접적인 도움을 주는 지능 영역 점수가 부진하다면 아이에게 검사지는 그야말로 영수국과 학원을 늘리는 악몽의 발판이 되고 마는 것이다. 선의의 의도로 연구하고 발표되어도, 현실에 적용될 때는 늘 왜곡되고 마는 ‘이상과 현실의 괴리’ 현상 중 하나겠다.
 
 공자가 평생 심혈을 기울여 닦은 유학이, 조선왕조가 무르익어갈수록 실천학 혹은 관계학으로서 순기능하지 않고 왕과 백성, 남자와 여자 등 권력의 구도를 굳히는데 기여한 것을 보라. 예수가 못 박히면서도 굽히지 않았던 “사람을 위해 율법이 있지, 율법을 위해 사람이 있는 게 아니니라”는 인간학 혹은 사랑학이 어떻게 교황의 무소불위한 신성성(神聖性)을 굳히는데 쓰였는지 보라. 무릇 진리란 외양이 말랑하고 부드러워 그토록 쉽게 다치고 변형되는지도 모른다.
 
 각설하고 다시 ‘빈 서판’이다. 17세기 영국의 철학자이자 정치가였던 존 로크는 “인간은 아무것도 없는 빈 서판으로 태어난다”고 주장했다. 로크의 주장은 계몽주의에 힘을 실었으며 귀족과 평민을 가르는 혈통주의, 흑백 인종주의, 게르만 혹은 유대라는 민족주의의 배타성 혹은 검증되지 않은 폭압을 무너뜨리는데 일조했다.

메리 스티븐슨 커샛의 ‘녹색 배경 앞의 엄마와 아기’.
 
▲양육따라 모든 게 결정된다면 ‘자판기’와 뭐가 다른가
 
 “내게 열두 명의 건강한 아기를 달라. 그러면 그 태생과 무관하게 의사, 변호사, 시인 심지어 거지나 도둑으로도 키울 수 있다.” 미국의 행동주의 심리학자 존 왓슨의 선언이다. 순혈주의의 미신을 지우려면 이 정도의 뜨거운 슬로건이 필요했으리라. 그러나 사람은 ‘빈 서판’이 아니다. 그렇다면 수십 년 전 더벅머리 계집애였던 내가, 시험만 끝나면 국어선생님께는 칭찬을, 수학선생님께는 5점당 매 한 대 합쳐서 너댓대씩 맞았을 리가 없다. 난 국어공부를 하지 않는 아이였고 내가 좋아하고 존경한 건 수학과, 알 수 없는 기호들을 칠판 왼쪽부터 오른쪽 끝까지 정갈하게 채워가는 수학선생님이었다. 그러나 수학공부는 공들여 해도, 바리캉으로 깎은 민머리에서 슬그머니 돋는 남학생들의 머리카락처럼 정말 조금, 삐죽 성적이 올랐다. 그래서 나는 그토록 원한 수학자나 물리학자가 아닌 글로 먹고 산다. 그야말로 나는 ‘수학’의 영역에서 빈 서판으로 태어났던 셈이다. 그래서 어떻게 되었느냐고? 나는 아직도 ‘앗! 시리즈’ - 물론 초등생이 읽는 책이다. - 수학과학 도서를 게걸스레 읽고 수학교양서를 사 모으며 살아간다. 그럼에도 어떨 땐 ‘검은 것은 글자 흰 것은 종이’가 깨달음의 다인 책들을. 돌이켜보면 수학도 언어. 딴엔 다 알 것 같은 모국어보다 외계어에 가까워 무궁무진한 호기심을 불러일으키는 수학에 끌렸던 건 언어를 사랑하는 내 본성의 확장이었다.

엄마와 아기,

 핑커는 밝혔다. “인간은 빈 서판이 아니며 만약 빈 서판이라고 해도 그것은 완전한 무(無)가 아닌 각자의 가능성(양태)으로 가득한 서판이라고. 나는 이 말을 믿는다. 인간이 로봇이 아닌 이유도 이 양태 때문이다. 로봇은 입력과 출력이 정확하게 등가를 이룬다. 인간은 입력의 내용을 가지고 무엇을 어떻게 출력할지 스스로 결정하고 지향하는 주체적 존재다. 만약 양육에 의해 모든 것이 결정된다면 ‘자판기’와 무엇이 다른가. 그러니 저마다 타고난 본성대로 살도록 두자는 말이 아니다. 개성과 재능은 발현되어야 재능이다. 그리고 각자의 본성이 드러나도록 하는 것이 교육이며 양육이다. 오늘도 어디서 작은 모차르트가 수학학원에서 시달리고, 괴테가 논술학원에서 빨간펜으로 첨삭을 당하고 있을지 모르지만, 한마디 하련다. 생존을 위한 양육은 생성을 갈망하는 본성을 이기지 못한다. 삶이 너를 잡아먹지 않도록 하라.
박혜진 <문예비평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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