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수 ‘낭도젖샘막걸리’<1>

▲ 낭도 앞바다와 어우러진 낭도막걸리.
 <쌀뜨물 같은 이것/ 목마른 속을 뻥 뚫어 놓고 가는 이것/ 한두 잔에도 배가 든든한 이것/ 가슴이 더워져 오는 이것/ 신 김치 한 조각 노가리 한 쪽/ 손가락만 빨아도 탓하지 않는 이것/ (중략) / 시원하고 텁텁하고 왁자한 이것/ 어둑한 밤의 노래가 아니라/ 환한 햇볕 아래 흥이 오르는 이것/ 반은 양식이고 반은 술이고/ 반은 회상이고 반은 용기백배이다가/ 날 저물어 흥얼흥얼 흙으로 스며드는/ 순하디 순한 이것>
(최영철 ‘막걸리’ 중)

 막걸리는 무릇 그런 것. 그 맛을 찾아 낭도에 간다. 백야도선착장에서 배를 타기 전, 들를 곳이 있다.

 골목 안에 있는 작은 손두부집. 찾아들 사람은 기어코 찾아든다는 듯 요란한 호객의 장치는 하나도 없다. 묵묵한 외관이 외려 미덥다. 문 앞에 세워둔 작은 간판을 양쪽에서 호위하는 것은 층층이 쌓인 막걸리박스.

 이 집의 정체성을 명징하게 거든다.

 이 점방에서 손두부와 더불어 예고편처럼 낭도막걸리를 맛볼 수 있다.
 
백야도손두부와 궁합이 잘 맞는 낭도막걸리

 막걸리야 허다하건만 ‘백야도손두부’에선 낭도막걸리만 취급한다. 이 집의 두부와 궁합이 딱 맞는 술이 낭도막걸리여서란다. 벽에 써붙인 메뉴라곤 오로지 두부 한 가지(‘大’ 자와 ‘小’자로 나누면 두 가지)인 간결함과도 맥락이 이어지는 듯한 그 고집에 끌린다.

 문을 열고 들어서자마자 구수한 냄새가 확 끼친다. 묵직한 맷돌로 눌러 놓은 네모난 두부틀. 이윽고 허연 김 폴폴 날리며 두부의 자태가 드러난다. 가로 세로 가르는 칼질 속에서 ‘한 모’의 의미랄까 존재감이 뚜렷하게 다가든다.

 그야말로 옛날식인 그 허름한 점방에 앉아 묵은김치 곁들여 낭도막걸리 한잔을 들이켜야 제맛일 것이나 뱃시간이 급해서 비닐봉다리에 두부를 싸들고 승선한다.

 백야도선착장에서 낭도행 배는 하루 세 번. 첫 배는 아침 여덟 시다. 선실 바닥에 두부와 막걸리를 풀어놓는다. 투박하고 거친 질감이 듬쑥하다. 밀도가 있으면서 부드러운 맛. 슴슴하지 않고 간간한 맛. 김치나 양념장이 거들지 않더라도 저 혼자로도 충분하다. 어느 한 쪽이 기울 것 없는 밀도와 무게로 두부와 막걸리는 합(合)을 이룬다.

 동행한 최성욱 다큐감독은 “요즘엔 젊은이들 취향에 맞춰 과도하게 달거나 누룩 특유의 냄새를 없애서 주스 같은 막걸리도 많은데, 이 술은 일단 누룩 맛이 안 겨들어 좋다”며 “담백하고 적정한 단맛인데다 끝맛이 깔끔하게 떨어진다”고 낭도막걸리를 평한다.

안채와 마주보고 선 주조장 풍경. 소박하고 정답다.

 뜻하지 않았던 모닝막걸리. <알쓸신잡>에서 과학자 정재승이 “강릉 하면 에디슨박물관”이라고 천연덕스럽게 우기던 것처럼 “막걸리 하면 아침 여덟 시”라고 혼자 덧붙여본다. 선실 바닥은 아랫목마냥 뜨뜻하고 얼굴은 볼그작작 물들고. 이런 가을아침도 있다.
 
고구마밭이 널룹게 펼쳐진 섬

 화정면에 속한 낭도는 여수항에서 남쪽으로 26㎞쯤 떨어져 있다. 뱃길로는 백야도선착장에서 1시간30분 거리. 배(태평양3호)는 제도 개도 하화도 상화도 사도 등 여러 섬을 들러 들러 이윽고 낭도에 닿는다.

 개도에서 나는 ‘개도막걸리’도 전국적으로 이름난 막걸리. 여수 앞바다 조그만 섬들에 아직까지 주조장이 남아 있다는 것은 반가운 일이다.

 배에서 내려 첫 대면한 것은 육지로 나갈 고구마 상자.

 가득 쌓여 있다. 낭도의 특산물 중 하나가 고구마라는 것을 증명하듯.

 “맛있지. 호박감자. 우리들은 고구마라 안하고 감자라 그래. 땅도 좋고 바닷바람속에 큰 것이라 맛나.”

 이연자(83) 할매의 낭도고구마 자랑.

 할매는 개도에서 시집왔다.

 “멀지. 그때는 기계배도 없고 풍선이여. 바람이 엄마나 씨게 불어갖고 까딱했더라문 죽을 뻔 했어. 해필 동짓달에 시집와갖고. 배 타고 까매(가마) 속에서 부들부들 떨었어. 어디만치 간가 그것도 모르고 엄마나 있다가 내리라고 한께 아이고 살았다 싶었제. 내린께로 저 인간이 신랑이더만.”

 그 말에 옆에 섰던 할배가 가만 웃는다.

 “나는 열야달 살, 저 냥반은 스물한 살. 그래갖고 일평상을 살아.”

 짧은 그 말 속에 긴 생애가 담긴다.

 “쌀이 귀했지. 울애기들 감자만 감자만 믹여 키왔어. 긍께 모다 시방은 안묵고자와라 해. 쌀밥 못믹이고 키운 것이 인데까 짠하지. 살다본께 ‘감자안 믹여도 되는 시상’이 왔어. 감자는 비를 맞고 숭궈야 존께 비 맞음서 처량하게 숭구지. 울애기들 학교 갔다 오문 숙제하란 소리 공부하란 소리를 안하고 얼릉 감자 숭구라고 그 소리만 했어. 지금도 그 생각을 하문 짠해.”

삶의 굽이굽이를 제 몸뚱아리로 겪고 이겨내온 백전노장 할매의 풍모를 지닌 술독.
 
100년 도가의 역사 서린 오래된 독

 ‘낭만 낭도, 나도 낭도’ ‘안녕, 낯선 사람’ ‘인생은 곧 모험이다’ ‘잘 있거라, 나만이 알던 너, 섬’….

 물고기며 바다 그림 위에 그런 말들 붙었다. 골목따라 주욱 벽화가 이어진다. 옥상 위 물통에 소 그려놓고 ‘어서 오소’ ‘왔소’라고 ‘소’자 돌림으로 반기는 그림도 재밌다. 그 집 주인 할매며 주인 부부를 그려넣은 대문들도 만난다.

 그 길 따라가다보면 ‘낭도주조장’ ‘100년 도가식당’이란 간판 붙은 담벼락이 나온다. 민박과 식당을 겸하고 있다. ‘100년도가’는 괜한 내세움이 아니다.

 그 집 마당에 선 독아지가 그만치의 세월을 증거한다.

백야도선착장 근처 골목에 있는 손두부집. 낭도막걸리와 궁합이 맞는다.

 삶의 굽이굽이를 제 몸뚱아리로 다 겪고 이겨내온 백전노장 할매의 풍모를 지닌 독.

 여기저기 금 간 자리 때우고 벌어진 곳 얽어맨 채로 여전히 성성하다. 그 성성함은 시간과 상처를 담고 있어서 더욱 찬란하고 장하다. 한피짝에 전시된 게 아니라 여전히 술을 빚어내는 현역이다.

 “할아버지 대부터 써온 독입니다. 얼추 80년이 넘었어요.”

 술도가의 귀한 유산이다. 할아버지(강봉경), 아버지(강인귀)를 이어 3대째 도가를 이어오고 있는 강창훈(64) 대표.

 “도가로서 역사가 100년이 넘지만 증명할 길이 없어요. 낭도가 1914년에 화정면으로 바뀌었어요. 그전에는 옥정면이었죠. 긍께 ‘옥정주조장’이라 그랬어요. 그 이름으로 짐작해봐도 100년이 넘었는데, 증명할 만한 문서자료나 근거가 없어서 아쉽죠. 집안 대대로 이어왔다는 데서도 자부심을 느껴요. 다른 도가들은 팔아넘겨져 주인이 바뀐 경우가 많잖아요.”

 현재 가장 오래된 주조장으로 꼽히는 고양 배다리막걸리는 1915년부터 역사가 시작되었으며 그 뒤를 잇는 경기도 양평의 지평양조장과 경북 영양의 영양양조장은 1925년 문 열었다. 만약 100년이 훌쩍 넘었다면 낭도주조장은 우리나라 최고(最古)의 양조장일 것이다.

“할아버지 대부터 써온 독입니다. 얼추 80년이 넘었어요.” `낭도주조장’ 대표 강창훈씨가 술도가의 귀한 유산 앞에 섰다.

 “이 동우 하나에서만도 막걸리가 엄청나게 나와요. 원액을 희석해서 쓰니까.”

 80여 년의 나이를 잡순 독아지 두 개에서 만들어지는 막걸리는 병으로 따지면 1200개. 독의 용량은 260리터이다. 나머지 두 개의 큰 독도 60년 이상 되었다고 한다.

 예전에는 독에 금이 갔을 때 때우거나 꿰매는 전문가가 있었다.

 “독을 때우는 할아버지가 섬을 순회하며 댕겼어요. 우리 독이 깨졌다 하문 그 할아버지가 와서 고쳐줬어요. 송곳 같은 빼쪽한 연장을 망치로 땅땅땅 뚜들겨서 조심스럽게 구멍을 내고, 집중해서 철심을 박아 쭤매던 모습을 어린 시절에 봤던 게 기억나요.”

 그 할아버지의 손길까지 이 독의 역사 속에 포함돼 있는 것이다.

 배는 불뚝하고 전은 넓어 보기만 해도 후덕하고 넉넉한 독아지. 섬으로 흘러들어와 긴긴 세월을 버티고 있다.

 “예전에는 옹구만 싣고 다니던 돛단배가 있었어요. 보성 벌교에서 출발해 섬마다 돌아다녔죠. 곡식하고 바꽈갖고 독을 사고 그랬어요. 섬 어매들한테는 큰 살림 장만이었죠. 옹구배가 섬에 들어오던 날이면 흥성흥성 하던 그 장면이 지금도 기억에 남아있어요.”

 스텐레스 발효조로 바꾸지 않고 여전히 그가 오래된 이 독을 고집하는 이유가 있다.

 “맛부터 차이가 나니까요. 스텐레스 용기에선 발효가 빨리 돼요. 그 술은 사나흘이면 나오는데 우리는 보통 일주일 정도 숙성시켜요. 시간이 많이 걸려요. 발효기간이 길어지면 그만큼 숙성이 좋죠.”

 나무 당그래도 노장의 풍모를 지녔다. 쉰 살 정도 잡쉈다.

 “계속 휘저어서 섞어줘야 돼요. 그것을 ‘교반’이라 하는데 술이 발효가 잘 되게 하는 거죠. 뽀글뽀글 바글바글 쐬쐬…. 살아 움직이는 소리가 엄청나요. 밑엣것이 욱으로, 욱에것이 밑으로 요동쳐요. 그 살아있음에 늘 경이로움을 느껴요.”
글=남신희 ‘전라도닷컴’ 기자

사진=최성욱 <다큐감독>

※이 원고는 월간 ‘전라도닷컴’(062-654-9085)에도 게재됐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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