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부를 묻자, 파도가 우릴 덮치기 전에
당신은 당신의 역사를 세우고 있는가?

▲ 영화 ‘트루먼 쇼’. 다양한 채널에 수많은 쇼가 벌어지고, 소비자는 클릭 한 번으로 원하는 느낌을 얻고, 방송국은 천문학적인 돈을 번다. 그렇게 수십억 명의 바람이 세상을 만들고 굴러가게 하는 것이다. 우린 소비자인 동시에 노예다.
 영화나 드라마나 소설 속 인물들은 항상 어딘가 조금씩 마음에 안 들기 마련. 백퍼센트 만족스러운 캐릭터는 어디에도 없다. 여기서 왜 그런 감정을 느껴? 저 상황에 왜 그런 말을 해? 좀 더 이렇게 저렇게 할 순 없어? 그래서 난 캐릭터 자체의 설정을 바꿔버린다. 성격에서 심지어 성별까지. 그렇게 업데이트를 거친 캐릭터들이 뇌 속에 저장되고, 뉴런 어딘가에는 조금씩 변형된 주인공들로 가득하다. 만약 이 인형극의 인형이 실제 살아있는 자연인이라면 그건 못할 짓이겠지? 그러나 세상에 못할 짓이란 없다. 더구나 재미를 추구하려면.

 유명인사가 되는 상상을 할 때 사람들은 스타의 행복만을 꿈꾸는 게 아니라 극적인 좌절까지도 욕망한다. 셀럽의 모든 삶을 다 경험하고 맛보고 싶은 것이다. 물론 가능. 혹은 그저 펑펑 울거나 누군가를 깔깔 비웃고 싶다. 더욱 가능. 1번 채널에서는 아이돌 서바이벌이 벌어진다. 혹독한 생존 경쟁에 갇힌 청춘의 꿈을 구경하고 그들의 눈물을 즐기며 꾸며진 파노라마에 감동한다. 2번 채널을 틀면 며칠 전 자살한 영화배우의 장례식이 중계된다. 조문객들의 초췌한 얼굴을 클로즈업하는 카메라 너머로 슬픔을 관음한다. 다시 다른 채널로.

 화면 속 저들의 감정이 지금 내가 느끼는 감정과 똑같을까? 의문이 들지만 금세 지나가버리고 굳이 다시 신경 쓰지 않는다. 나는 원하는 만족을 얻고 채널은 조회수를, 방송국은 시청률을 얻는다. 포털사이트는 최근에 일어난 잔혹한 사건으로 떠들썩하다. 우발적인 살인이었고 순식간에 범행과정이 언론에 낱낱이 공개됐다. 부검의는 자신의 SNS에 끔찍한 범행을 저지른 가해자가 합당한 죗값을 치르기를 호소하면서 피해자의 시체를 지나치게 자세하게 묘사했다. 일부 네티즌들이 피해자와 유족에 대한 존중과 배려가 없는 의사의 직업윤리를 비난했다.

 일련의 사건은 마치 한국의 초상 같다. 극심한 스트레스를 표현하려 ‘암 걸린다’는 과장법이 유행하는 한국의 초상. 한 흥행 영화는 연쇄살인마의 악한 내면을 설명하기 위해 다수의 엑스트라를 다양한 방법으로 현란하게 죽인다. 찝찝한 기분으로 엔딩 크레딧에 수북이 쌓인 ‘여자시체’들을 바라보며, 객석에 있을지도 모를 진짜 피해자의 기분을 짐작해봤다. 인기를 끈 한 드라마는 부잣집 어른들의 참회와 화해에 소녀가장 캐릭터를 서슴없이 악마화하며 죽인다. 하하호호 웃는 마지막화가 그래서 좀 무섭다. 다들 뭔가 전달하고 싶어서 혈안이 됐고 그래서 약간씩 돌았다.

대중은 스포츠와 유흥거리로 역사를 소비한다. 신 혹은 하늘방송의 책임자는 거대한 파도로 모든 것을 휩쓸어버린다. 역사 사파리방송은 영원히 막을 내리고, 사라진 것들은 길 잃은 지파처럼 영원히 떠돈다.
 
▲“마법에 붙들린 듯 화면을 주시했다”
 
 “역사는 온갖 일등급 뉴스와 오락을 제공할 수 있는 마르지 않는 샘물이었다. 텔레비전 방송국들은 즉시 수십억 달러를 투입하여 거대한 크로노트론을 복제하고 편성표를 기획했다. … 1년도 지나지 않아 매주 방영되는 열두어 편의 프로그램이 30억 명의 시청자들에게 제2차 세계대전의 하이라이트 장면을 생방송으로 제공하게 되었다. 매일 밤 지구 어딘가에서는 존 F. 케네디가 딜리 광장에서 총격으로 목숨을 잃었고, 히로시마와 나가사키에서 원자탄이 폭발했으며, 베를린 지하 벙커에서 아돌프 히틀러가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 제임스 그레이엄 밸러드, 지상 최대의 텔레비전 쇼.
 
 가까운 미래에 타임머신이 개발되고 그 최대 수혜자는 텔레비전 방송국이 된다. 생생한 역사의 생방송이 모든 채널을 휩쓸고, 세상사람 죄다 TV를 보느라 전쟁조차 일어나지 않는다. 방송국들은 워털루 전투 방송을 기획하고 조사에 나서나 직접 본 전투가 그 명성에 미치지 못한다. 병력은 알려진 것보다 훨씬 적었으며 내용도 실망스러웠던 것. 그들은 전투에 직접 개입하기로 결정한다. 기술과 자원이 투입되고 화약과 총탄이 공급되며 용병들도 추가 투입되고, 그렇게 다시 치러진 워털루 전투는 상상 이상의 장관을 선보이며 큰 성공을 거둔다.

 이후 모든 역사가 평점을 위해 다시 쓰이기 시작한다. 로마군을 짓밟은 한니발 군대의 코끼리 다섯 마리는 200마리로 불고, 역사적으로 유명한 연설들이 감동을 더하기 위해 편집된다. 이내 방송국은 TV 프로그램에 ‘신성’의 모습을 담기에 도전한다. 이집트를 탈출한 이스라엘 사람들이 홍해를 건너는 장면을 생방송하기로 결정한 것. 이 위대한 기획에 수백 대의 카메라, 수천 명의 스텝들, 추가 파도 방출 장비, 카메라를 지탱하기 위한 둑까지 동원된다. 떠들썩한 혼란 가운데 이윽고 이스라엘 인들이 바다를 건너기 시작한다.
 
 “시청자들은 마법에 붙들린 듯 화면을 주시했다. 많은 이들이 이번에야말로 텔레비전 방송국이 지나친 짓을 한 건 아닌지 걱정하고 있었다. 다음 순간, 아무런 설명 없이 수십억 개의 화면이 일제히 검게 변해버렸다. 대혼란이 일어났다. … 아무것도 방송되지 않았다. 현장 촬영진과의 모든 통신이 끊겼다. 마침내 두 시간 후 짤막한 영상 하나가 화면을 가득 채웠다. 넘실거리는 물결이 부서진 카메라와 연출 장비를 뒤덮는 장면이었다. 강둑에서는 이집트 군대가 발길을 돌리는 모습이 보였다. 반대쪽에는 이스라엘 인들이 안전한 시나이반도로 들어가고 있었다.”
- 제임스 그레이엄 밸러드, 지상 최대의 텔레비전 쇼.
 
▲“다 진짜예요. 약간 통제할 뿐이죠.”
 
 역사가 미래로 나아가는 해답을 준다고들 한다. 그것이 역사를 배우는 목적이라며. 그러나 이 세계에서는 상품으로서의 역사만이 그 가치를 증명한다. 대중은 오직 스포츠와 유흥거리로 역사를 소비한다. 그러나 이스라엘 인들이 무사히 바다를 건넌 순간, 신 혹은 하늘 방송국의 총 책임자는 거대한 파도로 모든 것을 휩쓸어버린다. 그렇게 역사 사파리 방송은 영원히 막을 내리고, 사라진 것들은 영원히 길 잃은 지파처럼 떠돌 테다. 그 다음에는 어떤 역사가 어떤 가치를 지향하며 다시 쓰일까? 역사가 무언지 누구도 모르나 우리를 비추는 거울임은 틀림없다.

 ‘어렸을 때 거기 살았죠?’ ‘이웃집 누가 맡기고 갔고요.’ ‘볼에 곰보자국이 맞아요.’ 더듬더듬 물어가며 알음알음 맞춰가며 감정이 고조되고 이내 울음이 터진다. 이산가족상봉은 시대의 기록이자 생생한 감정의 기록이다. 저때 태어나지 않았는데도 울컥해서는 한참 빠져서 보는데 문득 의문이 든다. 저 사람들 지금은 어떻게 살고 있을까? 인생이 행복하고 순탄하게 굴러갔을까? 몇 십 년 헤어져 있으며 사정도 가치관도 달라진 이들이, 피붙이 정 하나를 붙잡고 그저 화목하게 살아갈 수 있었을까? 필시 남보다 못한 사이가 된 이들도 있겠지. 당연하다. 사람 사는 게 그렇다.

 그러나 떨어진 가족이 다시 만나야 했다는 것은 변함없다. 어떤 미래가 기다릴지 모른다는 건 또 다른 문제고, 국가와 공공기관은 시민을 위해 할 수 있는 것을 해야 하니까. 하지만 상봉 순간 울려 퍼지는 신파 가득한 트로트는 낯부끄럽다. 이미 부둥켜안고 울고 있는 가족을 떨어뜨리고 ‘다시 큐!’를 외치던 카메라맨의 목소리가 창피하다. 애써 변호하자면, 그때 대한민국에는 풀고 가야 할 가슴 속 응어리가 몇 천만 개는 있었다. 그걸 푸는 방법은 시대의 한계이자 최선이었다. 그럼에도 세상은 크게 변하지 않는다. 단지 트렌디하게, 미니멀하게 업그레이드할 뿐.

상봉 순간 울려퍼지는 신파 가득한 트로트. 이미 부둥켜안고 울고 있는 가족을 형해 다시 `큐’. 세상은 크게 변하지 않는다. 단지 트렌디하게, 미니멀하게 업그레이드할 뿐.
 
 “…틀에 갇힌 세상을 살고 있지만 트루먼은 가짜가 아닙니다. 실제 인물의 진짜 인생입니다. 이 프로는 시청자들에게 위안을 주죠. 하나부터 열까지 다 진짜예요. 약간 통제할 뿐이죠.…”
 “너무 혼란스러워. 내가 미친 건지 몰라도 세상이 이상하게 돌아가고 있어.”
 “원래 세상이 그런 거야. 네가 바랐던 일 아냐? 유명해지고 싶어 했잖아.”
 “이건 달라. 모두가 공모한 것 같아.”
- 영화 ‘트루먼 쇼’
 
▲“무슨 권리로 한 아이를 원숭이로 만들었나?”
 
 배우들의 얼굴에 새겨지는 세월의 흔적을 그대로 담은 ‘보이후드’라는 영화가 있다. 내용은 소년과 소녀가 자라고 엄마와 아빠는 늙는다는, 정말이지 별거 없는 인생 얘기. 평론가들의 극찬이니 10년이 넘는 촬영 기간이니 뭐니 보는 내내 지루해 죽는 줄 알았다. 그래서 간단히 ‘니 인생 안물’이라 평했다. 하지만 만약 ‘트루먼 쇼’였다면. 정말로 한 사람의 인생이 오랫동안 TV에 방송된다면 난 틀림없이 몇 번은 구경했을 거다. 답답한 영화관의 불편한 의자에 앉아 보는 영화가 아니라, 주말마다 집에서 가족이나 친구들과 편하게 볼 수 있는 시리즈물이었다면 말이다.

 계속해서 매체에 노출되는 그의 삶을 오랜 시간 지켜보며 끝내는 정도 들었을 것 같다. 남의 인생 훔쳐보는 것에 취미 없다 했지만 사실 난 좀 더 ‘진짜’를 원한 게 아닐까? 더욱 생생하게 보여주는 방식을 취한다면 몇 배 많은 대중이 그 리얼리티 상품을 덥석 물 거라는 오싹한 생각. 이렇게 남의 삶을 구경해서 얻는 것이 뭘까? 생각하니 의외로 많다. 현실 사람들은 트루먼과 함께 삶을 걸었다. 완벽한 가짜를 보면서 진짜 나의 불안정함을 위로받았다. 인생의 숭고함과 위대함은 삶을 살수록 더 느끼기 힘들어진다. 이를 상기시키는 것이 예술이라는 이름의 위선이다.
 
 “무슨 권리로 한 아기를 데려다 동물원 원숭이로 만들었죠?”
 “난 트루먼에게 특별한 삶을 살 기회를 줬어. 세상은 역겨운 곳이지. 씨헤이븐은 천국이야.”
 “트루먼은 새장에 갇혔어요. 당신이 무슨 짓을 했는지 봐요.”
 “그는 언제나 떠날 수 있지만 그러려고 하지 않았어. 마음만 먹으면 진실을 알 수 있는데도 시도하지 않았지. 트루먼이 그런 인생에 익숙하기 때문이야.”
 “…그렇지 않아요. 당신이 틀렸어요. 곧 알게 될 거예요.”
- 영화 ‘트루먼 쇼’
 
 소년이 청년이 될 때까지 사람들은 진실을 적당히 외면하며 감동을 즐긴다. 완벽한 가짜 속 불안정한 진짜인 트루먼은 자신이 인형이라는 것도 모른 채 인형극을 수행한다. 폭풍을 뚫고 닿은 스튜디오 벽 문 앞에서 마주한 진실. 소년 혹은 아기일지도 모를 청년은 망설이다 모두에게 작별인사를 하고 문 밖으로 나간다. 이후 그의 삶이 어떻게 펼쳐질지 아무도 모른다. 그러나 설령 미래가 비관으로 가득 차더라도 그는 거기서 나와야 했다. 우리의 모든 비극은, 인생의 숭고함과 자기의 위대함이 수신료 몇 푼으로 쉽게 주어지지 않는다는 것. 그럼에도 막은 내려야 하기에.

 고민과 사색은 인기 없어진 지 오래. 빠르게 감정을 해소하고 효과적으로 감동을 느끼면 어느새 인생이 살아진다. 하지만 그렇게 완성된 인생이란 작품이 차고 널린 모조품 혹은 프렌차이즈일 것 또한 확실하다. 거대한 소비관계가 모두를 얽었으므로 거부는 쉽지 않다. 우린 어느 정도 그 사실을 받아들이고 때론 모른 척 하며 살고 있다. 감정 해소 자체는 결코 나쁜 게 아니다. 살려면 꼭 해야 하는 아주 중요한 행위. 그런데 그 방법을 나 아닌 다른 무언가가 관장한다면 그건 자아 의탁이다. 무엇이 진짜이고 가짜일까. 어디까지가 옳고 그른 걸까. 구분이 쉽지 않다.

 내가 이상한 것을 바라면 나만 이상한 사람이 되지만, 다수의 이상한 신념은 세상의 모양을 이상하게 만든다. 세상은 지금 뭘 바라고 있나? 그것을 우리는 다시 요구받는다. 세상이 미칠수록 나도 미친다. 마치 쌍방향의 파도가 이는 거대한 폭풍우. 다양한 채널에 수많은 쇼가 벌어지고, 소비자는 클릭 한 번으로 원하는 느낌을 얻고, 방송국은 천문학적인 돈을 번다. 그렇게 수십억 명의 바람이 세상을 만들고 굴러가게 하는 것이다. ‘우린 노예야!’ 라고 말하면 ‘무슨 소리, 우린 소비자야!’ 라는 성난 대답이 돌아온다. 둘 다 맞는 말. 우린 소비자인 동시에 노예다.
 
▲부풀어 오른 이미지 속 자아는 초라해지고
 
 “당신은 누구죠?”
 “난 수백만 명에게 희망과 기쁨을 주는 프로를 만들지.”
 “그럼 난 누구죠?”
 “자넨 스타야. 자넨 진짜야. 세상에 진실은 없지만 내가 만든 이곳은 다르지. 세상은 거짓말과 속임수뿐이지만 이 곳에선 두려워할 게 없어. 난 누구보다 자넬 잘 알아. 자넨 떠나지 못해. 자넨 여기 속해 있어.”
 “…못 볼지 모르니 미리 인사하죠. 굿애프터눈, 굿이브닝 굿나잇.”
- 영화 ‘트루먼 쇼’
 
 가을날 빨간 단풍을 보고 어떤 문인은 창녀 어쩌구 하며 시를 쓴다. 계절에 맞춰 붉어질 뿐인 단풍은 얼마나 억울할까? 실은 나도 때로 단풍의 붉음을 오해했다. 그리고 아직도 그때그때 내 감정에 따라 뭔가를 소비한다. 예전에 좋아한 영화를 보면 그래서 좀 부끄럽다. 왜 ‘혐오스런 마츠코의 일생’이나 ‘어둠 속의 댄서’ 같은, 불행 전시 영화들 있잖아. 그걸 보고 펑펑 우는 나는 그렇게까지 불행하지 않은 걸. 인간은 단풍이 어떤 곡절로 붉어지는지 알 수 없다. 그렇다고 오해로 쓴 끼적임이 시가 되진 않는다. 내 소비가 착한 짓이 아닌 것도 변함없다.

 영상을 터치해 재생시키는 짧은 순간에 느끼는 죄책감, 그 찰나의 꺼림칙함에 이젠 모두 익숙하다. 즐기는 세상이다. 그러나 한껏 부풀어 오른 이미지들 속에서 자아는 더욱 초라해진다. 세상에 더욱 요구하면서도 그 빛을 따라가지 못해 불행해진다. 파도가 오기 전에 할 수 있는 것을 해야 한다. 놓치지 말아야할 것들을 세어보자. 포기하지 말아야할 것들을 되뇌어보자. 그리고 안부를 묻자. 굿모닝! 오늘도 안녕하신가요? 당신의 진짜 감정을 마주하고 있나요? 당신의 진정한 역사를 세우고 있나요? 물을 수 있는 것은 물어야 한다. 설령 파도가 우리를 덮치더라도.
김연우 <조선대 국문과 4년, 인문학공간 소피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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