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훈의 상속자만 적통 목장을 쥘 수 있다
정체성의 획득과 권력의지의
폭발, 그리고 시민의 탄생

▲ 1987년 사람들은 무기력한 노동을 멈추고 거리로 나와 정치를 하기 시작했다. 정치적 자유와 민주주의를 외치자마자 그들은 시민으로 태어나기 시작했다.
 햄릿 : 멈추어라. 도대체 나를 어디로 데려가는 것이냐? 나는 이제 더 이상 가지 않겠다.
 유령 : 들으라. 나는 다시 유황불에 몸을 맡기러 돌아가야 하노니, 내 말을 들으라.
 햄릿 : 말하시오.
 유령 : 복수를 해다오.
 햄릿 : 뭐라고?
 유령 : 밤에는 정처없이 방황하고, 낮에는 굶주리며 갇혀있다. 생전에 내가 저지른 더러운 죄, 불로 씻어 없어질 때까지. 아들아, 네가 진정 이 아비를 사랑한 적이 있다면 이 흉악무도한 살인의 원수를 갚아다오.
 햄릿 : 오, 하느님. 살인이라니요? 그게 무슨 말입니까?
 유령 : 나는 나의 아름답고 평화로운 정원에서 죽음을 당했노라.
 햄릿 : 독사에게 물려...
 유령 : 명심하라, 네 아비의 목숨을 앗아간 독사가 지금 왕관을 쓰고 있음을. 아들아, 너에게 효성이 있다면 참아선 안된다. 사랑하는 내 아들아, 부디 나를 잊지 말아다오.
 햄릿 : 아버지!
 - 윌리엄 셰익스피어의 <햄릿>
 
▲적통을 계승하는 자의 덕목, 권력의지
 
 아버지와 아들의 만남이 슬프고 고통스럽다. 죽어버린 아버지와 살아남은 아들의 만남만으로도 그러할진대, 이 무슨 청천벽력같은 소리인가. 아비가 죽었는데 그냥 죽은 것이 아니고 살해당했으며, 그 살해자는 지금 왕관을 쓰고 있다니. 나아가 유령으로 나타난 아버지는 살아있는 아들에게 복수를 외치고 있다. 상속자는 유령(幽靈)의 유훈(遺訓)을 받들 것인가?

 마태복음 1장 2절에는 ‘아브라함은 이삭을 낳고, 이삭은 야곱을 낳고, 야곱은 유다와 그의 형제를’ 쭈욱 낳았다고 기록되어 있다. 아브라함의 후손이요 다윗의 후손인 예수의 족보를 중요하게 여겼던 탓인지 마태복음은 이 사실을 복음서의 맨앞에 실었다. 족보라는 것이 대개 남성중심적인 기록이지만 마태복음 1장의 족보 서술에 남자들이 모두 다 들어간 것은 아니다. 아브라함의 큰아들도 이삭의 큰아들도 장자권을 상속받지 목했을 뿐만 아니라 복음서에서조차 홀대받고 있다.

 아브라함의 장자는 이삭이 아니다. 이삭은 아브라함의 부인인 사라의 몸에서 난 찻째 아들이지만 아브라함에게는 둘째 아들이다. 사라가 늙도록 아이를 낳지 못하자 사라의 몸종인 하갈과 동침하여 낳은 이스마엘이 첫째 아들이다. 시대적 배경과 문화적 관습으로 당연히 아브라함의 장자권은 적통인 이삭에게 주어졌고 그 땅에서마저 버림받은 하갈과 이스마엘은 멀리 떠난다.

 이삭은 리브가와 혼인하여 아들 쌍둥이를 낳았는데 먼저 나온 놈이 에서요 나중 나온 놈이 야곱이다. 서자가 아닌 적자가, 차자가 아닌 장자가 상속을 받는 법이어서 비록 쌍둥이이긴 했으나 순리대로라면 먼저 나온 에서가 이삭의 목장(牧杖)을 물려받아야 했다. 하지만 에서는 상속권에 눈먼 동생 야곱의 ‘상속 사기극’에 걸려 장자권을 상실한다.
무분별한 분노와 우발적 살인, 지나친 멜랑콜리와 과도한 자기연민은 개인의 안위도 국가의 존립도 위태롭게 하는 비극을 부르고야 말았다.

 인류가, 엄밀히 말하자면 인류 중 힘센 집단이 계급사회를 만들고 그 달콤한 시스템을 유지시키기 위해 만든 또다른 하위 시스템들은 많다. 남성주의를 기반으로 하는 성(性) 불평등, 군대와 감옥이라는 강제적이고 폭력적인 물리력, 정통성을 확보하기 위한 신성(神聖) 스토리로서의 신화, 지속성을 담보하기 위한 세속(世俗) 제도로서의 법률 등이 바로 그것이다. 이 모든 것들은 시대와 문화에 따라 그 순서나 중요도가 달라지긴 하나 보편적으로 예외없이 적용되었다. 여기에 빠지지 않는 중요한 하위 시스템이 있으니 혈통주의와 세습이다.

 가문을 잇든 왕조를 잇든 모든 상속자들은 운명적으로 권력자가 된다. 권력욕이라는 것이 사회적 욕망이긴 하나 지배하려는 본능과 무관하지 않아 상속권이라는 재물을 두고 서로 경쟁할 수밖에 없지만, 강고한 제도와 관습의 힘은 무척이나 강력한 것이어서 상속에서 배제된 자들의 시기와 원망을 잠재우고 그 위력을 면면이 이어왔다. 그래서 서자 아닌 적자와 차자 아닌 장자는 숙명적으로 권략의지를 가진 존재이며, 태생적으로 기질이나 성향상 권력의지가 없다 하더라도 후천적 교육을 통해 적장자로서의 권리와 의무를 갖는 존재가 된다.
 
▲정체성의 자각, 나는 누구여야만 하는가

 덴마크의 왕자는 선왕의 유훈을 따를 것인가? 느닷없이 유령으로 나타난 선왕의 뒤늦은 유지(遺志)는 복수다. 복수의 대상은 명백하다. 자신을 살해하여 왕위를 찬탈한 클로디어스를 죽이는 것이다. 여기서 질문 하나 던지자. 선왕이야 억울하게 죽었으니 복수하고 싶은 심정이 당연하겠지만 왕자 햄릿은 왜 그 복수를 실행해야 하는가? 선왕의 아들이니까 당연한 의무 아니냐고? 오로지 아버지의 원수를 갚는 일 하나만이 그의 책무일까? 아들의 정체성은 부모의 유지를 받드는 것이니 이는 당연해 보인다. 그런데 햄릿은 왜 고뇌하는가?
 
 아들아, 내가 만약 이야기를 꺼낸다면 가볍디 가벼운 이야기로 내 영혼을 갈기갈기 찢어놓고, 젊은 피를 얼게 하며 머리카학 한올한올을 성난 고슴도치 바늘처럼 세울 수 있으리라. 나를 죽인 그 짐승이 마력과 같은 기지와 반역하는 재주로 가장 순결해 보이는 내 왕비의 욕망을 얻어냈다. 햄릿, 얼마나 형편없는 타락이더냐? 나는 그놈 손에 내 생명, 내 왕관, 내 왕비를 한꺼번에 빼앗겼으니 이 얼마나 무서운 일이냐?
 - 윌리엄 셰익스피어의 <햄릿>
 
 유령은 지금 사사로운 복수를 요구하고 있는 게 아니다. 선왕의 유령이 반복적으로 내뱉는 언어 때문에 개인의 억울한 죽음만을 이야기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복수는 개인의 한풀이에 머물지 않는다. 선왕의 정체성은 아버지에 국한되지 않고 아버지이면서 왕이다. 햄릿의 정체성은 아들에 국한되지 않고 아들이면서 왕자다. 결국 유령이 말하는 복수는 개인적 정의(情誼)를 지키는 것을 넘어 사회적 정의(正義)를 실현하는 복수다. 아들 햄릿은 개인 윤리를 위해 복수해야 하고 또한 사회 정의를 위해 복수해야 한다. 그래서 선왕의 복수(復讐)는 복수(複數)다. 햄릿의 고뇌는 이 두 정체성의 괴리로부터 출발한다.

 역사를 보면 정체성의 회복을 위해 고군분투한 사람들을 드물지 않게 본다. 고구려의 두 번째 왕 유리의 등극은 순탄치 않았다. 부여의 혈통이었던 아버지 주몽이 부여 내부의 권력투쟁에서 패배하고 망명하자 유리는 홀어머니와 함께 부여에서 볼모로 살아간다. 망명객 주몽이 변방의 소부족 소서노 세력과 연합하여 국가를 세우자 유리는 부여를 탈출해 아버지의 나라로 간다. 고구려로 떠나는 유리의 여정은 즐거운 여행이 아니고 고난의 길이다. 부여로부터의 탈출도 죽음이요 고구려로의 입성도 죽음이다. 이미 고구려에는 막강한 건국세력이 왕비라는 이름으로 그리고 왕자라는 이름으로 우뚝 서 있다. 유리는 옳고 그른 윤리의 문제를 떠나 왕의 혈통이라는, 그리고 왕의 적통이라는 정체성을 내세워 권력투쟁을 통해 승리하고 왕위에 오르는 것이다.

 그리스신화에 등장하는 이올코스의 왕자 이아손도 유리왕처럼 정체성 찾기의 전형으로 꼽힌다. 숙부 펠리아스의 반란으로 아버지를 잃고 망명을 하지만 영웅으로 성장한 그는 탈취당한 왕위를 되찾기 위해 귀국한다. 이아손은 의도적인 신발 분실을 통해 대중 앞에 본인의 신분(정체성)을 드러냄으로써 정체성의 회복이라는 강력한 의지를 드러낸다. 아무리 영웅이라고는 하지만 국가권력을 장악한 숙부를 어찌 불알 두 쪽으로 상대하겠는가? 절대적으로 불리한 싸움에서 참요(讖謠)라는 정치공작과 위험에 노출되는 정체성 드러내기의 권력의지가 없었다면 그는 성공할 수 없었을 것이다.
 
▲비극은 모호한 정체성과 빈약한 권력의지
 
 햄릿의 진짜 문제는 무엇일까? 정체성의 혼돈과 권력의지의 부재가 비극의 진짜 이유다. 권모술수와 정치공작이 난무하는 궁중에서 왕과 왕자는 호시탐탐 그들의 목을 노리는 정적들의 음험한 눈빛과 마주해야 한다. 조금만 방심하면 자객의 칼이 목을 뚫고 맹독의 잔이 입술로 다가온다. 아버지의 갑작스런 죽음을 놓고 아무런 의심을 품지 않은 건 보위를 이을 왕자로서의 명백한 결격사유다. 건강했던 왕이 정원에서 평화롭게 낮잠을 자다 급서(急逝)한 사건을 순순히 받아들이는 얼간이같은 왕자가 세상천지에 어디 있는가? 설령 왕의 서거(逝去)가 누군가의 음모에 의한 것이 아니었다 해도 선왕의 적통으로서 본인이 정당한 후계임을 명료하게 드러내고 이를 실행하려는 권력의지를 보였어야 했다. 유령의 고백을 듣고서도 굳이 다시 확인하려는, 치밀성으로 포장된 비텐베르크의 서생(書生)다운 연약성만 표출할 뿐이다.

 햄릿은 아들의 정체성에만 충실할 뿐 왕자의 정체성은 없다. 그는 숙부가 왕위에 오른 것에 불만이 없다. 오로지 그의 분노는 놀랍도록 잽싼 어머니의 개가(改嫁)에 쏠려 있다. 아버지의 침실을 더럽혔다며 분개하는 그의 육체적 청년의 정체성과 어머니를 또 빼앗겼다며 절망하는 그의 정신적 소년의 정체성이 충돌하여 발산되는 건 징징대는 마마보이 청년일 뿐, 왕위를 받아야 할 왕자로서의 면모는 하나도 없다.

 왕자로서의 정체성을 인식하지 못하고 권략의지 또한 없으니 사회 정의는커녕 개인 윤리조차 지켜내지 못한다. 무분별한 분노와 우발적 살인, 지나친 멜랑콜리와 과도한 자기연민은 정적의 의심과 우호세력의 이탈을 불러, 결국 개인의 안위도 지키지 못하고 국가의 존립도 위태롭게 하는 비극을 부르고야 만다.
자기를 행복하게도 하고 불행하게도 하는 정치를 자기와 무관하게 생각하지 않는 것, 늘 정치에 개입하면서 민주적 제 권리를 보호하고 확장하는 일에 관심을 두는 것, 이것이 바로 시민의 정체성이다.
 
▲호모 폴리티쿠스와 이디오테스 사이의 시민

 Idiot(이디어트). ‘바보, 멍청이, 백치’. 이 말의 어원은 헬라어 이디오테스(idiotes)에서 나왔다. 이디오테스는 ‘공동체에서 멀어진 사람’을 가리키는데 정치에 무관심한 사람을 조롱하는 말이다. 민주정치를 시행했던 고대 그리스의 정치는 시민권을 가진 성인 남자들만의 전유물이었으니 대단한 특권이었고 이 특권을 누리는 행위는 당연하게도 자부심이요 즐거움이었다. 하지만 아무리 헬라스적 기질에 충만한 폴리스의 떠벌이 남자들이 우글거린다 할지라도 정치에 무관심하고 조용하게 살고픈 사람은 있게 마련이다. 정치의 광장인 프닉스에 좀처럼 나타나지 않는 사람들은 그렇게 부지런한 사람들로부터 욕을 바가지로 먹었다.

 Homo politicus(호모 폴리티쿠스). 정치적 동물로서의 인간. 인간의 정체성 중 하나다. 사회를 이루고 살아가는 모든 생명체들은 그 사회의 유지와 영속적 존립이라는 목표를 달성하기 위한 모든 수단을 창조하고 개선하는 일을 반복하는데, 이러한 행위와 총체를 정치라고 한다. 무인도의 두 남자 로빈슨과 프라이데이조차 정치를 했으니 다수가 사는 인간 사회야 두말할 나위가 없겠다.

 Citizen(시티즌). 시민의 권리와 의무가 무엇인지를 자각하고 시민의식에 투철한 사람. 시민이란 서울시나 부산시나 광주시에 사는 행정구역 안의 거주민을 말하는 것이 아니고, 정치 경제 사회 문화의 모든 영역에서 자유롭고 예속되지 않으며 보호받고 안전하게 살아갈 권리를 갖는 모든 사람들을 일컫는 말이다. 사회를 이루고 살아가는 집단이 절멸하지 않는 한 유지의 가장 유효한 수단인 정치는 불멸할 것으로 보이며, 호모 사피엔스가 계발하고 현대의 거의 대부분의 국가가 채택하고 있는 정치의 한 수단인 이데올로기로서의 민주주의는 당분간 사라지지 않으리라.

 시민의 정체성이란 무엇인가? 자기를 행복하게도 하고 불행하게도 하는 정치를 자기와 무관하게 생각하지 않으며, 직접적으로든 간접적으로든 늘 정치에 개입하면서 민주적 제 권리를 보호하고 확장하는 일에 관심을 두는 것, 이것이 바로 시민의 정체성이다. 시민이 시민의 정체성을 잃을 때 비극이 시작된다는 것을 우리는 덴마크의 어리석은 왕자로부터 배운다.
 
▲아름다운 유월 거리에서의 시민의 탄생
 
 1987년 한국의 광장과 거리에서 시민은 스스로 폭발적으로 탄생했다. 뒤늦은 근대화와 제국주의 지배하의 식민지, 청산되지 못한 과거와 분단, 두 번에 걸친 민주화의 꿈과 두 번에 걸친 쿠데타는 정치와 민주주의의 부재였고 따라서 시민도 존재할 수 없었다. 그때까지도 한반도의 사피엔스는 왕조의 백성이었고 황국의 신민이었으며 불령(不逞)한 민중이었다. 때가 다가왔음인지 사람들은 무기력한 노동을 멈추고 거리로 나와 정치를 하기 시작했다. 정치적 자유와 민주주의를 외치자마자 그들은 시민으로 태어나기 시작했다.

 햄릿은 마지막 순간까지도 덴마크의 왕자로 돌아오지 못했다. 자기를 죽이려는 숙부 클로디어스의 흉계를 알고 돌아오지만 사랑하는 연인 오필리어의 죽음과 레어티즈와의 결투에 휘말려, 다시 돌아온 목적을 망각하고 칼싸움에 몰입하다 친구도 잃고 어머니도 잃고 자기도 죽는다. 비분강개와 열정은 일을 성사시키기도 하지만 일을 망치기도 한다. 왕자로서의 정체성 부재와 희박한 권력의지는 개인 윤리도 사회 정의도 지켜내지 못했다. 무의미한 분노와 무의미한 포효와 무의미한 열정은 햄릿의 철학 없는 고뇌 때문이다.
 
 사람들은 자신의 존졍을 받을 만한 정부가 어떤 것인지를 분명히 밝혀야 한다 우리는 먼저 인간이어야 하고 그 다음에 국민이어야 한다고 나는 생각한다. 법에 대한 존경심보다는 먼저 정의에 대한 존경심을 기르는 것이 바람직하다. 내가 떠맡을 권리가 있는 나의 유일한 책무는 어떤 때이든 내가 옳다고 생각하는 일을 행하는 일이다. 만일 우리가 자유롭게 사색하고 자유롭게 공상하고 자유롭게 상상할 수 있다면, 그리하여 존재하지도 않은 것이 존재하는 것처럼 보이는 일이 결코 오래 지속되지 않는다면 현명치 못한 지배자나 개혁자가 우리를 치명적으로 괴롭힐 수는 없을 것이다.
 - 헨리 데이비드 소로우의 <시민의 불복종>
 
 국민의 정체성보다 인간의 정체성이 왜 우선되어야 하는지를 아는 것과 나의 존경을 받을 만한 정부의 정체성이 어떠해야 하는지를 아는 것은 바른 시민의 옳은 덕목이다. 현명치 못한 지배자로부터의 부당한 억압에 맞서 정의를 지키고 자유를 수호하려는 의지 또한 바른 시민의 옳은 덕목이다. 1987년의 거리에서 이런 시민들이 탄생했다. 그리고 그 시민들이 촛불을 들어 또다른 시민혁명을 성공시켰다. 6월은 시민이 태어난 아름다운 계절이다.
김시인 <인문학공간 소피움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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