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유로운 나는 가능한가

▲ ‘매트릭스3-레볼루션’ 중 네오.
 살펴보면 나는
 나의 아버지의 아들이고
 나의 아들의 아버지이고
 나의 형의 동생이고
 나의 동생의 형이고
 나의 아내의 남편이고
 나의 누이의 오빠고
 나의 아저씨의 조카고
 나의 조카의 아저씨고
 나의 선생의 제자고
 나의 제자의 선생이고
 나의 나라의 납세자이고
 나의 마을의 예비군이고
 나의 친구의 친구고
 나의 적의 적이고
 나의 의사의 환자고
 나의 단골 술집의 손님이고
 나의 개의 주인이고
 나의 집의 가장이다.
 그렇다면 나는
 아들이고
 아버지고
 동생이고
 형이고
 남편이고
 오빠고
 조카고
 아저씨고
 제자고
 선생이고
 납세자고
 예비군이고
 친구고
 적이고
 환자고
 손님이고
 주인이고
 가장이지
 오직 하나뿐인
 나는 아니다.
 
 과연
 아무것도 모르고 있는
 나는
 무엇인가?
 그리고 지금 여기 있는
 나는
 누구인가?
 - 김광규, ‘나’
 
▲세기말을 정리한 영화 매트릭스
 
 모피어스: 자네는 평생 동안 세상이 뭔가 잘못되어 있다고 느껴왔네. 그게 뭔지는 몰라도, 자네 마음속에 가시처럼 박혀 자네를 미치게 만들지. 매트릭스는 모든 곳에 있어. 항상 우리 주변에 있고 심지어 이곳에도 있다네. 창밖을 쳐다볼 때, TV를 켰을 때도 볼 수 있지. 회사에 출근했을 때, 교회에 갈 때, 세금을 낼 때도 매트릭스의 존재를 느낄 수 있지. 매트릭스는 자네가 진실을 볼 수 없도록 하기위해 자네 눈에 씌워진 거짓 세상이야.
 
 네오: 무슨 진실이요?
 
 모피어스: 자네가 노예라는 사실. 다른 모든 사람들과 마찬가지로 자네는 맛볼 수도, 맡을 수도, 만질 수도 없는 감옥에서 태어났어. 자네의 정신을 감금한 감옥에서 말이야. 불행하게도, 매트릭스를 말로 설명하는 것은 불가능해. 직접 보는 수밖에 없네. 마지막 기회야, 알고 나면 예전으로 돌아갈 수 없어. 파란 알약을 먹으면 여정이 여기에서 끝난다네. 침대에서 다시 깨어나 자네 믿고 싶은 대로 지금처럼 계속 살아가면 돼. 하지만 빨간 알약을 선택하면 여정이 계속 이어지고, 토끼굴이 얼마나 깊게 내려가는지 내가 보여 주지. 내가 자네에게 제안하는 건 진실뿐일세.
 
 1999년 워쇼스키 남매가 발표한 영화 ‘매트릭스’는 ‘어벤저스 엔드게임’으로 대단원의 막을 내린 어벤저스 시리즈만큼이나 20세기 말 영화계를 뒤흔들었다. 개봉 후 20년이 지났으며 당대의 기술적 한계로 조야함이 느껴지는 몇몇 CG 장면에도 불구하고 매트릭스는 여전히 현대적인 혹은 미래적인 영화다. 매트릭스는(matrix)는 세 가지 의미를 가졌다. 수학적으로는 숫자와 기호 등이 가로 세로로 나열된 행렬, 사회학적으로는 한 사회와 개인이 성장하고 발달하는 모체, 그리고 그물처럼 엮여있는 도로망도 매트릭스다. 워쇼스키 남매가 감독 연출한 영화 매트릭스는, 낮에는 프로그래머로 밤에는 해커로 자유롭게 살아가던 주인공 네오가 자신이 살고 있는 20세기가 실은 고도로 발달된 인공지능이 구현한 사이버 세계임을 자각하며 시작된다. 20세기에 시작된 인공지능 개발은 영화적 환경인 22세기에 이르러 극대화되면서 마침내 인간의 지능과 정신을 뛰어넘은 인공지능이 나타났다.

 욕망을 멈추지 않는 인간, 지적 호기심을 위해 인간 이외의 환경은 아랑곳하지 않으며 한 종이 멸절위기에 처할 무렵 종 보존이라는 명목으로 보호구역을 설정하는 인간. 인공지능이 그런 인간을 적이자 ‘바이러스’로 인식할지 모른다는 두려움에 인공지능을 상대로 전쟁을 일으킨 인류는 열세에 놓이자 핵을 쏘아 올려 태양빛을 차단해버린다. 태양열은 인공지능들이 연료로 삼고 있는 유일한 에너지원이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태양은 인간을 포함한 모든 생명의 근원, 빛을 가리는 일은 자멸의 길. 세상이 암흑으로 뒤덮이자 인공지능들이 존속을 위해 선택한 방법은 인간의 생체에너지를 자신들의 연료로 대체하는 것이었다. 수백만의 인간은 초록 캡슐 속에 웅크린 채로 안전하고 평화로운 일상이 구현된 이미지를 뇌에 주입받으며 실제로는 영원한 꿈일 뿐인 영상대로 자신들이 살아가고 있다고 믿는다. 주인공 네오는 인공지능이 구현한 시스템에 대한 면역력이 없는, 잠에서 깨어나 시스템을 거부하는 소수의 인간들 중 한 명으로 인류를 구원할 ‘The one’ 지도자로 그려진다.
‘매트릭스3-레볼루션’ 중 기계도시.
 
▲파란 약을 먹을까, 빨간 약을 먹을까

 그러나 인공지능이 구성한 허구적 세계는 달콤하고 매트릭스 바깥의 세계는 황폐하며 열악하다. 빛이 없는 진짜 세계에서 인간의 식사는 콧물과 비슷한 단백질 합성물, 잠자리는 낡고 거친 모포 한 장이며 쪽잠 속에서도 긴장을 늦출 수 없도록 로봇군단은 깨어난 인류를 감시하고 옥죈다. 파란 약을 먹으면 매트릭스 안에서 꿈꾸던 그대로 잘 나가는 천재 해커이자 프로그래머라는 정체성을 가지고 살 수 있다. 빨간약을 먹으면 진실을 알게 되지만 불확실성 가득한 위험천만한 세계에서 살아가야 한다. 영화를 보며 생각했다. 나라면 어떻게 할까?

 그러다 문득 창세신화가 떠올랐다. ‘허구라는 천국과 실재라는 사막’ 모티브는 영화 매트릭스가 처음이 아니다. 성경이 이야기하는 최초의 인간 아담과 하와가 살던 에덴동산은 신이 인간을 위해 조성한 일종의 매트릭스이자 무균질의 세계다. 에덴동산의 사자들은 사슴과 한데 누워 쉬고 인간은 아무런 걱정과 고민 없이 영원히 순수한 상태로 정원을 거닌다. 그러나 이브는 신이 장막을 둘러쳐 알지 못하게 하려던 세계의 나머지 반쪽을 알기를 원했다. 이브가 선악과를 한 입 베어 문 순간 처음 알게 된 것은 부끄러움이었다. 벌거벗은 너와 나의 몸의 차이가 그제야 눈에 들어온다, 분별의 시작이다. 부끄러워 나뭇잎으로 몸을 가렸다, 스스로 해 입은 최초의 옷이다. 하나님이 일방적으로 먹지 말라 금지하긴 했으나 어쨌든 약속을 어겼다는 죄의식과 벌 받을지 모른다는 두려움이 엄습한다. 강렬하며 복합적인 감정의 체험이다.
‘매트릭스3-레볼루션’ 중 스미스.

 사건 이후 아담과 이브가 받은 벌은 에덴동산에서의 영원한 추방. 에덴동산 바깥에서 이브는 산고의 고통을 겪으며 카인과 아벨을 낳고 아담은 피땀으로 땅을 일궈 가족을 부양해야 한다는 벌을 받았다. 그들 추방의 결과가 지금 살고 있는 이 세계의 모습. 그러나 나는 만약 신께서 “아담과 이브의 후예들아, 3000년 동안 벌을 받았으니 다시금 에덴동산으로 돌아와 살지 않겠느냐?”는 제안을 하신다면 ‘아니오’라는 불손한 답을 할 것 같다. 에덴의 세계에는 선택의 가능성이 없다. 나를 걸고 내려볼만한 결단의 기회도 없다. 에덴에서 나는 내일 펼쳐질 시간에 오늘 나의 행동이 기여하고 있다는 주체적 자각을 할 수도, 노력에도 불구하고 다른 결론에 이를 수 있다는 불확실성에 겸허해질 기회도 갖지 못한다. 에덴에서 나는 신의 창조물, 어제의 나와 오늘의 내가 같다는 자의식조차 없는 채로 늙지도 죽지도 않고 영원히 살아갈 것이니 그것은 실체로서의 인간이 제거된 모조적 삶일 것이다. 사람은 무엇보다 경험을 원한다. 그가 이르고자 하는 목표가 영적 깨달음이라 할지라도 스스로 통과하여 도달한 깨달음이어야 한다. 주어지는 열락은 얼마나 허망한가. 따라서 불명확하고 불완전한 삶일지언정 ‘온전한 실재’라는 사막을 선택하겠다. 나 또한 네오처럼 빨간 약을 먹고 깨어날 것이니.
‘매트릭스3-레볼루션’ 중 네오와 스미스의 대결.
 
▲우리는 살아간다

 불완전하다는 자각이 사람을 불행하게 만들지는 않으니 사람을 타락하게 하는 건 도리어 완전해지고 싶다는 욕망이다. 완전에의 욕망이야말로 ‘아리안 우월주의’니 ‘내 말이 곧 법’이니 하는 강고한 오만으로 치닫지 않던가. 영화가 개봉되고 난 후 2003년 전 세계의 내로라하는 전현직 철학자 17명이 의기투합하여 ‘매트릭스로 철학하기’라는 책을 내놓았다. ‘매트릭스로 철학하기’가 흥미로운 건 선과 악·진실과 거짓·가상과 실재를 윤리적으로 재단해 ‘어떤 선택이 옳은가’ 묻거나 어떤 선택을 더 좋거나 더 나쁜 것으로 위계 짓지 않고 철학적 담론을 에세이로 이어간다는 점이다. 가령 나는 ‘빨간 약’파임에도 불구하고 파란 약을 옹호하는 어느 철학자의 말에 매혹되었다.
 
 우리는 책상을 생각할 수는 있지만 책상을 생각하는 주체를 생각할 수는 없다. 즉, 의식의 대상은 발견하지만 의식하는 주체는 발견하지 못한다. 말하자면 의식은 투명한 그림 같다. 의식의 대상으로부터 의식 자체를 분리해내려고 하면 우리는 의식의 대상에 도달하는데 실패한다. 나아가 비트겐슈타인은 “어떤 발상들을 고려하거나 생각하는 주체 같은 것은 없다.”고 단언한다. 그렇다면 우리가 그동안 의식의 주체라고 가정해온, 전통적인 의미의 자아는 없다는 말인가? 자아가 없다면 우리는 매트릭스의 선악을 판단할 수 없게 된다. 매트릭스는 환상의 세계를 생산할 뿐이다. 부도덕의 세계를 생산하는 것이 아니다. 이로써 네브카르네자드 대원들(매트릭스에 대항해 싸우는 무리)은 충분히 영웅적이지만, 충분히 도덕적이지는 않다. - 대니얼 버윅
 
 내게 영화가 제기하는 또 다른 자극은 ‘매트릭스’라는 용어가 같은 함의와 상징이다. 영화 속에서 매트릭스는 우리가 인식하지 못하는 배경으로 존재하며 서서히 인간의 자유와 생체에너지를 빼앗는다. 네오를 깨우러 온 모피어스의 말처럼 자율성과 생명에너지를 빼앗는 매트릭스가 곳곳에 있다면? 창밖에, 텔레비전을 켤 때, 회사에 출근했을 때, 심지어 세금을 내는 순간에도 보이지 않는 매트릭스가 존재한다면? 이 세계의 매트릭스는 인공지능들처럼 뇌에 거짓 세상을 씌우는 방법이 아닌 단지 시스템의 진실을 함구하는 것만으로도 충분이 유지된다.

 언제부턴가 돌덩이가 등에 얹힌 양 불편했다. 등은 자라목처럼 둥글게 휘고 오른쪽 어깨와 왼쪽 어깨는 누가 걸터앉아 시소라도 타는지 몸의 중심이 균형을 잃었다. 직업병이다. 25년 동안 컴퓨터 화면을 바라보며 자판을 두들기거나 자료를 읽고 모으는 일을 하다 오늘은 문득 손에 침을 묻혀가며 치부책을 넘기던 『크리스마스 캐럴』 속 스크루지 노인이 떠올랐다. 내가 하는 일의 의미와 가치를 곱씹고 되새김질하지 않은지 이미 오래, 묵은 시간이 만든 몸의 관성은 무의식적으로 그리고 무목적적으로 해온 일을 계속한다. 타타탁 탁탁탁. 이렇게 탐욕스럽다면야 돈을 모으는 일과 지식을 모으는 일이 무엇이 다른가. 나는 대체 지금 여기 왜, 앉아있는가. 어찌됐던 하던 일이나 마저 하고 생각은 나중에 하자는 ‘사유의 게으름’이 또 스멀스멀 피어오른다. 그러나 나중은 없다. 어서 ‘빨간 약’을 먹고 너의 세계를 관찰하라고, 『매트릭스로 철학하기』가 책장에서 나를 빤히 본다.

 돌이켜보니 ‘이 정도면 충분해’ 라던가 ‘그 때는 어쩔 수 없었잖아’ 라는 자위적 되새김들도 내가 나에게 씌워준 매트릭스였다. 나란 인간은 존재를 지탱하는 환상의 버팀목으로서 자기 위안의 매트릭스 혹은 도덕적 매트릭스가 필요한 걸까. 좋다, 솔직해지도록 하자. 내가 매트릭스로 철학하기를 읽은 건 ‘이만큼 지적’인 책을 읽어냈다는 허세, 나도 나름 꽤 괜찮은 사람이라는 착각을 자신에게 심어줄 필요가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러므로 외부에 존재하는 매트릭스의 수만큼 내면에도 심리적인 방어기제라는 매트릭스들이 존재한다. 사과의 정체성에 사과 껍질이 포함되듯 이 관념의 껍질들을 벗겨내고 제거한다면 나라는 인간 혹은 세계는 와르르 무너지려나, 어쩌려나.
박혜진 <문예비평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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