죽음의 공포와 부활의 염원이 만든 빙의(憑依)
아베의 빙의와 전범들의 반바를 호출하는 우익들

▲ 야스쿠니는 아시아 각국을 침략하고 태평양전쟁을 일으킨 일급 전범들이 있는 곳이다. 어지러운 나라를 바로잡아 태평성대를 꿈꾼다 하여 붙인 야스쿠니(靖國)는 역설적이게도 그 자신의 존재로 인하여 어지럽다.<사진=오마이뉴스ⓒ권성권>
 오마쓰 : 혼례가 사흘 앞으로 다가오자 오요시는 직접 선물을 전해주고 싶다며 쇼야의 집에 찾아와 품에 넣었던 칼을 꺼내 야에의 가슴을 찔러 죽이고 말았습니다. 오요시는 온통 야에의 피를 뒤집어쓰고 있었던 모습은 저는 지금도 잊을 수가 없어요.

 사이치로 : 무서운 일이었군요. 오요시는 그후 어떻게 되었습니까?

 오마쓰 : 본래는 사람을 죽인 죄인이 다이칸의 재판을 받아야 하지만, 그랬다가는 오요시의 도이가 뿐만 아니라 집안을 단속하지 못했다는 이유로 쇼야가도 무사하지 못했을 테지요. 설상가상으로 마을에 부과되는 연공이나 부역이 늘어나는 것도 큰 걱정거리였습니다. 그래서 일을 크게 벌일 수는 없었습니다.

 사이치로 : 아니, 무슨 일을 그리 부조리하게 처리할 수 있습니까? 억울하게 죽은 야에 씨가 너무 불쌍하지 않습니까? 부친인 쇼야 님의 분노도 가라앉지 않을 테구요.

 오마쓰 : 예. 게다가 야에의 약혼자 도미지로에겐 억울한 일이었지만 정말로 오요시와 사랑한 사이가 아니었을까 하는 소문이 돌기 시작했어요. 오요시가 아무리 어리다고는 해도 혼자 착각하고 칼부림까지 할 리가 있을까, 오요시와 도미지로 사이에 무언가 음모가 있지 않았겠느냐 하는 쑤군거림이 있었지요.

 사이치로 : 하지만 도미지로 씨는 그런 마음을 품은 적이 없다고 하지 않았습니까?

 오마쓰 : 그랬지요. 그런데 오요시는 자기와 도미지로는 서로 사랑하는 사이고 둘이 도망쳐 함께 살자는 약속까지 했다고 거짓말을 했어요. 진실과는 거리가 먼 이야기가 기정사실이 돼버렸어요.

 사이치로 : 심하군요. 그럼 오요시 씨는 아무런 벌도 받지 않았습니까? 그건 너무합니다.

 오마쓰 : 아니오. 벌을 받았습니다. 오요시는 야에가 됐어요.

 사이치로 : 예? 지금 뭐라 하셨습니까?

 오마쓰 : 오요시 씨는 야에 씨가 됐습니다.

 사이치로 : 대체 그게 무슨 말인지요. 설마 모두가 공모해서 죽은 사람을 오요시로 하고 오요시를 야에로 바꿔 도미지로 씨와 혼인시킨 것은 아니겠지요?

 오마쓰 : 우리 지방에는 그런 일이 생겼을 때 쓰는 방법이 있답니다. 죽은 사람의 시신이 상하기 전에 그 혼을 불러내서 그 사람을 죽인 사람의 몸에 깃들게 하는 것입니다. 그곳에서는 반바 빙의라고 하지요. 반바는 원한을 품은 망자를 이르는 말입니다. 며칠 내로 썩어버릴 자기 몸을 떠나 죄인의 몸에 깃든 반바는 원한의 일념으로 죄인의 혼을 먹어치우고 완전히 그 사람이 되는 것이지요. 그리고 그 몸의 주인이 되어 계속 살아가는 겁니다.

 사이치로 :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가족들의 입장에서 보면 살아있는 원수의 몸에 사랑하는 딸의 혼이 갇힌 꼴이 아닙니까?

 오마쓰 : 반바가 깃들면 외모는 오요시지만 알맹이는 어여쁜 야에랍니다.
- 미야베 미유키의 <반바 빙의> 中
 
▲주술의 핵심 - 죽음에 대한 공포와 영생에 대한 염원
 
 인류가 존재하는 한, 인류가 자신의 생명을 영속시킬 수 있는 비법을 찾아내지 못하는 한 죽음에 대한 인류의 공포는 사라지지 않을 것이다. 호모 사피엔스는 자신에게 주어진 목숨줄을 다섯 배 가량이나 늘리는 엄청난 과업을 이룩했지만 여전히 만족하지 못하고 있으며, 이를 늘리는 것에 그치지 않고 질병으로부터의 완전한 해방까지도 꿈꾸고 있다.

 죽음을 부르는 여러 요인들을 해결하는 데에 과학이 등장하기 전에는 어떤 것들이 있었을까? 사이비 종교는 요설과 곡학으로 영생을 팔아먹었지만, 인간의 생물학적 작동의 끝이 있음을 인정한 종교는 사후세계라는 블루오션을 개발함으로써 영속적 생명을 통한 영속적 이익을 창출했다. 종교와 사이비 종교를 가르는 기준은 종교의 수만큼이나 다양해서 구분하기 복잡하지만, 공통적인 것 중 하나는 영생을 약속한다는 점에 있다.

 미야베 미유키의 작품 속에 등장하는 세 명의 남녀는 삼각관계다. 쇼야의 집으로 장가들러 온 에도 출신의 도미지로는 야에와 혼인해서 살 데릴사위다. 그런데 야에의 친구 오요시가 잘생긴 도미지로를 연모해서 빼앗을 궁리를 하지만 도미지로와 야에의 사랑이 깊어 뜻을 이루지 못한다. 질투에 눈먼 오요시는 혼례를 앞둔 야에를 찾아가 칼로 그녀를 죽인다. 두 가문과 마을에 닥칠 화를 피하고자 두 집안은 음모 아닌 음모를 꾸미는데, 그들이 찾아낸 해결책은 그 고장에 비밀 풍습으로 전해오는 반바 빙의였다.

 빙의(憑依)란 기대어(憑) 이지한다(依)는 뜻인데 영혼이 제 육신이 아닌 다른 것에 옮겨붙는 것을 말한다. 무신론적 관점에서 보면 빙의는 실제 일어나는 현상이라기보다는 주술(呪術) 또는 주술로 일으키는 연출이다. 그렇다면 빙의는 왜 생기게 되었을까? 비(非) 과학의 시대를 살아간 사람들의 숙명적 과제가 죽음이었을 때 주술은 당연히 죽음에 대한 공포를 해결하는 데에 총력을 기울여야 했을 것이다.

 토테미즘은 원시적 빙의다. 약하디 약한 인간의 몸뚱이로 살아가는 공포를 극복하기 위한 인류의 술수(術數)가 사람과 동물을 교배(交配)시켜 토템을 만들어냈다. 빙의는 다른 혼과 다른 몸의 결합으로 이루어진다. 토템이 사람과 동물의 합체한 몸에 사람의 영혼이 깃든 것처럼 보일 수 있지만 그 몸 안에 든 영혼은 사람 만의 것이 아니다. 범의 담대함과 곰의 인내심이, 매의 기상과 꿩의 온정이, 학의 고고함과 뱀의 생명력이 인간이 본 그들의 혼이다.
 
▲빙의 - 죽음에 대한 결사항전이자 부활에 대한 학수고대
 
 거상(巨商) 가문의 딸과 부농(富農) 가문의 딸 사이에 벌어졌던 끔찍한 사건의 결과는 두 사람의 희생으로 끝나지 않는다. 봉건시대의 모든 범죄는 동서양을 막론하고 연좌제로 직결된다. 가문의 혈통을 이어야 하고 가문의 이익을 지켜야 했던 봉건시대의 가족들은 혈연적 애정보다는 어쩌면 혈연적 이익을 더 우선했는지도 모른다. 그러나 자식에 대한 애정이든 가문에 대한 집착이든 반바 빙의는 죽음에 대한 결사항전이면서 동시에 부활에 대한 학수고대였음에 틀림없다.
 
 토니 다키타니에게 남겨진 것은 방 하나 가득한 사이즈 7짜리 옷더미뿐이었다. 장례식을 치른 열흘 후, 토니 다키타니는 신문에 비서를 모집한다는 구인광고를 냈다.

 <사이즈 7, 신장 161cm 전후, 신발 사이즈 22의 여성을 구함. 월급 최우대.>

 13명의 여성이 남아오야마에 있는 그의 사무실로 면접을 받으러 왔다. 그는 아내의 체형에 가장 가까운 여성을 선발하였다. 토니 다키타니는 그 여자에게 말했다.

 “일은 별로 어렵지 않아. 매일 아침 아홉 시에 사무실로 출근해서 전화를 받고 원고를 전달하고 자료를 받아오는 정도야. 퇴근은 다섯 시. 다만 한 가지 조건이 있어. 실은 아내가 얼마 전에 죽었는데 그녀가 남긴 옷이 많아. 대부분이 새옷이나 다름없는 것들이야. 이 사무실에서 일하는 동안 그 옷들을 제복 대신 입어주었으면 해.”

 토니 다키타니는 사이즈가 맞는지 한번 입어보라고 하면서 방에서 나왔다. 여자는 옷을 몇 벌 입어보았다. 옷은 마치 그녀를 위해 만들어진 것처럼 딱 맞았다. 그녀는 옷을 손가락으로 쓰다듬고 냄새를 맡아보았다. 몇 백 벌이나 되는 아름다운 옷이 즐비하게 걸려 있었다.

 그녀의 눈에 눈물이 고였다. 울지 않을 수 없었다. 눈물이 하염없이 흘러나왔다. 그녀는 흐르는 눈물을 억제할 수가 없었다. 그녀는 죽은 여자가 남긴 옷을 몸에 걸친 채 흐느껴 울었다.
- 무라카미 하루키의 <토니 다키타니> 中
 
 이 남자는 정신병자인가? 죽은 자를 대하는 산 자의 전통적 태도는 본래 이중적이다. 보내고 싶지 않지만 보내야 하는 것이 도리이지만 산 자는 배웅의 망설임을 통해 망자에 대한 예우를 표하고 산 자의 공포를 다스린다. 아내의 옷은 사물이지만 이 사물은 그냥 사물이 아니고 아내의 영혼에 다름아니다. 아내는 옷으로 말하고 옷으로 행동했다. 세상을 살아가는 사람들이 행하는 영혼과 철학의 전시(展示)는 언어의 나열이기도 하고 행위의 진열이기도 하며 사물의 배열이기도 하다. 옷은 비록 사물이지만 망자에게 옷은 철학이며 세계관인 것이다.

 주술이 사라진 시대에도 주술적 행위는 유효하다. 과학과 자본주의가 세계를 제패한지 수백 년이 지났고 이후로도 수백 년을 지배할 태세이지만 과학과 자본주의를 생동하게 만드는 건 여전히 주술이다. 영혼과 육신이 역전된 듯한 첨단의 자본주의 시대에 첨단의 패션은 낙후된 여성인간 개체에 빙의하여 주술의 주인에게 닥친 죽음의 공포와 부활의 염원을 갈무리한다.
일본인은 무례하면서도 예의바르고 고집불통이면서도 융통성이 있으며 군국주의적이면서도 탐미적이다. 또한 충직하면서도 반항적이고 용감하면서도 겁이 많다. 루스 베네딕트의 ‘국화와 칼’ 中.<사진=오마이뉴스 ⓒ이희훈>
 
▲국화와 칼 - 이중성은 보호색이다
 
 일본의 문호가 개방된 이후로 일본에 관해 쓴 많은 문헌을 뒤적이면 아주 특이한 표현이 눈에 들어온다. 아마 다른 나라에 대해 이런 표현은 쓰인 적이 없을 것이다. 그것은 다름아닌 ‘그러나 또한’이란 말이다.

 어떤 성실한 연구자가 일본이 아닌 어느 나라 국민에 대해서 글을 쓴다고 하자. 그런 경우, 그 나라 사람들이 전례를 찾아볼 수 없을 정도로 바른 국민이라고 표현했다면 그러나 또한 그들은 아주 무례하며 거만하다고 덧붙이는 일은 거의 없다.

 그들이 서양학문에 빠져있다는 점을 들면서 동시에 열렬한 국수주의자로서의 일면을 자세히 묘사할 리도 없다. 예를 들어 아름다운 것을 사랑하고 배우와 예술가를 존경하며 국화 재배에 온 정성을 다하는 국민에 대한 책을 집필한다고 하자. 거기에 일부러 다른 책까지 인용하면서 그 국민이 칼을 숭배하고 무사에게 최고의 영예를 돌린다는 것을 강조하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모든 모순이 일본에 관한 책에서는 씨줄과 날줄처럼 얽혀있다. 칼도 국화도 하나의 그림 속에서 공존하고 있다. 일본인은 싸움을 아주 좋아하면서도 유순하고 군국주의적이면서도 탐미적이며 무례하면서도 예의바르다.

 그들은 자신의 행동을 남이 어떻게 생각할까 무척 신경을 쓰면서도 한편 다른 사람들이 자신의 행동을 보지 않을 때는 쉽사리 범죄의 유혹에 이끌린다. 그리고 군인들은 철저히 훈련되어 있지만 명령을 거역하기도 한다.
- 루스 베네딕트의 <국화와 칼> 中
 
 서로 대립하고 상반되는 관념이 단일한 대상에서 생긴 까닭은 무엇일까? 일본인들은 실제로 이렇게 서로 모순되는 행위를 하는 사람들일까? 서양인의 눈으로 바라본 동양인, 미국인이 경험한 일본인이라는 학술적 문건이 가지는 한계와 다소 오리엔탈리즘적인 맛이 있기는 하지만 이 보고서 안의 일본인에 대한 인상비평은 대단히 흥미롭다. 역사와 문화적으로 살펴볼 때 이런 이중적 태도를 취하는 일본인들의 삶은 크게 이상하지 않다.

 이중성은 보호색이다. 인류 역사에서 문명의 전파도를 보면 대륙과 반도와 섬이라는 순서는 일반적이고 보편적이다. 또한 문명의 마지막 소비처는 수용적 문화를 지니는 경우가 많다. 이들은 문명과 문화를 수용하는 과정에서 놀랍도록 빠른 판단과 흡수력을 보인다. 어쩌면 이것은 생존하기 위한 방법으로서 선택한 삶의 철학이 내재화된 것이리라. 긍정적 시각으로 볼 때 이중성은 유연성의 다른 표현이며 이는 자신을 보호하려는 생존적 처신으로 보아도 틀리지 않다.

 이중성의 목적이 자기보호에 있다면 이중성은 그 본질에 있어 빙의와 다르지 않다. 전혀 다른 혼과 전혀 다른 몸을 인위적으로 결합시킨 빙의는 상반되고 대립되는 이중성과 다를 게 무앗인가? 이 둘은 죽음의 극복과 생존의 갈망이라는 공통된 의지가 만들어낸 산물이다.
전범의 반바에 빙의된 아베는 언제쯤 자신의 양손에 묻은 오요시의 피를 발견하게 될까.<사진=오마이뉴스 ⓒ권우성>
 
▲전범들의 반바에 열광하는 일본의 우익들
 
 빙의(憑依)는 주술의 시대를 떠나서도 여전히 효력을 인정받고 있다. 일본의 신사(神社)는 빙의의 전형이다. 신사에는 사자(死者)들의 영혼이 합사(合祀)되는 곳이다. 일본의 신들은 신사에 합체되어 하나의 거대한 신으로 숭배되고 있다. 신사의 몸으로 빙의된 혼들이 일본을 지켜주고 있다는 믿음이 신사를 옹호하는 일본인들의 관념을 지배하고 있는 것이다.

 일본에서 가장 큰 신사는 도쿄의 야스쿠니다. 전쟁신사라는 오명을 쓰고 있는 이곳은 아시아 각국을 침략하고 태평양전쟁을 일으킨 일급 전범(戰犯)들이 있는 곳이다. 전범들의 혼을 하나로 모아 떠받드는 심리의 기저에 흐르는 것은 무엇일까? 어지러운 나라를 바로잡아 태평성대를 꿈꾼다 하여 붙인 야스쿠니(靖國)는 역설적이게도 그 자신의 존재로 인하여 어지럽다.

 만세일계(萬世一系)는 2천년 이상 천황의 혈통이 한 번도 끊어짐 없이 이어지고 있다는 일본인들의 자긍심이다. 천황은 일본국의 상징인 동시에 일본국민 통합의 상징이며, 그 지위는 주권을 가지는 일본국민의 총의에 근거한다는 헌법의 정신과 만세일계를 관통하는 세계관은 모으고 모아서 크게 하나로 만들자는 것이다. 일본 국기인 히노마루와 천황가의 깃발과 자위대의 욱일승천기의 상징이 태양인 것, 그리고 끊임없이 합사되고 빙의되는 신사의 전통은 그들의 세계관과 무관하지 않다.
 
 오마쓰 : 사이치로 씨. 이 나이가 되면 죽을 날이 가까운 탓일까요? 가끔 생각하곤 합니다. 사람은 죽으면 어떻게 될까, 혼과 몸은 정말로 나뉠 수 있을까, 망자의 혼이 산 자의 몸에 깃들 수 있을까, 뭐 이런 것들 말이에요. 무엇보다 혼을 옮기는 일이란 게 가능할까요?

 사이치로 : 가능하다고 했잖습니까? 실제로 되었다면서요?

 오마쓰 : 예, 잘 되긴 했지요. 그런데 그 일이 정말로 잘 된 일인지 지금에 와서 생각해보면 잘 모르겠습니다. 반바 빙의는 우리가 다함께 꾸고 있던 꿈, 그랬으면 좋겠다고 바라는 꿈이 이루어낸 것에 지나지 않았을지도 몰라요. 오요시는 어디까지나 오요시고 그저 반바 빙의라는 수단에 넘어가 본인도 그런 기분이 들어서 야에 씨가 됐을 뿐인지도 모르지요. 그렇다면 언젠가 오요시는 자신이 원래 오요시였음을 생각해내고 양손이 피로 물들어 있다는 사실을, 자기가 살인자였다는 사실을 떠올리게 되지 않을까요?
- 미야베 미유키의 <반바 빙의> 中
 
 아베와 일본의 우익들은 반바 빙의를 꿈꾸고 있는 것일까? 발바닥이 닳도록 야스쿠니를 드나들며 전범들의 혼을 온몸에 덕지덕지 묻히고 나와 무슨 수작을 부리는 것일까? 대한의군 참모중장 안중근에 의해 좌절되어버린 대일본제국의 부활을 꿈꾸는 것일까? 빙의의 주술이 죽음의 공포를 딛고 부활의 염원을 이루는 것이기에 죽은 전범들을 되살려 제국의 부활을 노리는 것인가? 전범의 반바에 빙의된 아베는 언제쯤 자신의 양손에 묻은 오요시의 피를 발견하게 될까?
김시인 <인문학공간 소피움 대표>

[드림 콕!]네이버 뉴스스탠드에서 광주드림을 구독하세요

저작권자 © 광주드림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