살아있는 건물, 숨 쉬는 도시

▲ ‘나무’, 장욱진.
 내가 채송화 꽃처럼 조그마했을 때
 꽃밭이 내 집이었지.
 
 내가 강아지처럼 가앙가앙 돌아다니기 시작했을 때
 마당이 내 집이었지.
 
 내가 송아지처럼 겅중겅중 뛰어 다녔을 때
 푸른 들판이 내 집이었지.
 
 내가 잠자리처럼 은빛 날개를 가졌을 때
 파란 하늘이 내 집이었지
 
 내가 내가
 아주 어렸을 때,
 
 내 집은 많았지.
 나를 키워 준 집은 차암 많았지.
 
- 이준관 ‘내가 채송화처럼 조그마했을 때’
 
▲세상에서 가장 큰 집

 생명의 무게로 가늠한다면 저 젖은 잎사귀 아래 얼핏얼핏 드러나는 달팽이 한 마리와 달팽이 몰래 엿보는 내가 무에 다를 게 있으려나. 의미의 무게로 가늠한다면 작은 아이가 좋아하는 그림책 ‘세상에서 가장 큰 집’ 속 달팽이와 내 눈앞의 달팽이가 무에 다를 것인가. 문학이 아름다운 이유는 인물의 숭고함을 드러내 우리를 드높은 정신세계로 고양해서가 아니다. 문학은 나와 다를 바 없는 존재의 일상을 통해 각자의 본성에 깃든 상상력을 자극함으로써 서로 다른 결론들에 이르게 한다. 따라서 책의 숭고는 텍스트 안에 있는 것이 아니라 그것의 의미가 다시 태어나는 독자의 상상력 속에 있다. 문학은 기억되는 이의 정신 속에서 영원하다.

 세상에서 가장 큰 집을 갖고 싶은 조그만 달팽이가 있다. 이것은 충동인가, 욕망인가, 의지인가. 여하튼 작은 달팽이는 자신의 몸을 이리 늘렸다 저리 늘렸다 움찔움찔 바삐 움직이면 등 위의 집이 조금씩 커진다는 것을 발견한다. 우와! 너희 집 정말 크다. 부러워하는 개구리와 어여쁜 나비의 감탄에 힘입어 점점 맹렬해지는 달팽이의 몸짓. 이번에는 꼬리를 흔들어 집 위에 크고 작은 뿔 장식도 붙인다. 어느덧 시간은 흘러 밭에 머물던 달팽이 무리가 집을 옮겨야하는 수확기, 세상에서 가장 큰 집을 가졌던 달팽이는 움직일 수 없어 굶어죽고 만다. 사실 이 이야기는 아빠 달팽이가 어린 아기 달팽이에게 이야기를 들려주는 액자식 구조로 되어있다. 세상에서 가장 큰 집을 꿈꾸던 아기 달팽이는 세상에서 가장 큰 집을 가졌던 달팽이 이야기를 들으며 자신의 욕망에 대해, 희망에 대해 다시 생각해본다. “얘, 네 집은 왜 이렇게 작니?” 이후 아기 달팽이집을 본 동물 친구들이 의아해하면 아기 달팽이는 세상에서 제일 큰 집을 가졌던 달팽이 이야기를 들려준다.

 나는 이 그림책을 ‘의식이 자신의 가치를 외적인 보상에서만 찾으려하면 존재가 쪼그라든다’는 우화로 읽었다. 오래전, 대기업 총수가 쓴 ‘세계는 넓고 할 일은 많다’는 긍정과 야망 일색의 자서전이 베스트셀러에 등극한 일이 있었다. 책에서 그의 문어발식 기업 확대는 공격적인 경영 자세로, 과도한 부채는 무책임한 도박이 아닌 모험적 기업가 정신으로 포장되었다. 결과는 기업 해체.

 어찌 번듯하고 웅장하게 혹은 모던하고 세련되게 지어진 건축물만 집이랴. 경영도 집이고 시인의 시처럼 마당도 들판도 하늘도, 생명이 깃들이는 곳이며 모두 집이다. 달팽이의 집도 내 몸도 집이다. 이런 진실을 아는 건 감각이 활짝 열려있는 아이들뿐이라서 오늘도 아이는 운천 호숫가 와아아 물줄기 쏟아지는 분수로 뛰어들고, 뜨거운 모래가 쨍알쨍알한 놀이터로 슬쩍 나간다. 그리고 아이의 등 뒤로 오버랩 되는 나의 여름방학. 멀리 신작로를 두르고 옹기종기 지붕들 내비치던 사거리 정자나무 아래 맴맴, 수박화채에 얼음 동동 띄운 양푼이 등장하면 한 명이 네 명 되고 네 명이 여덟 명 되던 어린 시절 할머니 댁에서의 기억. 집으로 돌아와 마루에 누우면 졸린 눈꺼풀, 담 너머 들려오던 살아있는 것들의 나른한 목소리.

 살아있는 공간은 어울리고자 하는 우리의 본성이 자연스럽게 드러나게 하며, 동시에 홀로 있고자하는 우리의 또 다른 본성이 존중되는 곳이다. 그렇다면 아이들이 하루의 대부분을 머무는 학교와 기업과 회사의 건물은 그러한가. 나아가 깎고 부수고 새로이 올라가는 우뚝우뚝한 아파트와 낫낫한 도로들은 살아있는 것들의 생기(生氣)를 고려해 지어지는가.
‘와유’, 장욱진.
 
▲살아있는 건물은 인간의 필요와 감각에 반응한다
 
 건축 설계가이자 이론가인 크리스토퍼 알렉산더는 ‘영원의 건축’에서 다양하고, 평화롭고, 살아있는 건축에는 ‘무명’이라고 이름 붙인 특성들이 흐른다고 말한다. ‘무명’인 이유는 이 특성을 한 마디로 표현할 길이 없기 때문이다. 작은 방, 집, 마을에서 도시에 이르기까지 생명력과 자유가 느껴지는 곳이 있다. 활기차지만 평화롭고, 평화롭지만 적요가 우리를 억누르지 않는 건물과 마을을 짓는 방법, 즉 무명의 특성이 드러나게 할 방법으로 그는 253가지의 패턴을 제시했다. 이러한 패턴에 의해 구성된 집과 도시에 거주하거나 들르는 사람들은 편안함을 느끼며 존재의 일치, 사물과의 일체감을 맛본다. 크리스토퍼 알렉산더의 저술은 ‘왜 우리는 특정한 공간에서 편안함과 기분 좋음을 느끼는가?’에 대한 공학적 해답이자 철학적 해석을 담고 있었다.
 
 건물과 마을에 내재된 이 특성을 정의하려면 먼저 모든 장소는 그곳에서 지속적으로 일어나는 사건들의 패턴에 따라 고유한 성격이 형성된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이런 사건 패턴들은 공간상 기하학적인 패턴과 맞물려있게 마련이다. 뒤에서 살펴보겠지만 사실 각각의 건물과 마을은 궁극적으로 공간상의 이러한 기하학적 패턴을 통해 만들어진다. 다른 것은 아무 것도 없다. 그것들이 건물과 마을을 구성하는 원자와 분자이다. 건물과 도시를 만들어내는 구체적인 패턴은 살아있을 수도, 죽어있을 수도 있다. 패턴들이 활기차게 살아있다면 우리 내면의 긴장이 누그러져 우리는 자유로워진다. 하지만 패턴들이 죽어있다면 우리는 내면의 충돌에서 벗어나지 못한다. 하나의 방, 하나의 건물, 하나의 도시에 살아있는 패턴이 많이 있을수록 그곳은 완전한 장소가 되어 활력이 더 넘치고, 더 빛나고, 자기 보존 능력이 더 견고해진다. 그것이 무명의 특성이다. 그리고 건축물이 이런 활기를 띠게 되었을 때, 그것은 자연의 일부가 된다. 건물을 구성하는 요소들은 만물은 사라진다는 사실에도 바다의 물결이나 풀잎처럼 끊임없는 반복과 변주의 작용을 받으며 창조된다. 이것이 바로 특성 그 자체다.
-‘영원의 건축’
 
 인간의 필요와 감각에 반응하는 지적 구조 즉 ‘무명’이 존재하는 공간은 만들어지는 것이 아니라 사람들의 일상적인 활동에 의해 간접적으로 천천히 생성된다. 그러나 그 활동들을 만들어내는 것은 건물에 내재하는 패턴이기도 하다. 크리스토프 알렉산더가 제안하는 253개의 패턴 언어로 세상을 보는 방법을 배운다면, 패턴 언어를 통해 내가 머물 공간과 뭇 타인을 초대할 공간의 형태를 구상할 수 있고 꾸밀 수 있다면 어떨까. 자연과 인공들에서 ‘무명’이 살아있는 공간을 발견하고 그곳에 머물 능력을 갖춘다면 어떨까. 그곳에서 우리는 세상과 연결되고, 마침내 나 자신과 온전히 연결되지 않을까.

 한적한 공원을 걷다 뚜렷한 존재감으로 확연히 다가오던 벤치를 만나 그곳에 잠시 앉았던 기억이 있다. 살아 움직이는 사물보다 때로는 무생물이 더 살아있는 듯 느껴지는 건 그곳에 사람들의 활동의 흔적이, 패턴이, 무명이 있기 때문이다. 마찬가지로 내가 삶에서 몰입하고 행복하며 열정적일 때는 내 안에 ‘무명’의 특성이 있다. 무명은 무심하지만 무관심하지 않으며, 완성을 지향하지만 집착적이지 않은 일종의 자세이며 순수한 태도다. 가령 과일을 안전하게 보관하려는 목적에서 골함석과 베니어판으로 만든 단순한 선반처럼, 무명으로 행동하는 사람은 타인의 시선에 무심할 뿐 아니라 자신이 무심하다는 사실도 의식하지 못한다. 남들에게 어떤 인상을 남길 의도 없이 오직 자신이 할 일에만 관심을 두고 작업하는 이에게는 타인과 자신을 자유롭게 풀어놓는 ‘무명’의 패턴이 있다.
‘수탉’, 장욱진.
 
▲무명은 있다 그러나 무명을 만들어내기란 쉽지 않다
 
 유발 하라리는 ‘사피엔스’에서 번영을 불러왔다고 일컬어지는 농업혁명의 정착이, 인간에게 사적소유와 내 집에 대한 집착 그리고 이웃으로 분리되어 이전보다 훨씬 자기중심적이 되는 존재의 자기중심성을 불러왔다고 경고했다. 1만 년 전 농부가 자신의 밭을 갈 때, 얼마 남지 않은 수렵인은 언덕과 시내, 숲과 열린 하늘을 포함한 땅 전체를 뭇 생명 그리고 동족과 공유했다. 농부가 자신들을 주변 환경에서 떼어내 자신들의 인공적 거주지를 만들고 울타리로 방어벽을 치고 성벽을 쌓을 때, 수렵채집인은 단지 개울과 호두나무, 곰 동굴과 부싯돌 매장지의 위치를 기억했고 필요한 때 다시 그곳을 찾았다. 오늘날, 우리 모두는 농사혁명을 일으킨 호모 사피엔스의 후손들. 그래서 오늘도 꽁꽁 닫힌 유리창안에서 인공 바람을 쐬며 이 요새로 들어오는 낯선 것들-부지런한 개미, 은밀한 바퀴벌레, 대담한 거미-에 질겁하고 스프레이와 화장지를 찾으며 살아간다.

 메시지를 전달해야한다는 조급함, 튀고자하는 열망, 잊힘에 대한 강박적 두려움. 언제부턴가 도시의 건축물과 대중매체에 등장하는 사람과 사건들은 자연스러움마저도 의도하는 것 같다. 모든 계산된 것은 결국 허위에 불과하기에 처음에는 보기 좋더라도 곧 내부에서 외부로 흐르지 못하는 부조화를 만든다. 사람들은 그러한 공간에 질리면 버리고 다시 새 장소로 이동하며 한 프로그램과 아이돌에의 열광에서 새로운 프로그램과 아이돌에의 열광으로 옮겨간다. 축적되지 않고 소모되는 재능과 오직 다른 물건으로 대체될 동안만 공간을 점유하는 무의미한 물건들, 위치들, 자리들. 20년만 지나도 흉물스러워지는 건물과, 늙음이 두려워 운동과 화학요법을 병행하는 의학적 방법들이 권유되는 도시에서 어쩌면 우리는 한때 삶의 자연스러운 본성이었던 ‘무명’의 태도를 다시 불러내야 할지 모르겠다. 아니, 이제 무명-영원성에의 발견-은 피터 팬의 천진을 품은 아이들에게나 가능한 것인지.
박혜진<문예비평가>

[드림 콕!]네이버 뉴스스탠드에서 광주드림을 구독하세요

저작권자 © 광주드림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