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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 고전을 만나다]지킬 ‘I need to know’ & 로버트 루이드 스티븐슨 ‘지킬과 하이드’
내 안엔 내가 너무도 많아

박혜진
기사 게재일 : 2019-10-14 06:05:02
▲ ‘천사와 악마’. 에셔.
 알아야 해.
 이 어두운 내면으로 들어갈 길을
 알아야 해.
 정신을 분리해 통제할 그 길을.
 
 왜 현명한 사람도 어둠속에 영혼을 빼앗겨
 그 속에서 빠져나올 수 없나
 내가 그들의 손 잡아줄 수 있다면.
 
 찾아야 해.
 이 어둠속에 갇힌 그들의 비밀
 찾아야 해.
 온전한 정신이 사라진 이유를.
 
 왜 세상은 그들을 버리는가.
 왜 죄 없는 자를 가두는가.
 왜 악령에 씌었다 생각하는가.
 왜 숨겨진 빛을 외면하는가.
 
 알길 원해.
 왜 인간은 본능 속에 약한 것에 유혹당해
 끝내 스스로 영혼을 태우는가.
 알아야 해. 그 진실을
 
 신이시여 내 길 이끄소서.
 내 눈 밝혀주소서.
 나는 가리라. 당신의 뜻과 함께.
 
 가야한 해.
 그 숨겨진 빛을 향해
 누구도 가지 않았던
 오직 나만이 가야할 험난한 길
 나는 가리
 알아야 해.
 - 지킬의 노래 ‘I need to know’
 
▲지킬이 자라면 하이드도 자란다
 
 그의 나라는 동전의 ‘뒷면’이었네. 그가 악랄한 사고뭉치라면 나는 사회의 기둥이었지. 사회의 기둥이 지킬 박사로서 성실하게 살아가는 동안, 사고뭉치는 웅크린 채 잠을 자고 있었던 셈이네. 난 궁극적으로 인간의 내면에는 각양각색의 서로 다른 독립된 자아들이 서로 다투며 공존하고 있다고 믿었다네. 나는 나의 내면에 존재하는 도덕성으로부터 인간의 근본적이고 철저한 이중성을 깨달았지. 내 의식 세계에서 두 가지 본성이 다투고 있는 것을 본 거야. 사실 그런 다툼이 있었던 이유는 내가 두 가지 본성을 극단적으로 다 가지고 있었기 때문이었어. 이런 극단적이고 이질적인 이란성 쌍둥이가 의식 세계라는 고통스러운 자궁 안에서 끊임없는 투쟁을 해야 한다는 것은, 인류에게 있어서 저주임이 분명해. 그렇다면 그 둘을 분리하면 좋지 않을까?
- ‘지킬 박사와 하이드’ / 푸른숲
 
 고전의 정의를 “이름은 들어보았으나 끝까지 읽은 이는 드문 책”으로 정의한 글을 읽으며 100% 우스갯소리는 아니라고 생각했다. ‘지킬과 하이드’도 그렇다.

책이 쓰인 1886년 이후로 연극과 뮤지컬, 드라마를 제외한 영화만도 123편이 존재한다는 로버트 루이스 스티븐슨의 ‘지킬 박사와 하이드 씨의 기이한 이야기’를 나는 ‘메리 라일리’라는 영화로 먼저 만났다.

 광활한 자연, 고독의 위협에 굴하지 않고 28년 동안 자신이 표류한 무인도를 영토로 개간한 ‘로빈슨 크루소’가 18세기 영국민이 지향하던 근대적 인간상을 보여준다면 ‘지킬 박사와 하이드’는 로빈슨 크루소라는 동전의 뒷모습 즉 침략을 통한 식민지배로 부를 쌓았던 유럽의 본능적 측면을 보여준다.

 스티븐슨이 ‘지킬과 하이드’를 세상에 내놓은 4년 후 영국은 아편 밀매를 막는 청나라를 대상으로 전쟁을 일으켰다. 그리고 전리품으로 빼앗은 홍콩을, 사람들의 반대로 영국 본토에서 시행하지 못하던 무관세와 자유무역을 위한 역참으로 삼았으니 가장 부도덕한 전쟁이라 불리는 아편 전쟁의 영향은 아직도 홍콩에서 진행 중이다.
‘해방’. 에셔.

 그런데 왜 사람들은 ‘지킬과 하이드’에 열광하는 걸까? 지킬이 끝없이 반복 변형되어 인구에 회자되는 이유는 무엇일까?

 고전은 우리들의 본성을 직시하게 만들기에 고전이다. 상상한다. 내가 처음으로 내 안의 악을 그리고 악행이 던지는 매혹과 끔찍한 대가를 동시에 깨달은 순간은 언제였던가. 화장대에 놓여 ‘어서 발라보렴. 좋은 향기가 나.’ 새침하고 고운 빛깔로 유혹하던 엄마의 분첩과 입술연지를 얼굴에 바르고 급기야 매니큐어 뚜껑은 닫지도 않아 굳게 만들었던 날의 어느 오후였던가.

 엄마가 돌아오실 시간이 슬슬 가까워지자 홀렸던 마법은 풀려 불현듯 등은 따갑고 손가락과 손톱을 거쳐 반짝이던 형형색색의 매니큐어는 언젠가 시골 나무에 묶였던 붉은 천들처럼 위협적인 낯빛으로 나를 쏘아봤다. 니가 한 짓을 봐. 나를 원래대로 돌려놔. 나는 너의 것이 아니야. 그리고 장엄한 시간은 바닥에 쏟은 아세톤 냄새로 마무리되었으니 방안을 꽉 채우고 급기야는 방을 터뜨려버릴 것만 같던 그 냄새.

 혼이 났는지는 기억하지 못한다. 아마도 엄마는 혼란스러운 표정과 울 것 같은 눈 속에서 그날의 경험 자체가 이미 충분한 벌이 되었으리라 짐작하신 듯하다. 그리고 이후 나는 화장대를 보면 ‘황금 보기를 돌같이’ 하라던 최영 장군의 아류가 되었다. 성선설이니 성악설이니 혹은 성무성선설이니 하는 인간 본성에 대한 다종 다기한 논의들은 내게 그날의 사건으로 소급된다.

 ‘카이사르의 것은 카이사르에게 신의 것은 신에게’ 예수는 말씀하셨다. ‘엄마의 물건은 나의 물건이 아니’라는 대자적 깨달음은 ‘타인의 물건을 함부로 만지는 것은 죄’라는 도덕 법칙으로 발전했을 것이다. 더불어 내 물건을 만지는 아이를 극도로 미워하고 심지어 그 아이를 ‘나쁜 애’의 범주에 넣어 가둬버리는 일반화의 오류 혹은 빨리, 효율적으로 판단함으로써 뇌의 피로를 덜기 위한 각종 관점과 신념이 자라기 시작했을 것이다.

나는 소위 말하는 착한 아이가 되었고 착한 아이가 된 만큼 세상에 대한 단죄욕, 미움도 무럭무럭 커갔다. 무릇 자신이 옳다고 믿는 사람은 타인을 마녀사냥 한다. 지킬이 자라면 하이드도 자란다.
‘지킬과 하이드’.
 
▲지킬 안의 하이드
 
 그러나 19세기 영국 런던의 유서 깊은 거리에 깃들여 사는 지킬 박사는 지킬 속의 다중성이 이성과 비례한다는 것을 몰랐다. 작열하는 한낮의 그림자는 짧기에 밀도가 강하다. 짧은 것은 응축되어 있을 뿐 약하지 않다.

 지킬이 자신으로부터 악을 분리해냈을 때, 악이 구현된 존재인 하이드(hyde)는 정오의 그림자처럼 젊고 왜소했다. 그러나 그의 왜소함의 이유는 약해서가 아니라 경험의 부족 때문이다.

 경험은 내가 누구인지 알게 하는 통로. 부단한 행(行)을 통한 자기 파악이 곧 정체성이 된다. 인류의 시작을 고스란히 드러내는 태어나 걷기위한 아기의 불가해한 노력을 보라. 일어섬과 넘어짐 사이의 아슬아슬한 뒤뚱거림은 440만 년 전 동물로부터 분화해 나온 호미니드(Hominid) 족의 일환임을 보이기 위한 아이의 눈물겨운 사투. 그러므로 나는 태생부터 행동하는 의지적 존재였다.

 끊임없이 욕구하고 달라지는 것, 전지와 전능이 신의 정체성이라면 변화를 향한 욕망은 인간의 정체성. 최초의 두발걷기가 인간종의 정체성을 형성했듯 나는 인간임을 증명하는 동시에 다른 사람과 다른 나만의 개별성을 위해 걷고 달리고 나아가고 우회하며 달아난다. 따라서 인간의 역사 그리고 우리의 생 자체가 하나의 창조이며 과거를 부정하는 역설, 어제를 지우고 새로 시작하는, 무한한 시간에 대한 나의 해석.

 따라서 지킬이 악을 분리해 만든 하이드가 악행을 거듭하는 건 자기 정체에 이르기 위한 필연적 귀결이다. 밤의 환락을 취하며 자신의 앞길을 막는 모든 존재를 거리낌 없이 제거할수록 하이드는 자랐고 강해졌다.

 한낮의 지킬은 어땠을까? 밤의 하이드가 음험한 런던 뒷골목의 어둠을 밟으며 악행을 밝게 비출수록 지킬의 명예로운 행동과 자선, 자비로움도 지킬 박사란 이름 위에 층층이 덧대졌다.

 빛이 강하면 그림자도 짙다. 빛과 그림자의 경계에는 무엇이 있는가? 지킬이 만든 경계는 붉고 푸른 시약. 약을 경계로 지킬은 하이드로 변신했다. 빛이 지킬이라면 어둠은 하이드였다.

 빛은 지킬이 사람들에게 보여주고자 했던 그의 일면, 하이드는 그가 자기 자신에게조차 감추기를 바랐던 억압하면서도 충동질하고, 행하면서도 끝끝내 받아들일 수 없었던 그의 일면이었다.
‘지킬 박사와 하이드 씨의 이상한 사건’(1886년).
 
▲인정하고 싶지 않은 자신을 억압할 뿐
 
 사람의 자아에는 수 없는 면이 있다. 도덕과 윤리는 개념, 개념은 차이점을 제거하고 공통만을 담는다. 내가 윤리적이고 도덕적인 행동을 하고 있다고 자부할수록 내가 더도 아니고 덜도 아닌, 딱 평균적인 인간이 되는 건 그 탓이다. 개념에 맞추어 살아가는 삶은 3차원인 인간이 납작한 글자처럼 사는 것에 다름 아니다.

 70억 명이 서로 달리 가진 다수성을 도덕과 윤리가 어찌 담을 텐가. 금과옥조처럼 여기는 강령이 있다면 그 강령이 마침내는 너를 집어삼키고 광기에 치닫게 되리라고 니체는 경고했다. 선한 믿음이 어떻게 타자를 제거하는 무기가 되는지를 보여주는 역사적 사건은 또 얼마나 잦은가.

문제는 내 마음속의 도덕률이 아니라 내가 내리는 선택이고 결단이다. ‘인간은 자유로운 존재’라는 말은 인간이 자기 생(生) 앞에 시시각각 놓이는 선택이라는 결단을 언제나 어느 때나 내릴 각오가 되어있어야 함을 일컫는다. 마음의 중심이 내 안에 있는 자만이 자유롭다.

 마음의 중심이 밖에 있었던, 이성을 광신하고 이성아래 본능을 굴복시킬 수 있으리라 믿은 지킬은 실패할 수밖에 없었다. 그가 가진 천재성과 집요함에도 불구하고 추론은 어긋나고 이야기는 파국으로 치달을 수밖에 없다.

 지킬에게 하이드는 또 다른 분신이 아닌 목적을 위한 수단이었다. 양심의 가책 혹은 세간의 따가운 눈초리를 피해 마음껏 환락을 즐기기 위한 도구에 불과했다. 인간이 물건이 아닌 건 그가 그 스스로 의미를 만들어가는 존재이기 때문이다. 샤프는 필기를 위한 것, 지우개는 지우기 위한 것, 아이들 칼싸움용 장난감으로 바뀌기도 하는 우리 집 30cm 자는 반듯한 금을 위한 것. 인간이 만든 물건에는 그 본질이 정해져 있으나 인간은 그저 여기, 있다.

 왜, 무엇을 위해 태어났는지를 규정하는 본질은 인간 개별들이 만들어갈 다른 생의 가능성을 지운다. 사대부가 거처하던 조선의 기와집 안마당을 보라. 엄혹한 신분제 사회에서 노비가 그의 본질인 양 소녀가 제 몸보다 큰 물동이를 비틀비틀 이고 부엌으로 들어간다.

마당을 쓸던 노인이 어린 도련님을 향해 고개를 90도로 숙이며 존대한다. 하이드는 지킬의 물건으로 탄생했다. 지킬이 19세기가 요구한 신사의 본질에 자신을 맞추려다 사단이 난 것처럼, 하이드는 지킬이 정한 하이드의 본질에 충실했다.

 양심의 가책도 받지 않고 다른 사람에게 들키지도 않는 일석이조의 방법! 내가 나라고 인정하고 싶지 않은 일부를 떼어내어 그가 마음껏 다른 육체로 악행을 저지르는 동안 지킬은 어디 있었을까?

 지킬은 사라졌는가? 약을 먹고 다시 지킬로 돌아왔을 때의 그는 밤의 하이드를 기억해냈고 혀로 핥듯 그날의 생생한 감정과 에너지의 분출을 음미한다. 그림자가 빛의 일부이듯 하이드는 지킬의 일부였다.

 지킬은 하이드를 그것 혹은 그로 타자화해 가리키며 인정하지 않으나 분명 하이드는 지킬이 억누른 그 무엇의 귀환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지킬은 억눌린 무의식의 발현인 하이드를 인정하지 않는다. 빅토리아 시대의 남성들이 여성을 춘희 혹은 마돈나로 이상화하며 실제의 여성성을 억압했듯 자신이 인정하고 싶지 않은 자신을 몰래 데리고 놀다가 다시 억압할 뿐. 무의식은 그렇게 구조화된다.
 
▲‘지킬 속의 하이드’로 계속 살게 하라
 
 누구나 지킬 안의 하이드가 있다. 하이드는 도덕적인 자아와 현실적인 자아가 인정하기 싫은 나의 일부이다. 이 이야기가 흥미를 끄는 건 나 또한 하이드를 내면에 품고 있기 때문이다.

하이드이고픈 충동과 거부를 동시에 갖기 때문이다. 지킬은 타자의 시선의 상징인 초자아와 자아, 본능 사이의 긴장을 견딜 수 없어 분리를 격렬히 시도했으나 어이하랴. 불안은 살아가려는 존재의 필연인 것을.

 나무도 나도 살아있으나, 사람이 가족으로 받아들이기 시작한 고양이와 개도 살아있으나, 인간과 동식물의 살아있음은 다른 근원을 갖는다. 시인이 하늘을 향해 두 팔 벌리고 기도하는 숭고한 존재라 칭송하는 나무는 어떻게 존재하는가. 나무는 다만, 죽을 수 없기에 살아 있다. 그것은 삶과 죽음을 생각하지 않으며 따라서 즉자적 고통은 있되 불안은 없다.

 세상과 내가 관계하는 데서 언젠가는 결단코 도래할 불협화음을 상상하며 인간은 불안을 느낀다.

불안은, 의도성을 갖고 사유하며 행동하는 인간이 숙명으로 짊어진 또 하나의 정체성. 불안은 세상에 던져져 주체적으로 살아가고자 하는 인간이 갖는 실존적 살아있음의 증거. 지킬은 살되 완벽해 보이는 평온한 삶을 바랐고 불안에서 벗어나 훨훨 날고자 한 그의 욕심은 땅으로 추락해 무거운 주검이 되었다.

그러니 불완(不完)과 불안을 피하지도 제거하지도 말라. 내 안의 하이드를 지킬과 대립하는 하이드가 아닌 ‘지킬 속의 하이드’로 계속 살게 하라.
박혜진<문예비평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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