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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년의 눈, 청년의 인문학]알레한드로 곤잘레스 이냐리투의 ‘레버넌트 : 죽음에서 돌아온 자’
복수의 씨앗은 증오의 칼날이 되고
울분의 뿌리 뽑히고 다시 움트는 생
김연우
기사 게재일 : 2019-10-21 06:05:01
▲ 생존과 복수 사이의 끊임없는 줄타기. 생존에만 매달리면 복수를 잊고 복수에만 집념하면 분노에 사로잡힌다. 발걸음이 불같아선 광야를 가로지를 수 없다. 얼음처럼 차갑고 고양이처럼 사뿐하게.
▲선녀는 나무꾼을 사랑하지 않았다

 ‘선녀와 나무꾼’을 꽤 좋아한다. 비록 지금은 예쁜 동화가 아니라 범죄 스릴러로 재평가 받고 있고, 또 충분히 그럴 만하지만. 마음에 드는 부분도 결말뿐이긴 하다. 이 이야기는 결말을 위해 존재한다. 나무꾼에게 날개옷을 받아낸 선녀가 양손에 두 아기를 안고 하늘로 돌아가는 ‘클라이맥스’ 말이다. 어린 날 동화책을 펼친 내게 묘한 카타르시스를 선사한 대목. 선녀는 나무꾼을 한 순간도 사랑하지 않았던 것이다. 아니 설령 어떤 순간에는 나무꾼을 사랑했어도, 선녀는 자신의 높고 숭고한 가치를 되찾아(당연히 그녀에게는 그것이 강요당한 사랑 비슷한 감정 보다 훨씬 중요하니까) 본래의 지위로 돌아간다. 못된 짓을 한 나무꾼은 모든 것을 잃고 혼자가 되고.

 ‘선녀와 나무꾼’의 주인공은 나무꾼이다. 따라서 당연히 이야기는 내내 나무꾼의 심리만을 설명하고, 나무꾼의 욕망만을 긍정하고, 나무꾼의 의지대로 흘러간다. 그러다 결말에 다다라서야 선녀의 감정을 대변하고, 선녀의 판이 되고, 선녀가 원하는 것을 실행하는 것이다. 선녀는 나무꾼을 향한 증오와 울분을 삭히고 삭혔고, 가슴 속에 이는 거센 불길을 식히고 식혔다. 그러다 마침내 그것이 가장 좋은 맛을 낼 때 기회를 얻었다. ‘아이 셋을 낳기 전까진 절대 날개옷을 돌려주지 말라’는 사슴의 충고를 무시한 멍청한 남편, 나무꾼 덕분에. 아마도 이 동화를 읽고 난 복수의 달콤함을 처음 알았던 듯하다.

 설화는 이와 다른 결말들도 많이 전해진다. 예를 들면, 옥황상제가 지상으로 천마를 내려 보내서 나무꾼이 그걸 타고 하늘로 올라와 다 함께 잘 살았다는 얘기(이런 식의 해피엔딩이 도대체 무슨 의미인지 모르겠지만)도 있고. 그렇게 하늘로 올라간 나무꾼이 지상에 홀로 계시는 어머니를 뵈려고 다시 내려갔다가, 어머니가 말에게 뜨거운 팥죽을 쏟는 바람에 놀란 말이 하늘로 날아가고 나무꾼은 다시 지상에 남았다는 얘기도 있고. 하지만 다 사족 같고 그다지 맘에 안 든다. 역시 선녀가 올라가는 장면에서 끝이 나야 한다. 무른 이야기꾼들 같으니! 못된 나무꾼에게는 무엇도 허락하지 않아야 한다고. 조금의 동정이나, 또 다른 기회도.
 
▲복수는 식혀서 먹어야 맛있는 음식

 ‘복수’라는 말을 들으면 떠오르는 부질없는 이름들과 얼굴들. 되돌려 주어야 할 것들을 하나씩 헤아려본다. 금세 심장이 빨리 뛰고 피가 힘차게 돈다. 끝내주게 영험한 약이다. 병든 생, 상상만으로도 기운을 북돋는 걸 보면. 몸이 열병을 앓으면 땀이 나서 노폐물이 배출되고 바이러스가 죽고 하는 것처럼, 누군가에게는 그 ‘상상’이란 것이 주기적으로 접종해야 하는 주사인지도 모른다. 그러니 난 절대 복수 따위 안 한다. 왜냐고? 복수는 식혀서 먹어야 맛있는 음식이니까! 맞다. ‘킬빌’ 시작할 때 나오는 문구다. 하지만 난 항상 이 말이 브라이드보다는 금자씨한테 더 잘 어울린다고 생각한다.

 ‘친절한 금자씨’에서, 영화가 마지막으로 갈수록 스크린이 점점 흑백이 되듯 금자씨의 복수도 꼭 그런 식이다. 붉은 마스카라, 붉은 구두. 금자씨는 표적을 향해 또각또각 걷는다. 돌다리를 밟듯 차근차근, 그러나 벌벌 떨지 않고 성큼성큼. 모든 계획을 마무리한 뒤 하얀 두부 케이크에 머리를 처박고 우걱우걱 씹으며 해치우는 속죄까지. 그렇다. 금자씨는 멋지게 복수에 성공한다. 게다가 죽지도 않고 증오에 잡아먹히지도 않는다. 오랜 복수극에 결국 자신도 먹히고 마는 ‘올드보이’의 이우진과는 다르게. 그러나 그럼에도 그녀는 구원받지 못했다. 아주 나이가 들어서 번뇌와 죄의식의 조금이라도 털어놓을 만큼은 편해졌을까? 제니에게 자신의 굴곡 많은 삶에 대해 넋두리를 늘어놓을 만큼은 괜찮아 졌을까? 그 이후의 생을 집요하게 상상하곤 한다. 내 피는 아직도 차가워지지 않았다.
 
▲복수는 나의 것? 아니, 복수는 신의 것!

 사냥꾼 휴 글래스는 아들 호크, 동료들과 함께 아메리카 대륙을 떠돌며 먹고산다. 험한 여정 도중 글래스는 야생 곰에게 습격당한다. 혈투 끝에 칼로 곰의 급소를 여러 번 찔러 곰을 죽이지만 치명적인 부상을 입는다. 다리가 부러지고, 갈비뼈가 드러나고, 크게 갈라진 살 틈으로 피가 쏟아진다. 인디언들의 머리가죽 벗기기를 좋아하는 동료 존 피츠제럴드는 가망 없어 보이는 글래스가 이 여정에 방해가 될 것이라 판단한다. 그는 다른 동료들이 보지 않는 틈을 타 살아있는 글래스를 죽이려 한다. 이를 목격한 아들 호크가 막으려고 달려들자 그는 호크를 칼로 찔러 죽인다. 글래스는 아무 저항도 못한 채 두 눈 시퍼렇게 뜨고 아들이 살해당하는 광경을 목격한다.

 홀로 버려진 글래스는 고통과 추위와 배고픔과 싸우며 길을 간다. 썩어가는 살점을 구더기가 먹게 하고, 마취 없이 상처를 꿰매어 불로 그슬리고, 극심한 눈보라가 치는 밤이면 말을 죽여 내장을 파내 뜨끈한 가죽 속으로 들어가 추위를 견딘다. 이토록 처절하게 살아남으려 하는 이유는 당연히, 아들을 죽인 원수를 쫓아 죽이기 위해서. 글래스는 눈과 얼음으로 된 벽에 그슬린 나뭇가지로 이렇게 적는다. ‘피츠제럴드가 내 아들을 죽였다.’ 이는 자꾸 잊어버리려는 못나빠진 본능에 스스로의 피로 새기는 문장. 글래스는 생존과 복수 사이에서 끊임없이 줄타기를 해야 했다. 살아남으려는 본능은 그를 복수로 이끌지만 동시에 복수를 방해도 하기 때문이다.

 생존에만 매달리면 마음이 약해져 복수를 잊어버리고, 복수에만 집념하면 분노가 나를 사로잡아 죽고 만다. 잊지 말자. 내 아들을 죽인 자가 버젓이 살아서 간다. 증오의 날은 무뎌지지도 않고 무뎌져서도 안 된다. 하지만 발걸음이 불같아선 이 광활한 땅을 가로지를 수 없으니, 얼음처럼 차갑고 고양이처럼 사뿐하게. 복수와 생존 사이의 줄타기. 그러나 무엇이든 더 우위에 있었을 것이다. 아마도 그것은 복수였을 테다. 꿈속에 나타난 아내는 그에게 이렇게 속삭인다. ‘폭풍이 몰려올 때, 나무 앞에 서서 흔들리는 가지를 보면 금방이라도 쓰러질 것만 같죠. 하지만 뿌리를 단단히 내린 나무는 절대 쓰러지지 않아요.’ 그를 단단하게 붙잡는 것은 복수라는 이름의 뿌리였다.
 
 “그깟 복수 하겠다고 이 멀리까지 쫓아왔어? 그럼 해, 글래스. 그래봤자 네 아들이 살아 돌아오진 않아.”
 “그래. 복수는 내 손에 달린 일이 아니야. 신의 일이지.”
-알레한드로 곤잘레스 이냐리투 ‘레버넌트 : 죽음에서 돌아온 자’
 
▲복수한 자의 영혼은 생존할 수 있을까?

 놀랍게도 영화는 실화다. 서부개척시대 이전 19세기, 필라델피아 출신의 아메리카 대륙 사냥꾼이었던 휴 글래스의 이야기. 그는 곰에게 습격당한 몸으로 버려져 혼자 무려 4000km를 걸어서 살아 돌아왔다. 기적 같은 스토리는 기념비로까지 세워졌으나, 안타깝게도 영화와 달리 글래스는 복수에 성공하지 못했다. 피츠제럴드가 잡히지 않으려고 군에 입대해 버렸기 때문이다. 어쨌거나 이 영화 덕분에 주류 시상식에서 몇 번이고 물먹고 푸대접받던 디카프리오는 아카데미 남우주연상을 수상했다. 영화 자체도 대배우 레오가 대자연 한복판에서 구르고 밟히고 온갖 고생 다 하는 내용. 라스트 샷의 얼굴은 ‘이래도 오스카 안 줄 거야?’ 표정으로 유명하고.

 영화 속 글래스는 복수에 성공한다. 지독한 혈투 끝에 그는 드디어 피에 흠뻑 젖은 피츠제럴드의 육체를 손에 쥔다. 피츠제럴드는 세치 혀로 다시 한 번 그를 조롱하지만, 가만히 듣던 글래스는 복수는 신의 일이라 말한 뒤 그를 산채로 차디찬 강물에 떠내려 보낸다. 글래스는 강 건너편에서 지켜보던 인디언들이 피츠제럴드를 죽이는 것을 지켜본다. 첨벙첨벙 강을 건너온 인디언들은 천천히 글래스 옆을 돌아가고, 빨갛게 물든 눈밭 위에서 그는 다시 혼자가 된다. 남은 것은 지독히 희고 광활한 세상. 그 순간 글래스는 다시 아내를 본다. ‘이제 어떻게 해야 해?’ 아내는 미소로 답한다. 다시 뿌리를 내리라고.

 복수한 자의 영혼은 생존할 수 있을까? ‘오대수, 당신 없이 난 어떻게 살지?’ 올드보이 이우진의 말은 슬프고 허망하다. 어떻게든 꾸역꾸역 살아냈을 금자씨가 좋은 것도 그래서다. 생고생한 레오는 번쩍이는 금 트로피 여러 개 쥐었는데, 진짜 글래스는 남은 평생을 고통과 그리움 속에 살았겠지. 커다란 곰 발톱을 목에다 걸고, 끔찍한 흉터를 훈장이라 달고. 그는 이미 한 번 죽었다. 살아남으려 발버둥 치면서도 복수가 삶을 되돌려 주리라 생각하진 않았다. 마지막엔 그저 강 건너편에서 신이 하는 일을 지켜보았다. 아니, 이건 영화 속 이야기. 신은 글래스에게 기회조차 부여하지 않았다. 그는 세월 저편으로 원수가 가는 것을 속수무책으로 바라보았다. 과연 세월이 그를 체념케 했을까? 그 긴 시간동안 신은 우리에게 무엇을 돌려주었나?
복수란 식혀서 먹어야 맛있는 음식. 금자씨는 멋지게 복수에 성공한다. 게다가 죽지도 않고 증오에 잡아먹히지도 않는다. 그러나 그럼에도 그녀는 구원받지 못했다.
 
▲악당에 대한 측은지심은 단두대의 칼날처럼 서늘하다

 자, 이들처럼 복수하고 싶다면 떠오르는 얼굴들이 여럿 있을 테지? 그러나 인간의 능력이라든지 한정된 인생의 시간이라든지 따져 봤을 땐, 한 명 정도가 딱 적당할 듯하다. 그 한 명을 고르라면 누구를 고를 텐가! 어렵다. 상처를 주거나 배신을 하거나 한 사람은 꽤 있겠지만, 인생을 바쳐 복수할 오직 하나의 대상을 결정하기란 어려운 일이다. 게다가 큰 복수일수록 내 모든 걸 갈아 바쳐야 한다. 그렇게 해서 과연 성공할 지도 모르고, 성공한다 해도 눈덩이처럼 커진 그것이 결국 나를 잡아먹을지도 모른다. 여기까지 생각이 이어지는 걸 보니 역시 난 모든 걸 갈아 바쳐 파괴하고 싶은 대상은 없는 듯하지만, 그래도 떠오르는 ‘한 명’이 있다.

 여덟 살, 전학을 오면서 나는 멍청해졌다. 그랬다고 밖에 설명이 안됐다. 사람들이 나쁜 의미로 나보다 조금 더 커보였고 그들은 언제든 나를 덮칠 수 있었다. 날서있는 공기, 마룻바닥의 중압감, 새파란 컴퓨터 바탕화면 속 울려 퍼지는 파란나라. 그 모든 것들이 터져 고장이 났다. 누군가 내게 말을 걸면 ‘내가 지금 저 사람 말을 못 알아듣나?’ 생각하느라 정말 말귀를 못 알아듣게 되는 식으로. 수학시간에는 곱셈 문제 하나를 못 풀었고 체육시간에는 공을 피하는 시늉도 못하고 멀뚱히 서있었다. 담임은 멸시하고 면박 주는 것이 특기인 사람이었다. 어떤 날은 한 아이가 내 머리로 세차게 공을 날렸고, ‘펑!’ 그때부터 난 타겟이 됐다. 웃고 소리 지르는 아이들 속에서 공으로 얻어맞으며 선생님을 쳐다보면, 돌아오는 건 한심하다는 눈빛 또는 조롱 섞인 미소.
 
 스승의 날, 교실 바닥을 광내가며 닦고 있는 엄마에게,
 “당신 딸 이상한 거 알죠?”
 엄마는 분을 삭이고 창피를 달래며, 책갈피에 돈 봉투도 끼워 드리고 비싼 밥도 먹여 드리고.
 “너도 그때부터 학교생활이 좀 나아졌는지 괜찮아지더라. 그런 시절이었지.”

 놀란 내 얼굴 앞에서 엄마는 태연하게 말했다. 십여 년 만에 처음 듣는 얘기였다. 되짚어보니 묘하게 친절해졌던 때가 있었다. 난 또 내가 좀 똘똘해지니까 그런 줄 알았지. 열 살은 쉽게 마음을 닫지 않으니까. 아무튼 나름 사회적 지위에 걸맞은 윤리의식을 가진 엄마가 불쌍한 딸을 살리자고 했던 일들이 참. 문득 잊고 있던 오랜 분노가 되살아났다. 그날 밤 나는 초등학교 홈페이지에 들어가 그 이름을 검색했다. 당연히 없었다. 그때도 할머니였으니 진작 은퇴했겠지. 찾아서 뭐하게? 더 심한 교사들도 많고, 이정도 기억에 이제 와서 뭔가 따지기도 그렇잖아. 이렇게 생각하면서도 확인하고 싶었다. 그 여자가 명예롭게 은퇴해서 평화로운 노후를 즐기고 있는지. 하지만 알 수 없었다.
 
 그 대신 흥미로운 인터넷 기사를 발견했다. 스승의 날 특집기사, 은사 찾기 서비스를 막아놓는 교사들.

 “어차피 좋은 소리도 못 들어요.”

 제자들은 무작정 찾아와서 그때 나한테 왜 그랬느냐 따지기도 하고, 뜬금없이 돈 빌려 달라 들러붙기도 한다고. 아름답고 훈훈한 서비스는 전혀 다른 의도로 악용되고 있었다. 그 여자도 막아놓았을까? 그럴 만하지. 몇 천개의 댓글들이 분노를 쏟아낸다. 한민족은 한이라더니 우리 세대의 한은 학교에서 비롯되누나. 억울할 것도 화날 것도 없다. 뿌린 대로 거두는 게지. 측은은 하나, 악당에 대한 측은지심은 단두대의 칼날처럼 서늘한 데가 있다. 떨어질 칼날을 거두지는 않을 냉정함 말이다. 하지만 그들을 벌할 칼은 현실에 없고, 아픈 기억과 함께 우리의 머릿속에나 존재한다. 그냥 묻어야겠지, 그런 때였어 하고. 아무튼 당신이 나의 ‘한 명’입니다. 어쩌겠어요? 아이의 말랑말랑한 이마에 첫 기억을 심는 당신의 직업은 이토록 무시무시한 일이었던 걸. 당신이 뿌린 씨앗은 이렇게 무럭무럭 자랐답니다.
폭풍이 몰려올 때, 나무 앞에 서서 흔들리는 가지를 보면 금방이라도 쓰러질 것만 같죠. 하지만 뿌리를 단단히 내린 나무는 절대 쓰러지지 않아요.’ 꿈에서 아내는 이렇게 속삭인다. 그를 단단하게 붙잡는 것은 복수라는 이름의 뿌리였다.
 
▲자신을 파괴하는 건 복수가 아니다

 상처를 씻기 위해 무슨 짓을 벌여도 그 후의 생이란 게 있을 테지. 어떤 달콤함이나 통쾌함으로도 회피할 수 없는. 뭔가 벌일 생각은 없고 그냥 만수무강은 안했으면 좋겠다. 실은 상상은 자주 했었다. 그러나 복수는 신의 손바닥 안의 일. (신이라는 표현이 싫다면 어떤 굴레, 법칙, 수레바퀴, 우주 등등) 살기 위해선 뿌리를, 튼튼한 뿌리를 내려야 한다. 사라지지 않아야 복수도 꿈꿔볼 수 있는 게 아니겠어. 하지만 누군가에겐 상상뿐이더라도 어쨌든 증오는 생기를 돌게 한다. 묘한 일이다. 언젠가 그 증오가 차갑게 식으면, 그걸 무기로 쓸 수 있게 되지 않을까? 그 칼이 상대의 급소를 찌르는 날이 오지 않을까? 오직 신만이 알겠지. 제일 마지막 고리에 달린 것이 칼일지, 꽃일지, 독일지, 약일지. 정말이지 하나도 재미없다.
 
 “네가 잘 사는 게 최고의 복수야.”
 
 재미없는 이 시대에 유일하게 보장된 참 재미없는 답안. 정말 잘 살면 피 튀기는 복수 따위 필요 없다. 잘 산다는 건 나를 이렇게 만든 세상에 대한 복수다. 네가 못살게 굴고 꺾으려 했던 나는 단단히 뿌리내렸으며 탐스런 열매가 주렁주렁 열렸단다. 아니 설령 열매 몇 개 없을지라도 무성한 초록 이파리들이 나의 ‘견고함’을 보여주리라. 굳이 한다면 민트 잎을 얹듯, 꽃으로 장식하듯. 적어도 새벽녘에 머리칼 풀고 눈자위 형형한 채 시퍼렇게 칼 갈고 있진 않겠지. 자신을 파괴하는 건 복수가 아니다. 그건 그냥 자학이고 자해. 뭐야, 그럼 선녀도 가까운 관아로 도망쳐서 신고했으면 되는 거였나? 진짜 내가 행복하면 끝? 아니야. 너는 불행하고 내가 행복해야 완벽한 해피엔딩이지! 뭐랄까, 절로 레오의 마지막 얼굴이 되는군.

 영화든 드라마든, 복수에 성공한 이들의 마지막 얼굴은 왜들 그리 공허하고 슬픈지. 당신을 괴롭히는 것은 징벌 받아 사라졌건만 대체 무엇을 두려워하는지. 복수의 성공 다음엔 왜 잔치가 안 벌어지고 쓸쓸한 눈밭 위 두부 케이크인지. 비릿하고 미련한 복수극은 메리트가 없다. 그래, 신의 일에 신경 끄고 인간인 나는 그저 살기나 하자. 뿌리를 내리고 또 내리고. 뿌리 깊은 나무 바람에 아니 흔들릴 새. 낭만 없는 시대에 제일 무시무시한 흉기는 빛나는 트로피일지니. 식혀먹어야 맛난 음식 따위보단 금의환향에 샴페인 축포가 너한테 먹일 수 있는 최고의 엿 아니겠어? 제기랄! 그러니 이왕이면 내 나무에는 금사과나 주렁주렁 열리면 좋겠다.
김연우 <조선대 국문과 4년, 인문학공간 소피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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