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홍도 사람들<1>- 서필심

 “일본아 대판아 강수나 져라/ 꽃같은 날 베리고(버리고) 일본 대판 간다/ 너냐 나냐 두리둥실 좋고요/ 낮에낮에나 밤에밤에나 참사랑이로구나.”

 노랫소리 흐른다. 바다에 뽀짝 붙은 경사진 삐딱밭, 할매들 엎진 자리다.

 마늘을 심고 있는 중. 어매들은 시방 오로지 흙밭에 골몰해 노랫소리 따라 한 발짝 두 발짝 전진중이다.
 
 “노래 부름서 일하문 일이 더 잘되는 거여”

 “요 사람이 임자여. 우리는 품 갚고 있어. 요 냥반 아자씨가 기계로 밭을 갈아줘갖고 우리는 대신에 요걸(마늘) 숭거주제.”

 박윤자(76) 할매네 밭에서 서필심(90), 김명심(83), 최진님(81) 할매가 일을 거들고 있다.

 “나는 꽂감이 없는디 (밭을) 어쭈고 갈어. 육십도 안돼서 나를 내불고 가갖고 안와. 데꼬 가제만 안 델로와. 잊어불었는 거여, 나를.”

 영감을 ‘꽂감’이라고 찰지게 부르는 서필심 할매가 노래소리의 주인공. 아흔 연세에 일도 소리도 짤짱하고 낭랑하다.

 “넙덕지(일방석)도 나는 안 깔아. 깔문 얼른 안 인나지던만.”

 “우리 영감이 짠뜩 부지런했어, 짠뜩 일욕심이 많앴어”
 라는 말씀, 할매한테도 짠뜩 들어맞는다.

 “노래 부름서 일하문 힘이 나서 일이 더 잘되는 거여. 옛말이 있어. 일하기는 소리가 날개요, 길 걸기(걷기)는 활개가 날개요. 일할 때는 소리가 나야 하고, 걸을 때는 활개를 치고 걸으라는 거여.”

 할매는 고된 일에 날개를 달아주고 있었던 것이다.

 “일본아 대판아 강수나 져라는 홍수나 나불으라고, 물로 덮어불으라고, 그 말이여. 강이 돼불고 바다가 돼불어서 신랑들 안잡아가라는 말이제.”

 “많이 잡아갔제, 많이 잽혀갔제”라고 할매는 일제강점기를 요약한다. 그 말 속에서 가해자와 피해자도 명확히 갈라진다.

 “우리 오빠도 징용으로 잽혀갔제. 5년만엔가, 안죽고 살아왔어. 어매가 맨나 공딜였제. 마당 장꼬방에다가 베 깔고 사그그륵에 물떠놓고 빌고 옹구벵 사갖고 쌀 한 주먹씩 집어옇고. 살아 돌아오라고. 그때는 가이내들도 일본으로 잡아간께 우리 오빠가 면사무소 가서 내 나이를 네 살 내려불었당께. 일본시대는 공출이 징글징글했어. 가을에 나락 훌트문 일본놈들이 논둑에서 다 가져가불어. 검불 속에 포로시 나락을 째까 숨캐서 검불인 것처럼 밀어놨다가 챙개오고 그랬어.”

 징용과 공출로 고통받았던 그 시상을 포로시 건너온 할매에게 “일본아 대판아 강수나져라”는 노랫말에 담긴 원(怨)과 원(願)은 여전히 생생하다.
 
 “나 죽으문 저 손 아까와서 어짜냐고”

 할매는 ‘저건네 섬’(완도 금당도)에서 스무 살에 시집왔다.

 “낙자도 잘 잡고 독문애도 잘 잡고 독우럭도 잘 파고. 내 손이 얼매나 비싼 손이여. 부재(부자) 손이여. 못한 거 없이 다 잘해. 조개도 반지락도 쫌만 파도 바구리로 한나썩 파고. 긍께 나 죽으문 저 손 아까와서 어짜냐고 각시들이 모다 즈그들 주고 가라네.”

 바닥에 갔다오기만 하면 바구리 바구리를 그득그득 채웠다.

 “문애고 낙자고 잡다 보문 미안시롭제. 살라고 너도 이러코 발버둥친디 내가 너를 잡아야 살 수 있응께 어짜겄냐 그래.”

 ‘아깐 손’ ‘부재 손’이 된 내력은 “순전히 자석들 믹이고 갈칠라고.” 딸 다섯 아들 하나를 애면글면 키워낸 그 세월에 후회는 없다만은, 다만 ‘소리 안 배운 것’은 못내 서운하노라는 할매.

 “우리 넷째 작은아부지가 나를 국악 갤친다고 목포 유달산에로 데꼬 갔어. 근디 우리 아버지가 소리 잘하문 기생 질로 나선다고 못하게 말갰당께. 한 달 배우다 말아불었제.”

 째깐해서부터 ‘될 성부른 떡잎’이었다.

 “우리 클 때 꽁꿀(콩쿨)대회라고 있었어. 봉동 뻘등에서 그거 하문 내가 일등하고 그랬어. 그때는 굿도 많이 들어왔어. 봉동 뻘등이 솔찬히 먼디, 기언코 귀경을 갔어. 굿 들어왔다 하문 겨울에도 눈비 퍼붓은 날에도 가. 보러 갈라문 두근두근 재미져. 젊은 각시네하고 가이내들하고 같이 보러 가. 우리 동갑이 열둘이었는디, 그날 굿에서 노래 분것을 밤에 옴시롱 기언코 외불어야 돼. 수대로 오문 이 대목 틀리문 저놈이 갤쳐주고 그러다보문 노래가 첨부터 끄터리까지 다 올케 맞촤져. 벨 노래도 한번 들으문 기언코 외불어야 돼.”

 ‘기언코’라는 말에 근성과 열정이 실린다. “무단시 그래. 노래를 하냥 하고자와.”

 할매가 지금도 “그때나 됐으문 좋겄어”라고 그리워하는 시절은 노래를 원없이 불렀던 시절이다.

 “열다섯 살부터 모내기철이문 비가 오나따나 온 마을에 소리 하러 댕갰어. 큰애기들하고 애기 없는 각시들하고 뽑아서 스물서이씩 상사소리를 하고 댕갰는디 다른 마을에 까장 잘한다고 소문이 났어. 나는 육동마을이 집인디 모른 동네도 가. 복개산 너메 동네도 가고 삼산 봉동 차우리 울포 같은 디도 가고. 그때는 모도 잘 숭그고 상사소리도 잘하고. 재미졌어. 하래 하문 얼마썩 돈도 받았제.”

 할매가 소리를 한다.

 “에헤야 에헤로 상사디여/ 앞산은 점점 멀어지고/ 뒷산은 점점 가차와진다/ 에헤야 에헤로 상사디여/ 알락(일락)서산에 해 떨어지고/ 우리야 일판에 일 떨어지네….”

 몸은 소리를 본능적으로 따라간다. 모 심는 손동작이 천연스레 소리에 따라붙는다.

 “웃녁은 늘어지게 한디 여그 상사소리는 가등가등 날랑날랑 해. 더 날라와. 긍께 일속도가 더 빨라.”

 소리는 일의 완급을, 일판에 일 떨어지는 속도를 절로 결정지었다.

 “못줄 잡은 대장들이 논에서 춤을 추고, 비가 오문 얼굴에야 몸뚱아리야 물이 쭉쭉 흘러도 신이 나서 일을 해. 일이 힘든 것이 아니라 욀로 재미져.”

 고된 일을 욀로 재미지게 하는 그 힘, 소리라는 날개에서 나왔다.

 “못밥은 서숙밥이여. 서숙에 폿조차 수수조차 여코 간을 맞촤서 시리에 쪄서 찰지게 덩얼덩얼하게 해서 줘. 그러코 맛나. 애기들조차 다 믹일라문 그 입을 다 믹일 수가 없응께 새각시들하고 큰애기들로만 짜는 거여. 애기업기가 오문 애기 믹일라 어미 믹일라 논주인네가 힘들어.”

 열다섯 때부터 시집 오도록까지 할매의 봄날은 온통 소리로 채워졌다. 노래 속에 봄날이 갔다.

 “짠뜩 오래된께 인자 많이 잊아불었어. 지금은 여런이 일을 안한께, 기계가 일하고 혼차 일하는 시상인께. 옛날에는 같이 모태서 모내고 김맬 때 맨나 부르고 산께 절로 나왔제.”
 
 ‘오날도 그려보는 그리운 얼굴’ 가슴에 품고

 “보고파도 만날 길 없네/ 오날도 그려보는 그리운 얼굴/ 그리움은 쌓이는데/ 밤하늘의 잔별같이 수많은 사연/ 꽃은 피고져도…” 먼저 떠나보낸 이들 그리울 때면 할매가 가만 불러보는 노래.

 “우리 어매는 나 여덥 살 때 죽어붓서. 어매 상애 떼미고 가는 마지막 길을 무솨서 못 따라갔어.”

 그때 세 살 먹은 동생을 업고 섰던 여덟 살 아이가 아흔 살이 되기까지 ‘영영 이별’이 많았다.

 “영감도 쉰아홉에 가고, 딸 한나도 몬자 가고 아들 한나도 몬자 가고.”

 아무도 모르는 그 눈물을 가슴속에 묻고 산다. 젊으나 젊은 나이에 죽은 큰시숙 아들도 할매한테는 항시 잊히지 않는다.

 “한녕 짠해. 큰시숙 아들이 여수수산학교를 댕갰는디 반란시대 와갖고 집에 와 있다가 군대를 갔어. 강완도 태백산 쪽에 군대가 있었는디 전쟁통에 거그가 전멸돼갖고 뻬다구도 못찾고 실종통지서만 받았제.”

 그때 나이 스물한 살. 죽었는지 살았는지 모르는 채로 무정한 세월만 흘렀다.

 “생일이 시월 스무낫날이여. 큰동세가 살았을 때는 그 아들 생일 때마다 정지에다 생일상을 채려놨어. 밥그륵 복개뚜껑에 김이 서려갖고 물이 떨어지문 우리 아들 살았응께 눈물 떨어진다고 그람서 큰동세가 한녕 밥을 채렸제. 우리 조카 그 머이마가 그러코 자상했어. 생긋이 웃는 얼굴이 눈에 선해. 군인 갔다 첫 휴가 나와갖고 내가 갯것을 이고 온께 맨발로 뛰쳐나와서 바구리를 받아주던 그 모습이 지금도 생각나.”

 ‘보고파도 만날 길 없는 얼굴’들, 노래따라 그리움만 쌓인다.
글=남신희 ‘전라도닷컴’ 기자

사진=박갑철 ‘전라도닷컴’ 기자

※이 원고는 월간 ‘전라도닷컴’(062-654-9085)에도 게재됐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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