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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라도]연홍도 사람들<2>
기사 게재일 : 2019-12-11 06:05:01
▲ “내 맘은 내가 달개고 살아야제” 서해엽.
 “내 이름? 건강한 이름이여.”

 이름 석 자 꺼내놓기 전에 “내 이름은 물짜여”라든지 “요상해” “챙피해” “남자 이름이여” “구식이여” 등등의 말을 갖다붙이는 할매들은 많이 봤지만 ‘건강한’이란 이름자 소개는 처음 듣는다.

 “바다 해자에다 입싹 엽자! 바다에 입싹이 얼마나 건강하요.”

 대체나! 활달한 할매의 말소리에 새파란 바닷물속 너울너울 출렁이는 미역이며 다시마며 톳이며 금세 떠오른다. 섬처녀의 이름은 그러했다.

 “친정에서 부르던 이름이여, 해엽! 근디 시집와서 호적에 올려진 이름은 어째 효엽이 돼불었더만. 효도 효자가 돼붓서.”

 서해엽(86) 할매는 건너 섬인 완도 금당도의 육동마을에서 시집왔다.

 “팽야 그때는 중신해갖고 오제. 근디 이 남자가 친구들이랑 배 타고 금당도 우리 집으로 선을 보러 왔어. 내 손을 잡아봐야 갤혼을 한다고 기어이 악수를 하자그래. 안해주문 안 간다고 고집을 피와. 막 첨에는 안해줬어. 두 번차 왔을 때도 안했어. 근디 세 번차 또 건네왔어. 그래서 카만 생각해본께 그 사람이 그래도 나름 잘났는디 기를 끊어불고 웅지를 꺾어불 수가 없더라고.”

 혼인하기까지 내력에서 뜻밖에 ‘웅지(雄志)’란 말을 맞닥뜨린다.

 “그 사람을 생각해서 나가 온 거여. 나도 큰 반디로 눈을 뜨고 있었제. 요론 섬으로 안 올라고 했어.”

 삼고초려 끝에 혼인에 이른 신랑은 동갑내기, 열아홉 살이었다.

 “신랑은 광주상고 나왔는디, 출세도 할건디 군인에를 못가서 출세를 못했어. 그때는 군인에 가문 죽는다고 논을 여러 개를 팔아갖고 군대 안 가게 한 것이 난중에 어디를 못 들어갔어.”

 인물도 좋고 영리한 사람이었노라는 신랑은 마을일에 골몰했다.

 “이장도 여러 해 했제. 돈을 무서라 안하고 부락 살릴라고 그 생각이 몬차여. 긍께 항상 자기 주머니에 돈이 부족해. 나도 그 뜻을 따라살란께 어쩌겄어. 뒷수발하니라고 힘들었제.”

 할매는 아들 하나 딸 넷을 낳고 키웠다.

 “자석들 있응께 자석들 앞길 내가 밝혀야겄다 그 정신으로 살았제. 서방님 땜에 이래저래 속 낄일 일 많앴어. 그래도 이녁 괴로움을 누구한테 맡기겄어. 내 맘은 내가 달개고 살아야제. 내 속은 누구도 다 몰라.”

 <내 스스로 내 마음을 달래어 가며/ 비탈진 인생길을 허덕이면서…> 이미자가 부르는 ‘여자의 일생’ 같은 그 말씀.
“시방 우리가 그 존 맘들을 잘 잇고 있는가” 이민자.

 하루종일 동동거리느라, 가을해가 짧다.

 오전내 생선 손질하고, 오후엔 밭에 가서 콩 거둬 오고, 쉴참 없이 그물 놓으러 바다에 나갔다가 돌아와선 아까침의 그 콩바구리를 꿰차고 앉은 이민자(67) 아짐.

 “인자 또 바다에 나가야제, 밤 아곱시쯤. 생선 걷어올리러 나가. 우리 아저씨 혼자 할라문 힘든께 내가 쪼까 부축해주제. 어깨동무해주러 가제.”

 집에서나 바다에서나 남편 박영호씨와 평생 2인1조. ‘항꾼에’여야만 가능한 바닷일이다. ‘쪼까 부축’이란 말에 생색일랑 없는 맘 깃들고, ‘어깨동무해주러’란 말에 정다움 어린다.

 “양님꽤로 베개를 비어서 참지름을 보냈어”

 “오전내 생선 땄어, 엊지녁에 잡아온 거. 서울서 택배 주문이 들왔어. 근디 돈이 먼저 와분 거야. 생선이 먼저 가야한디.”

 ‘날 믿고’ 돈 먼저 보낸 그 맘에 답하려 아짐은 몸도 맘도 바빴다.

 “이참 일요일날 비가 온단께 서둘렀제. 비도 오실 때가 있고 올 때가 있어. 짠뜩 가물 때 내리는 비, 맘속으로 짠뜩 지달릴 때 내리는 비는 오시는 거제. 안 지달릴 때 내리는 비는 오는 거고.”

 농삿일 하느라 바닷일 하느라 비에도 바람에도 늘 마음 졸이고 산다.

 “섬에서는 큰바람이 젤로 무섭제. 긍께 바람 땜에 집도 짤망해. 바람 땜에 집을 높으게 못 지어. 딸들이 쩌참에도 집 고치까 그래서 뭔 집을 다시 해야, 몬양 좋은 집이 아니라 바람을 전디는 집이 멋진 집이어야 그랬어. 바람에 안날라가고 전디고 살 만한 집이다 싶은께 고치고 싶은 맘이 없어.”

 생의 바람 앞에도 그렇게 살아왔다.

 “나도 버투는 힘이 있으니까 용기를 내고 살아. 바람이 자꾸 끈덕끈덕 흔들어도 짱짱히 버투겄다 맘을 묵고, 앞을 보고 한 걸음을 내딛고 사는 것이여.”

 시집온 그날로부터 몸뚱이에서 일을 떨쳐본 적이 없다.

 “게우르문 안돼. 자식이 많하니까. 대식구여.”

 딸 다섯 아들 하나를 낳고 키웠다.

 “인자는 택배나 보내주고 뒷바라지나 째까 하고. 택배갈라문 한 가지라도 더 여코 더 채울라고 몸땡이가 바빠.”

 상자 속 ‘빈틈’을 허용못하는 성미는 남들한테 보내는 택배에도 그대로 이어진다.

 “우리 자식들이 머이든 나놔묵기를 좋아한께 얻어묵어 본 사람들이 자꼬 주문을 해싸. 이참에도 참지름 짜서 세명 목시(몫)를 한테다 세 병 보냈어. 그냥 안 보내고 양님꽤(양념깨)를 해서 베개를 비었어. 양님꽤를 봉지에 넣어서 에쓱하니(비스듬하니) 뉩혀서 보냈어. 병을 빤듯이 세와도 그냥 자빨셔도 어짠지 불안하제, 에쓱해야 안심되제.”

 덤으로 챙겨 넣은 깨봉지는 ‘베개’로도 쓸모가 있었던 것.

 “꽤농사 힘들게 했단 맘은 한나도 없고 한 주먹이라도 더 주고자와. 베개를 비어서 보낸께 그러코 내 맘이 좋고 흐뭇해. 그도 볶아서 보냈어. 회사 다닌다더라고. 바쁜 사람들일텐께 그거라도 째까 거들아줄라고.”
 
 “못쓸 것들을 쓰게 맨드는 그거이 나는 좋아”

 아짐은 금당도에서 시집왔다.

 “시댁이 좀 없이 살더라고. 밥할 때문 큰동세가 쌀을 됫박으로 요만하니 내줘. 시어른들 밥 쪼까 뜨고 학교 댕기는 큰동세 애기들 도시락에다 밥 푸고 나문 묵을 것이 없어. 내가 쌀을 더 갖다 할까마니 동세가 쌀을 손바닥으로 눌러놔. 그러문 손 자욱이 딱 나잖애.”

 그 시절, 배고픈 설움을 달래준 이가 있었다.

 “옆집에가 시고모가 사셨는디 ‘이리 온나, 쌀밥 한 그륵 해놨다’ 글고 나를 불러. 눈물을 내면서 그 밥을 묵고 그랬어. 부엌에서 묵제, 어디 감히 방에서 묵겄어. 나 밥 묵는 동안 고모님이 살째기 대문을 닫아걸고 그랬제. 그란께 나도 고모님한테 그런 맘을 느끼고 배왔어. 이러코 해라 말은 안해도 행동으로 보여주고 갤켜주신 것이제. 후제(나중에) 이러코 살으라고, 놈 설운 사정 알고 한녕 베풀고 살으라고. 배움이란 것이 백 살까지 가도 배울 것이 있어. 책상 앞에 앙거서 하는 것만이 공부가 아니라 넘들이 존 모습으로 존 맘으로 사는 것을 내 눈으로 봄서 배울 점이 많더라고.”

 “그 인정많던 어매들 할매들 참 많이도 돌아가셌어”라며 손가락을 꼽아보는 아짐. “시방 우리가 그 존 맘들을 잘 잇고 있는가 나는 한녕 돌아봐져”라고 덧붙인다.

 “옛날에는 벨벨 것들을 보재기에 싸갖고 집마동 팔러 댕기는 아짐들이 많았잖애. 그런 보따리장시 아짐들도 신발 많은 집으로 간다여. 밥 한 그륵이라도 얻어자실라고. 신발이 열인 집은 밥이 어딘가 모르게 한 그륵이라도 남잖애. 짝은 대로 나놔묵을 수도 있고. 신발 둘인 집, 부부간만 사는 집은 고정밥을 하제. 고정으로 양이 정해졌다 그 말이여. 나, 끄니마다 밥 많이 채려드렸어. 아짐들을 우리 부모님이다 성제간이다 생각하고. 잠도 많이 재왔어. 그 아짐들도 그냥 못 가시고 엿장시라문 망치로 엿을 띠어서 앵겨주고. 그러코 서로 정을 주고받고 살았제.”

 자식들한테도 그 존 맘들이 이어지길 바라는 아짐.

 “나는 한녕 콩쪼각도 나놔묵고 어짜든가 욕심부리지 말고 놈의 것은 손톱 끄트머리만치도 돌라묵지 말고 살라고 말해. 생전 부자로 살라, 대박나라는 그 말은 안해. 벌어서 하고 싶은 것 쓰고 싶은 것 다하고 살라 그래. 한녕 저장만하문 행복할 것 같애도 그것이 아니여. 이녁을 위해 쓰는 만치, 또 놈 도와준 만치 오는 행복이 있어.”

 남한테는 후해도 스스로는 검박한 아짐한텐 못쓸 것이 없다. 한사코 고치고 때우고 기워서 오래오래 함께 살고지고. 콩 추리는 바구리 옆에 놓인 플라스틱 바가지는 구멍난 것을 메꾸고 노란 테이프로 야물게 싸맸다.

 “구녁이 좀 났드만. 붙여놨더니 놈들이 보고 다 웃어. 다 웃으지만 괜찮애. 안 새문 되제. 땜빵해서 쓰문 돼. 나 나이 묵드락까지는 괜찮을 성불러. 못쓸 것들을 쓰게 맨드는 그거이 나는 좋아. 시집올 때 가져온 세숫대야 밥통도 다 그제 쓰고 있어. 옛날에는 옷도 다 쭤매 입었잖애. 그런 옷들이 다시 보고 싶드라고. 나는 각설이 같이 쭤맨 옷들이 안보기 싫어. 멋있어.”
“나는 출입옷이 없어. 전부 작업복이여” 권광자.

 초가을 볕의 양명함이 도드라진다. 파란 지붕 위 빨간 고추. 할매의 오늘 하루 이력이 거기에도 써져 있다.

 고추 널어놓고 할매는 시방 밭에 들었다. 방문 앞인 양 흙밭에 신발 얌전하게 벗어놓고, 안방처럼 폭삭하니 비닐밭에 앙겄다.

 “허리가 아픈께 옷 벗을 채비하고, 뽈아서 입을라고 이러고 앙거서 하요.”

 “나는 출입옷이 없어. 전부 작업복이여”라고 입성을 말하는 권광자(73) 할매. 마늘을 심는 중이다. 발목엔 파스를 붙인 채다.

 “엊그제 호미로 칵 찍어붓서. 땅을 판단 것이.”

 “성제간에도 주고 시누도 주고 없는 사람도 주고. 그것이 시골에 사는 재미제. 주문 흐뭇하고 못 주문 서운하고.”

 심으면서 벌써 나눌 궁리중이다.

 “우리 남편은 바다에 고기 잡으러 갔다가 사고나서 돌아가셌어. 무선께 그런 이야기 안할라근디 인자는 되네. 나도 겁나 살았는갑네.”

 그때 남편의 나이 오십 둘이었다.

 “아들 둘 딸 둘인디, 한나도 안 여우고 가셌어. 내가 광주가서 파출부 일하고 댕김서 돈 벌고 즈그가 벌어서 시집가고 장가가고. 여그서 시어무니 시아부지랑 못살아. 아들이 몬자 갔는디 얼매나 슬프시제. 그 저테서 서로 못 전뎌.”

 시부모님 돌아가신 뒤에야 이곳에 돌아왔다.

 “광주도 살 만하더만. 근디 나는 광주서 아파트 사서 살란다 그 맘이 한번도 없었어. ‘집’을 생각하문 항시 여그가 몬자 떠올라. 뭔 존 살림이 생개도 여그 집에 갖고 가야제 그 생각부터 들고.”

 돌아왔다, 집으로. 각시 시절 고생스럽게 일하던 기억도, 재미지게 어울려 살던 기억도 한데 서린 곳으로.

 “저건네 논으로 배 타고 일하러 댕기던 시절도 재밌었제. 이익이 있는지 없는지도 모르고 일을 하고. 지금은 계산해서 안 맞으문 일하러 안 간디 그때는 품앗이잖애. 놈의 일도 다 내 일처럼 하고. 계산 안하고 사는 그 시상이 좋았제.”

 일이라면 지지 않았다.

 “시어무니 시아부지가 일을 겁나 잘하시더라고. 그놈 따라서 할라고 나도 겁나 욕봤네. 하다본께 경력자 됐어. 옛날에는 경력자가 어른 노릇을 했제. 인자 우리 밑으로는 쫄자가 없어.”

 다음날 신양선착장에서 할매를 또 만났다. 할매는 ‘출입옷’ 입고 장봐 오는 길. 두유며 식용유며 닭사료 푸대까지 여러 보따리.

 “추석에 손주들 해서 믹일라고 닭을 한 마리 샀는디 우리 집에 와서 알을 나분께 기양 키우고 있어. 해필사 그때 알을 낳더라고.”

 그래서 이름은 ‘알난’이. 할매 혼자 살던 집에 식구가 하나 늘었다.
“이 손으로 못할 것이 없었제” 김홍권·정금덕.

 섬집 마당의 독아지들은 그냥 나앉아 있지 않다. 시멘트 등으로 야무지게 쌓고 두른 네모난 담장 속에 들앉아 있기십상. 그래야 바람을 견딜 수 있다.

 김홍권(86) 할배와 정금덕(86) 할매도 풍상 섞어친 세월동안 서로 든든한 울타리가 되어주며 한생애를 건너왔다.

 “둘 다 고향이 여그여. 한동네서 혼인했제.”

 할배는 “할매가 나 따라삼서 욕봤어”라고 말한다.

 할배는 마흔 살 무렵 경상도 합천에 가서 금광사업을 벌인 적이 있다.

 “논 열 마지기 폴아서 그놈 짊어지고 친구랑 둘이 갔어. 그때 광주에 간께 광주 사람이 광산 하지 말고 땅을 사시오 그러더만. 그 말을 안 듣고 기어이 광산 일을 했는디 금이 나오잖애 은이 나와, 오래 돼갖고. 갈 때게는 돈을 짊어지고 갔는디 올 때게는 빈털터리여.”

 고향으로 돌아오던 날, 그이의 손에 들린 것은 샛별 담배 한 보루였다.

 “부모가 계신께 빈손으로 올 수는 없고 포로시 담배 한 보루 사갖고 왔당께.”

 부부는 주저앉지 않고 서로가 버팀목이 되어 다시 살림을 일으켰다.

 “둘이 논밭으로 바다로 담박질침서 살았제. 김 해갖고 벌고 고기 잡아갖고 벌고. 돈이 모태질 때마다 한 반디 한 반디 밭을 사고 까끔을 사고.”

 고생스럽게 늘려나간 밭들, 이제는 걸음하기도 힘들어 묵히고 있다.

 “인자 마늘이나 무시나 째까 하제. 밭이 아까와, 쳐다보문.”

 “이 손으로 못할 것이 없었제”라고 말하는 할매. 뱃일 갯일 밭일뿐 아니라 살림살이들도 바구리들도 지어내고 엮어내고…. 떡바구리며 이깝바구리며 마늘바구리들에 할매의 야무진 손길이 고스란히 담겼다.
글=남신희 ‘전라도닷컴’ 기자

사진=박갑철 ‘전라도닷컴’ 기자

※이 원고는 월간 ‘전라도닷컴’(062-654-9085)에도 게재됐습니다.(뉴스검색제공제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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