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복남은 짐승이 되었다. 날카로운 이빨과 손톱 대신 잘 벼린 낫으로. 사람이기를 포기하자 비로소 자아를 손에 쥐었다. 아니, 야수는 오로지 야성을 가진다. 경계도 한계도 없는 야성을. 영화 ‘김복남 살인사건의 전말’.
▲호랑이는 양과 함께 살지 못한다
 
 빗속에 던져진 가여운 연인들. 유리병 안에 갇힌 장미의 마지막 꽃잎은 이내 떨어진다. 벨은 숨이 끊어진 야수를 부둥켜안고 눈물을 흘린다. 그 때 한 줄기 빛이 야수의 몸 위로 떨어진다. 팔과 다리, 얼굴의 털가죽이 벗겨진 그는 어느새 금발벽안의 미남이 된다. 마녀의 저주가 풀렸다. 한참 머뭇대던 벨은 반짝이는 파란 눈동자를 보고 그를 알아본다. 당신이었군요! 둘은 키스하고, 영화는 해피엔딩. 하지만 그 순간 많은 소녀들은 실망했다. 그들이 반한 대상은 왕자가 아니라 야수였기 때문이다. 소녀들은 이미 야수의 무시무시한 덩치와, 북슬북슬한 털가죽과, 날카로운 발톱에 단련됐다. 그리고 스스로 야수의 연인이 되어 야성과 폭력성을 받아들였고 심지어 매료되었다. 잘생긴 게 최고라지만, 소녀들은 잘생긴 것에 그리 간단하게 끌리진 않으니. 애석하게도.

 내면의 아름다움 같은 뻔한 교훈은 치워두자. 야수가 왕자로 탈바꿈하는 마지막 장면은 남자 주인공 교체 급의 충격이다. 소녀들은 그의 내면 깊숙이 숨겨진 인간적인 따뜻함도 애써 발견해줘야 했지만, 동시에 맹수로서의 본성에도 매력을 느끼고 사랑에 빠져야 했다. 그러나 이야기는 들쩍지근한 해피엔딩으로 모든 걸 빼앗아간다. 변화 혹은 상실을 받아들여야 하는 관객의 역할은 고될 수밖에. 두 연인이 어떤 힘든 굴곡을 해쳐나가더라도, 야수는 끝내 사람이 되어야 했다. 그들이 어떤 대단한 사랑을 완성하더라도, 야수는 털가죽을 벗고 매끈한 왕자가 되어야 했다. 왜냐면 짐승이 된다는 것은 ‘저주’이며, 인간끼리의 사랑에 거친 터럭과 날카로운 이빨은 장애물이니까. 인간성의 획득은 궁극의 사랑을 이룩한 연인에게 주어진 값진 보상이었다.

 사람이 가진 무엇이 짐승과 다름을 증명하는 증거가 될까. 보통 인간은 자아를 가지고 있다 한다. 하지만 인간인 나도 자아가 뭔지 잘 모르겠다. 아마도, ‘나는 어떤 사람이지?’ ‘내 행함의 경계는 어디까지지?’ ‘나는 무엇에 살고 무엇에 죽지?’ 이런 질문들에 대한 진솔한 답일 테지. 혹은 그 경계이거나. 하지만 세상에는 인간임에도 자아를 가지는 것을 허락받지 못한 사람이 있다. 평생 자아를 만나지 못한 채 사육당한 사람이 있다. 자아를 가졌음에도 삶에 부정당하고 빼앗긴 사람이 있다. 그들에게 보드라운 살가죽은 해피엔딩이 되어주지 못하며, 곱고 가느다란 손가락은 오히려 족쇄가 되곤 한다. 그들은 자신을 감싼 희멀건 외피를 뚫고 파괴할 수 있는 날카로운 이빨과 발톱이 필요하다.
 
▲이 물건이 아직도 여기 있구나
 
 신도징이라는 남자가 산길을 가는데 심한 눈보라를 만나 말이 달리지 못했다. 초가를 발견하여 들어가 보니 불이 피어있어 아주 따뜻했다. 집에는 늙은 부모와 딸이 살고 있었는데, 여인은 헝클어진 머리와 때 묻은 옷을 입었으나 눈 같은 살결에 꽃 같은 얼굴이었다. 첫눈에 반한 신도징은 그녀를 아내로 맞아 속세로 데려간다. 부부는 딸 하나 아들 하나를 낳아 기르며 행복하게 산다. 긴긴 세월이 속절없이 간 어느 날, 신도징은 아내에게 사랑 가득한 시를 지어 건넨다. 그러나 아내는 잠잠히 읽기만 할 뿐 왜인지 화답은 않는다. 한동안 머뭇대던 아내가 답가를 읊는다.

 ‘부부의 정도 중하기야 하지만 / 산림에 뜻이 스스로 깊어졌소 / 시절이 변할 것을 늘 근심했소 / 행여 백년해로 저버릴까 싶어서.‘
- 신도징 이야기
 
 인간의 삶에 초대된 맹수의 슬픈 이야기다. 호랑이는 어느 눈보라 치던 밤 찾아온 남자를 사랑하게 되었고, 그래서 기꺼이 말랑한 인간으로 살기를 택했다. 사람으로서의 삶을 기꺼이 받아들이며. 그러나 맹수의 몸 안에 안에 잠든, 자신도 쉽게 어찌할 수 없는 것. 그녀는 긴긴 세월 그것을 묻으려 애썼다. 간혹 세월의 참혹함 혹은 삶의 무자비함이 그녀를 화나게 했다. 자주 크게 울부짖고 싶었다. ‘그냥.’ 범의 포효에 이유는 필요치 않으니. 그리고 마침내 벽에 걸린 낡고 헤진 것을 마주한 순간, 그녀는 자신의 시험에 자신이 넘어간 것을 알았다.
 
 신도징은 아내와 함께 집으로 돌아간다. 그러나 이미 초가에 늙은 부모는 사라지고 없었다. 아내는 사무침에 종일 울다가, 문득 벽 모퉁이에 한 장의 호피가 걸려있는 것을 본다. 이윽고 그녀는 크게 웃음을 터뜨리고는 말한다. ‘이 물건이 아직도 여기 있구나!’ 마침내 그것을 집어서 덮어쓰자 그녀는 곧 한 마리 범으로 변하였으니. 범은 으르렁거리며 할퀴더니 문을 박차고 나가버렸다. 신도징은 놀라서 피했다가, 아이들을 데리고 그녀를 찾으며 산을 바라보고 며칠을 크게 울었으나 마침내 간곳을 알지 못했다.
- 신도징 이야기
 
 삶에 무참히 도륙당한 나의 야성이여, 사지를 뻗은 채 못 박혀 고이 잠들어 있구나. 한 방울의 피도 남지 않은 바삭하고 보드랍기만 한 털가죽은 끔찍한 치욕을 안겨주었다. 짐승은 그제야 묻었던 본능을 다시 일으킨다. 아무것도 몰랐으나 결국 범의 피에 독을 푼 격이 된 남편은 아내를 잃고 만다. 하지만 다 죗값이다. 속였으나 끝까지 속이지 못한 아내도, 울타리가 창살이 돼가는 걸 끝내 모른 남편도. 사랑이 진심이라면 본능은 근원이다. 너는 사람과 함께 살 수 없어. 벽장식이 돼버린 것의 속삭임을 알아들은 그녀는 슬펐다. 그리고 기뻤다. 산맥처럼 뻗은 구불구불 검은 터럭 속 맹수의 이빨과 입꼬리가 크게 웃는다. ‘업보’로구나. 잠을 깨고 피가 돌라. 네 주인이 왔도다. 내 살에 옮겨 붙어 나를 삼켜라. 이윽고 한 마리 범이 늦은 포효를 터뜨리자 천지가 요동친다. 떠나라고. 돌아가라고. 네가 온 곳, 너를 기다리는 곳으로.
사람은 알몸으로 있어본지 아주 오래다. 적어도 한꺼풀 이상의 거짓은 늘 걸치는 인간은 말 그대로 약해졌다. 어떤 것도 더하지 않은 나를 드러내는 일이 너무 어려운 일이 되고 말았다.
 
▲복남, 인간의 벽 속에서 분노의 낫을 들다

 푹푹 찌는 여름, 해는 두개골을 쪼갤 듯 타오른다. 휴가를 받은 해원은 친구 복남의 보고 싶단 안달 가득 전화에 어릴 적 살던 무도로 향한다. 해원은 섬사람들의 적대적인 태도에 당황하지만, 복남의 환대와 배려로 모처럼 여유롭게 휴식을 취한다. 그러던 중 해원은 점차 복남의 삶이 정상적이지 않음을 목격하기 시작한다. 남편은 시도때도 없이 때리고, 시어른은 노예처럼 부려먹고, 시동생은 성적으로 학대하고, 섬사람들과 경찰은 묵인한다. 그러나 모든 걸 안 해원이지만 쉽게 나서지 못하고. 복남이 자기와 딸을 서울로 데려가 달라고 간절히 부탁하자 해원은 거절한다. 결국 남편의 우악스런 팔에 밀쳐진 딸이 바위에 머리를 부딪쳐 죽을 때 도와주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인간의 벽 속에서 복남은 미쳐 울부짖는다. 누구 머리를 쪼개려는지 태양이 뜨겁게도 타던 날, 복남은 낫 한 자루를 집어든다.

 인간이 짐승과 다름을 증명하는 또 한 가지는 윤리, 그리고 그에 따라 자신의 행동을 통제하는 능력. 살인은 세상에서 가장 나쁜 죄에 속한다. 한 인간의 존엄성을 해치는 짓이며, 다른 사람의 생을 통째로 빼앗는 짓이니. 극 중반부터 무자비한 살인을 자행하기 시작하는 복남은 그래서 인간이기를 포기한 것이다. 하지만 ‘인간’이 도대체 무슨 의미를 가진단 말인가. 윤리, 도덕, 아니 하다못해 법전 한 줄도 그녀의 삶을 보호해주지 않았다. 어릴 적 복남이 남자애들의 폭력으로부터 구해준 해원조차 친구의 고통을 외면한다. 사방이 눈이고 입. 그러나 그들의 눈은 창구가 되지 못하고 그들의 입 또한 고발하지 않는다. 살로 된 벽, 그 견고한 우리에 갇힌 복남의 삶은 지옥이었으니, 그런 그녀에게 인간성의 상실은 무의미했다. 체념하고 절망하던 복남은 이내 분노한다. 미친 듯이 감자를 캐는 그녀의 귀에 들려오는 평상 위에 앉은 그들의 노랫가락.
 
 ‘세월아 네월아, 오고가지를 말어라. 아까운 내 청춘 다 지나간다.’
 
 고개를 든 복남은 불타는 태양을 노려본다. 내가 어떻게 해야겠어? 영겁의 시간을 절대자로 군림한 붉은 눈은 속삭인다. ‘왕좌에 오르라.’ 그래서 복남은 짐승이 되었다. 자신에게 폭력을 휘둘렀던 것에도, 동조하고 외면했던 것에도. 날카로운 이빨과 손톱 대신 잘 벼린 낫으로. 희한하게도 복남이 사람이기를 포기하자 그녀는 자아를 손에 쥐었다. 아니, 복남이 얻은 것을 자아라는 얄팍하고 특권적인 단어로 표현할 수 있을까. 야수는 오로지 야성을 가진다. 경계도 한계도 없는 야성을. 비로소 ‘삶’이 시작되었다.
 
▲‘영혼’이라는 한 꺼풀 얇은 옷
 
 춥고 삭막한 북쪽에서 살던 한 부녀는 따스함과 풍요를 기대하며 남쪽 마을로 이사를 온다. 그러나 철없는 아버지는 하룻밤 술판에 전 재산을 날리고, 야수와의 카드게임에서 하나뿐인 딸마저 잃는다. 딸은 그 다음날로 야수의 저택에 팔려간다. 거대하고 황량한, 그리고 고독한 야수의 저택은 사람 한 명 살지 않는다. 오직 저택의 주인 야수와 그의 삐쩍 마른 시종, 그리고 하녀용 태엽 인형 하나. 텅 빈 저택의 새 안주인은 창백하고 황망한 얼굴로 침대에 앉아있다. 시종은 한동안 머뭇거리다 말을 전한다. “주인님의 유일한 소원은 옷을 입지 않은 아름다운 아가씨의 알몸을 보는 것입니다.” 그녀는 야수가 선물로 들려 보낸 아름다운 물방울 귀고리를 힘껏 집어던진다.
 
 옷을 모조리 벗는다는 것은 가죽을 벗기는 것과 마찬가지. 처음엔 내가 야수에게 줄 준비가 되어있는 것에 비해 야수가 너무 작은 것을 원했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우리가 맨 처음 무화과 잎사귀로 아래를 감추고 나서부터는 인간이 나체가 된다는 것은 자연스럽지 않다. 그는 끔찍한 것을 원한 것이다. 나는 마치 내 속가죽이 벗겨지는 듯한 지독한 아픔을 느꼈다.
- 안젤라 카터, ‘타이거의 신부’
 
 인간은 오래전에 억센 팔다리를 빼앗기고, 얇고 약한 가죽만을 옷이라는 물건으로 지켜왔다. 비유적인 의미로든 실제로든 사람은 알몸으로 있어본지 아주 오래다. 그게 샤워할 때 남몰래 속옷까지 벗는 일이 아님은 모두 알 것이다. 옷이란 것은 내 몸의 모양을 그대로 흉내 낸다. 우린 남 앞에 설 때 적어도 한 꺼풀의 거짓은 늘 걸치는 셈이다. 인간은 약해졌다. 어떤 것도 더하지 않은 나를 드러내는 일이 너무 어려운 일이 되고 말았다. 얇은 가죽이 무엇을 감추는지는 각자만이 알 터. 어떻게 살아있음을 증명 받을 수 있을까. 어떻게 내가 나인지 확인받을 수 있을까. 답은 모르지만 적어도 누군가에게 알몸을 보이는 것은, 무엇도 흉내 내지 않는 그대로의 나를 들키는 일일 것이다.
 
 아주 강하고 이상한 느낌이 천천히 나를 사로잡기 시작했다. 내가 살아왔던 이치와는 다른 이치에 따라 이들이 산다는 것을 나는 알았다. 이것을 생각하면 여전히 조금은 무서웠다. 그러나 많이 무섭지는 않았다고 할까……. 나는 젊은 여자이며 처녀였다. 남자들은 자신들이 비이성적이면서도 자신들과 똑같지 않은 존재들에게 이성이 없다고 주장하듯 내게도 이성이 없다고 주장했다. 만약 이 황량한 황야에서 한 사람의 영혼도 볼 수 없다면, 그렇다면 우리는 우리 사이에도 영혼이 하나도 없다고 자랑할 수 있을 것이다. 왜냐면 이 세상 최고의 종교들은 모두, 선하신 주님이 에덴동산의 문을 열고 이브와 그 친구들을 내쫓으셨을 때, 야수나 여자들에게는 그 연약하고 말랑한 영혼을 주시지 않았다고 명확하게 단언하기 때문이다. 강으로 난 갈대밭을 달리면서 난 깊이 생각했다. 내가 어떻게 사고 팔렸으며, 이 손에서 저 손으로 넘어갔던가를. 내 뺨에 분을 발라주던 태엽 소녀. 나는 인형 만든 사람이 그 인형에게 준 것과 같은 종류의 흉내 내는 삶 밖에는 배당받지 못한 게 아닐까?
- 안젤라 카터, ‘타이거의 신부’
두 연인이 어떤 대단한 사랑을 완성하더라도 야수는 끝내 사람이 되어야 했다. 짐승이 된다는 것은 저주니까. 인간성의 획득은 궁극의 사랑을 이룩한 연인에게 주어진 값진 보상이었다.
 
▲셋은 그렇게 야수가 되었다
 
 “그 여자는 인간으로서 행동하는데 사람들은 그녀가 남자를 모방한다고 생각한다.” 어딘가에서 들은 말인데 누가 했는지 기억이 안 난다. ‘인간-짐승.’ ‘남자-여자.’ 오래도록 유구했으며 쉬이 뽑히지 않는 이 상하관계는 어떤 이들의 머릿속에서 아직도 생생히 살아 숨 쉴 테다. 무지와 오만으로 건축된 가상의 피라미드, 그 꼭대기에 스스로 갇힌 상위자는 하위자가 자신을 따라한다 착각한다. 자신에게 있는 어떤 것이 그에게는 없다 확신한다. 그들은 우월한가? 어떤 것에서든. 인간은 종종 ‘영혼’을 가졌다고 우쭐댄다. 뻐기기 위해 지어낸 가장 멋진 말 아닐까. 게다가 인간은 짐승과 다름을 그 연약한 두 글자로 증명 받으려 한다. 하지만 이렇듯, 사람이 다른 사람에게 언제나 고귀하지도 않으니.

 야수와 신부와 시종이 한참 말을 타고 달려 도달한 고요한 숲속. 아무도 없는 곳에서 그녀가 처음 알몸을 보인 순간 야수는 한눈에 알아보았다. ‘이것도 당신의 본질은 아니군요. 한 꺼풀 더 남았네요.’ 우린 보통 영혼을 몸 안에 깃들어있는 기(氣) 같은 것이라 상상한다. 그러나 실은 한 꺼풀 옷에 불과한지도 모른다. 허울 안에 갇힌 불쌍한 짐승들인지도. 하위자가 상위자를 이기는 방법은 지혜도 아니며 도둑질도 아니다. 짐승이 행복해지는 방법은 아주 간단하고 아주 위험하다. 연약한 살가죽이 날카로운 발톱에 찢기듯, 말랑한 영혼은 언제나 억센 야성에 진다. 영혼을 가졌다 믿는 사람이 야성을 내뿜는 사람에게 덤비면 무시무시한 일격을 맞는다.
 
 천천히, 천천히, 그는 육중하고 번득이는 몸을 끌면서 다가왔다. 그는 그르렁거렸고, 그 소리에 집이 흔들리고 벽이 춤추기 시작했다. 난 생각했다. ‘다 무너질 거야, 모든 것이 다 사라질 거야.’

 거친 벨벳 같은 그의 머리, 그리고 샌드페이퍼처럼 깔깔한 혓바닥이 내 손에 느껴졌다. “내 살갗을 핥아서 벗겨내려나봐!” 그의 혀가 한 번씩 움직일 때마다 살갗이 하나하나 연속적으로 벗겨져나갔다. 모두 속세의 피부들이다. 이윽고 고색창연하게 빛나는 원초적 털만 남겨졌다. 내 귀고리는 물로 변해서 내 어깨로 줄줄 흘러내렸다. 나는 나의 아름다운 털에서 물방울들을 털어냈다.
- 안젤라 카터, ‘타이거의 신부’
 
 본래의 것을 되찾은 호녀, 자신도 모르던 것이 폭발한 복남, 그야말로 새롭게 태어난 호랑이 신부. 셋은 그렇게 야수가 되었다. 맹렬히 낚아채는, 자비 없이 숨통을 끊는, 뜻대로 먹고 뜻대로 숨 쉬는 존재. 그들 모두 그 반열에 도달한 것은 아니지만. 이유는 다 달랐다. 호녀는 삶의 무름에 대한 반발이었고, 복남은 폭력과 침묵에 대한 분노였으며, 신부는 세상이 배당한 역할에 대한 환멸이었다. 어떤 이는 비극으로 끝을 맺었고 어떤 이는 행복을 손에 쥐었으나, 또 어떤 이는 그저 수미상관. 하지만 그들은 모두 깊은 의미에서 ‘해피엔딩’을 맞이한 승리자다. 자신을 감싼 희멀건 벽, 그 연약하고도 악랄한 외피를 찢고 나왔기에. 그렇다. 싸움의 승자는 언제나 정해져있다. 당신이 사람이라면 깊이 새겨 조심할 것이요, 야수라면 날카로운 발톱을 속이지 말지어다.
김연우 <조선대 국문과 4년, 인문학공간 소피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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