충심(忠心)과 충정(忠情), 그 역설의 보상

▲ 맹목적이고 그릇된 충성은 까마귀의 몸을 태웠고 요정의 목을 갈랐다. 이러한 비극이 그들이 모셨던 주군의 심사가 뒤틀려 일어난 일회적인 것일까. 이데올로기로 고착된 나쁜 전통과 시스템은 우연이 아니다.
▲충성과 애국의 길을 찾는 사람들에게

까마귀 카라스가 허겁지겁 날아와 태양신에게 보고했다. 코로니스 공주가 태양신을 버리고 인간남자 이스키스와 결혼할 거라는 놀라운 정보였다. 밀정의 보고를 받은 아폴론은 처음엔 황망하였고 나중엔 분노하였고 결국엔 보복하였다. 자기 좋다고 아양을 떨 땐 언제고 이제 와서 배신하다니, 태양신을 얕보지 않고서야 이럴 수는 없었다. 아폴론은 화살 하나를 뽑아 시위에 걸고는 보지도 않고 땅을 향해 날려버렸다.

밀정 카라스는 주인에게 충성하고자 잽싸게 지상으로 날아가 다시 헐레벌떡 돌아와서 충직하게 보고했다. 주인의 사랑을 저버린 ‘배반의 장미’가 싸늘하게 시든 것을 보니 통쾌하다고, 그녀 뱃속에 든 배신의 씨 또한 시들어가는 걸 보니 두 배로 통쾌하다고 설레발을 떨었다. 충격을 받은 아폴론은 분노를 참지 못하고 태양에서 불씨를 뽑아 눈부시게 하얀 카라스의 털을 모조리 꼬실라버렸다. 까마귀의 충정에 대한 보상이 어찌 이럴까?

요정 에코가 침을 튀기며 주둥이를 놀리고 있었다. 올림포스 여자들에게 가장 재미있는 이야기는 올림포스 남자들 이야기였고 이야기 중의 이야기는 사랑 이야기가 백미(白眉) 아니던가?

외간 여신과 밀애를 하다 그물에 걸려 공중에 대롱대롱 내걸렸던 아레스 이야기에는 끌끌 혀를 찼고, 나무토막 같은 요정을 스토킹하다 죄 없는 그녀를 나무로 만들어버린 아폴론 이야기에는 야유를 퍼부었으며, 독신주의 여신을 뒤쫓다 허공에 씨앗을 분무해버린 헤파이스토스 이야기에는 배꼽을 대량으로 분실하였다.

밀정 에코가 제우스에게 충성하고자 부지런히 입을 놀려 수다를 떠는 동안 제우스는 지상으로 날아가 인간여자 이오와 격렬한 ‘에로틱 썸씽’에 빠져 있었다. 제우스의 ‘청부수다’에 걸린 헤라가 성격상 그냥 있을 리가 없다.

헤라는 분노를 참지 못하고 평생 세 치 혀로 수다를 떠는 재미로 살던 에코의 입을 봉쇄해버렸다. 남이 하는 얘기만 따라서 할 뿐 스스로 생각한 이야기는 전혀 할 수 없었다. 에코의 충정에 대한 결과가 왜 이럴까?

신분 시대의 충심은 당연히 가져야 할 덕목이었고 계급 시대의 충정은 마땅히 품어야 할 가치로 여겨졌다. 주인을 섬기고 받들어야 하는 자들은 그래서 충심과 충정을 금과옥조(金科玉條)처럼 챙겼다.

수양산에서 고사리 뜯던 상나라 사람 백이와 숙제의 주인을 향한 충심은 얼마나 눈물겨운 일인가? 선죽교에서 철퇴를 맞고 숨진 고려 사람 정몽주의 단심(丹心)은 얼마나 아름다운 일인가? 그리하여 금수(禽獸)조차 감동하여 이를 배우노니, 적토마는 주군을 잃고 곡기를 끊어 보란듯이 그의 충정을 드높이지 않았던가?

그렇다면 충(忠)은 만고불변의 가치라 할 만한 전통일까? 사실 인간이 만든 유무형의 산물들은 대부분 이익이 되기에 만들어진 것들이고, 만들어진 것들 중에 쓸모가 없거나 쓰임새가 다한 것들은 사라지게 마련이다.

충(忠)도 그중 하나여서 받아먹고 싶은 자들이 고귀하게 포장하여 널리 유통시킨 피눈물 나는 ‘감정노동’이 아니고 무엇이랴? 그런데 이 충(忠)에 대한 보상은 어떠했는가? 적절하고 합당한 보상이 이루어졌는가?

무릇 충(忠)이라는 것이 보상을 바라고 하는 것이 아니라고 말들 하지만 보상은커녕 주인에게조차 배신당하는 세상천지의 카라스들과 에코들을 보면 진정 짠하다. 무엇이 그들을 비극으로 내몬 것일까?

▲어떤 우국(憂國), 신민(臣民)을 자처한 우민(愚民)

해질 무렵 현관문을 세게 두드리는 소리를 레이코는 두려운 마음으로 들었다. 현관으로 달려가 떨리는 손으로 문을 열었다. 간유리 건너편의 그림자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으나 남편이 틀림없다는 것을 잘 알 수 있었다. 그 미닫이문 열쇠가 그때만큼 빡빡하게 느껴진 적은 없었다.

때문에 열쇠는 더욱 손을 거역하였고, 문은 좀처럼 열리지 않았다. 문이 열리기도 전에 카키색 외투로 둘러싸인 다케야마 중위의 몸뚱이가 눈과 진흙으로 무거워진 장화를 들이밀고는 현관바닥에 올라섰다. 그는 문을 닫자 자신 의 손으로 다시 잠갔다. 그것이 어떤 의미에서 한 행동인지 레이코는 알 수 없었다.

“어서 오세요.”
밝은 불빛 아래에서 보는 남편의 얼굴은 수염으로 뒤덮여 있었고, 딴사람처럼 초췌해 있었다. 볼은 움푹 패여 광택과 탄력을 잃고 있었다.
“나는 모르고 있었어. 녀석들은 내게 동참을 권유하지 않았어. 내가 신혼이었기 때문이었겠지.”
레이코는 때때로 집으로 놀러오던 청년 장교들을 떠올렸다.

“내일 당장에라도 칙명이 내려지겠지. 친구들은 반란군이라는 오명을 뒤집어쓰게 될 거야. 나는 부하들을 지휘해서 쳐야만 해. 아니, 못하겠어. 그런 일은 할 수가 없어. 내일이면 틀림없이 녀석들을 치러 나가게 될 거야. 나는 도저히 그런 일을 할 수가 없어, 레이코.”

레이코는 똑바로 앉은 채 눈을 아래로 향하고 있었다. 이미 잘 알고 있는 일이지만 남편은 죽음에 대한 이야기를 하고 있는 것이었다. 다케야마의 마음은 이미 정해져 있었다. 그는 고뇌를 털어놓고 있었지만 거기에 머뭇거림이란 존재하지 않았다.

“잘 들어, 레이코.”
다케야마는 맑고 씩씩한 눈을 크게 뜨고 처음으로 아내의 눈을 정면으로 바라보았다.
“나는 오늘밤 할복한다.”
- 미시마 유키오, ‘우국(憂國)’ 중에서

할복(割腹)이라는 것이 신혼의 단꿈을 꿀 시간조차 모자랄 젊은 부부에게 어울리는 말은 아닐진대, 이들은 무슨 사연이 있어 스스로 숨통을 끊으려 하는가? 피치 못할 사연이 있어 부득이 청춘의 꽃을 꺾어야 한다면 혀를 깨물든지 목을 매달아 생을 마감하련만 어이하여 제 배를 몸소 갈라 피투성이 오장을 목도해야만 하는가?

게다가 할복이란 것이 단숨에 끝나는 것이 아니고 질긴 뱃가죽을 한참이나 베어내야 하는 일이기에 그 고통은 또 얼마나 지독할 것인가? 천수를 다하지 못하고 제 목숨 끊어내는 일도 문화의 일속이라지만 이 끔찍한 문화는 대체 어떤 인종이 고안한 것일까?

1936년 2월 26일, 천황의 나라에서 혈기방장한 청년 군인들이 구악을 일소하자는 기치 아래 총칼을 들었다. 혁명에 나선 청년 군인들은 부패한 고위 관료들의 목을 베고 ‘태양의 후예’인 천황이 일선에 나서 일본 제국을 이끌어야만 대동아(大東亞)를 넘어 세계를 황국으로 만들 수 있다고 주창하였다. 천황의 친정(親政)을 도모하던 이들은 소위 황도파로서, 정치에서 천황을 배제하고 군부 중심으로 제국을 경영해야 한다는 통제파를 축출하려 하였다.

황도파의 가상한 뜻은 ‘이틀천하’로 지고 말았다. 고기도 먹어본 놈이 잘 먹는다고, 혁명도 반란도 ‘해본 놈’이 있어야 죽이라도 쑬 터인데 이 ‘젊은 것들’은 송림(松林) 속의 애송에 불과했다. 황도 무리는 노회한 대신들의 시간 끌기와 천황을 볼모로 한 대세 장악에 기가 꺾이고 말았다.

통제파의 회유와 천황의 원대복귀 칙령에 속수무책으로 굴복한 ‘순수 청년’들은 일부는 하는 수 없이 복귀하고 또 일부는 어쩔 수 없이 투항하였다. 이도저도 못한 길 잃은 이들은, 살 가망이 없어서인지 아니면 사무라이의 명예를 위해서인지 자결을 선택했다.
어떤 충성과 애국은 자기들을 혐오하고 이익을 침해한 나라의 국기를 좋아라고 죽어라고 흔들면서 21세기의 거리를 만국기 펄럭이던 20세기의 국민학교 운동장으로 만든다. 자기학대요 마조히즘이 아니고 무엇이랴.

▲충성과 애국, 누구를 위한 가치이며 철학인가

미시마 유키오의 ‘우국(憂國)’은 실화를 바탕으로 쓴 소설이다. 1936년 일본에서 벌어진 황도파의 ‘2·26 사건’을 모티프로 삼고 있다. 작품의 인상비평 만으로도 작가의 황도파에 대한, 천황과 일본의 군국주의에 대한, 그리고 사무라이 전통에 대한 호의적 시각을 엿볼 수 있다.

호의적 시각을 넘어 숭배로까지 볼 수 있는 것은, 작가 미시마 유키오 자신이 훗날 황도파와 유사한 기치를 내걸고 할복했다는 점에 있다.

다케야마의 충심은 누구를 향하고 있는가? 당연히 천황에 있다. 모든 이념은 그것이 성취하고자 하는 가치에 머문다. 천황은 그 자체로 가치가 될 수 없다.

천황은 제국주의적 야망을 실현하고 있는 통제파 군부에 의해 통제당하고 있으며, 일본 군부의 궁극적 목표는 황국의 세계화에 있다. 그러므로 다케야마의 충심이 궁극적으로 머무는 지점은 군국주의와 파시즘에 있는 것이다.

결국 혁명으로 통제파를 제거하려고 했지만 황도파는 그들과 하나도 다를 게 없는 군국주의자요 파시스트였던 셈이다. 다만 다른 점이 있다면 그들은 통제파와 달리 하급 군인으로서 제국이 식민지로부터 벌어들인 이익의 배당에서 소외받고 있었다는 점뿐이다. 이를 두고 어찌 순수 청년들의, 애국 군인들의 거사(巨事)라 하리요? 다케야마의 할복이 결코 숭고하지 않은 이유가 여기에 있다.

나는 이미 여러 차례 우리 시대에 애국심은 자연의 법칙에 어긋나는 불합리하고 해로운 감정이며 인류 고통의 거대한 일부 원인이라는 것을, 그리고 결국 이 감정은 현재에 행해지고 있는 것처럼 길러져서는 안되며 반대로 억제되어야 하고 이성적인 사람들에 의하여 가능한 모든 수단에 의하여 제거되어야 한다는 것을 표명하였다.

그러나 사람들을 파멸시키고 있는 보편적 무력과 파괴적 전쟁이 그와 같은 하나의 감정으로부터 초래된다는 것을 부인할 수 없음에도 애국심의 후진성, 시대착오주의, 해로움을 증명하는 나의 모든 주장들은 침묵, 곡해, 호전적 애국주의(jingoism) 또는 맹목적 애국심(chauvinism) 만이 악하며, 진실로 선한 애국심은 매우 숭고한 도덕적 감정이라는 식의 변함없는 대답으로 아직도 대하고 있다.

이처럼 진실하며 선한 애국심은 무엇으로 구성되어 있는지 우리는 결코 들은 적이 없다. 그것에 대해 어떤 것이라도 언급되면 설명 대신에 우리는 웅변조의 격앙된 구절들을 듣게 되거나 아니면 다른 어떤 개념이 애국심으로 대체된다. 우리 모두가 알고 있는 애국심과는 아무런 공통점이 없는 어떤 것으로, 그리고 그런 결과들로 인해서 심각하게 고통 받고 있는 것이다.
- 톨스토이, ‘애국심과 정부’ 중에서

인류는 1백 년 전에 이미 실질적으로 왕조시대에 종지부를 찍었을 뿐만 아니라 정치적으로 대부분 민주주의를 채택하고 있어 전통적 의미의 충성은 그 가치를 잃었다.

애국 또한 글로벌 시대로 접어들면서 국수적 민족주의는 필수적 이념으로서의 지위를 상실했다. 충성과 애국이 받들어야 할 가치가 있다는 점을 전제로 할 때, 그것의 대상은 무엇이어야 할까?

충성과 애국이라는 말이 단지 문헌학적 의미를 넘어서는 용어로 재활용될 의미가 있다면, 그것이 추구하는 대상이 명백하게 바뀌어야 한다. 그것은 소수 개인이나 집단의 전유물이 되어 불평등을 초래해서는 안 되며 억압과 강제로 이루어져 부자유가 빚어져서도 안 된다. 충성과 애국의 대상은 분명 다수의 이익이어야 하며 공공의 행복이어야 한다.
황군 만세(皇軍 萬世). 인민(人民)을 신민(臣民)으로 만들어 그 위에 군림하는 천황, 그 천황과 인민이 또 다른 국가의 인민을 살육하는 일에 복무하는 다케야마의 충성에는 군국주의만 있을 뿐 공공의 이익은 없다.

▲우국충정(憂國衷情), 공공으로서의 ‘국(國)’에 충성하는 것

일층에 있는 두 개의 방에서 부부는 마치 물이 흘러가듯 담담하게 각자의 준비를 하였다. 중위는 몸을 정화시켰던 욕탕으로 들어갔으며 레이코는 남편의 군복 상하의와 깔끔하게 재단한 무명천을 욕탕 앞에 놓고는 유서를 쓰기 위한 종이를 탁자 위에 가지런히 놓은 후 벼루 뚜껑을 열어 먹을 갈았다.

레이코의 손가락이 먹의 차가운 금박을 슬며시 눌렀다. 벼루의 바다는 먹구름이 퍼지듯 순식간에 흐려졌다. 마모됨에 따라 차츰 매끄러움을 더해가는 먹의 감촉과 점점 축적되어가는 묵향에는 무어라 말로 형용할 수 없는 그림자가 있었다.

맨살 위로 반듯하게 군복을 차려입은 중위가 욕탕으로부터 나왔다. 그리고 아무 말 없이 탁자 앞에 무릎을 꿇고 앉아 붓을 잡고는 머뭇거렸다. 레이코가 욕탕으로 가서 몸을 정결히 하고 엷은 화장을 한 뒤 흰옷을 입은 모습으로 거실로 돌아왔을 때 전등 밑에는 검정 글씨의 유서 한 장이 놓여 있었다.
<황군 만세. 육군보병 중위 다케야마 신지>
- 미시마 유키오, ‘우국(憂國)’ 중에서

청년 다케야마가 생목숨을 끊으며 충성하고자 했던 애국심은 몇 자 되지 않은 그의 유서에 고스란히 드러난다. 황군 만세(皇軍 萬世). 인민(人民)을 신민(臣民)으로 만들어 그 위에 군림하는 천황, 그 천황과 인민이 또 다른 국가의 인민을 살육하는 전쟁을 일으키는 일에 충성하고 있는 것이다. 다케야마의 충성에는 만세일계와 군국주의만 있을 뿐 공공의 이익과 세계평화는 없다.

아폴론의 귀양 시절, 잠깐 만나 사랑을 나누다 그가 천상으로 복귀하자 졸지에 아폴론의 ‘지상 현지처’가 되어버린 가련한 여자를 감시하는 일이 어찌 정당한 일인가? 조강지처 내팽개치고 날이면 날마다 천상과 지상을 오가며 외도를 일삼는 난봉꾼 주군의 엽색 동선(動線)에 연막을 치는 일이 어찌 떳떳한 일인가? 맹목적이고 그릇된 충성은 까마귀의 몸을 새카맣게 태웠고 요정의 목을 잔인하게 갈랐다.

이러한 비극이 그들이 모셨던 주군의 심사가 뒤틀려 일어난 일회적인 것일까? 이데올로기로 고착된 나쁜 전통과 시스템은 우연이 아니다. 고상하고 숭고한 가치라고 여겨지는 이념일수록 ‘유스티티아의 눈’으로 직시해야 한다. 폐기해야 할 이데올로기는 언제나 어디에나 널려 있다.
한국은 충성과 애국으로 충만한 나라다.

어떤 신민(臣民)들은 자신들의 안락한 삶을 파괴하고 조롱한 군주가 인본(人本)과 민본(民本)의 힘으로 옥(獄)으로 갔건만, 그것이 부당하다고 악을 쓰며 파옥(破獄)이라도 할 태세다. 자기학대요 마조히즘이 아니고 무엇이랴. 어떤 애국은 자기들을 혐오하고 이익을 침해한 나라의 국기(國旗)를 좋아라고 죽어라고 흔들면서 21세기의 거리를 만국기 펄럭이던 20세기의 국민학교 운동장으로 만든다. 이적 행위요 마조히즘이 아니고 무엇인가.

특정한 시대의 특정한 지역에서 특정한 무리들이 애지중지했던 야만의 ‘배 가르기’ 할복은 사라졌다. 맹목적 우국(憂國)이 부른 참상(慘喪)의 기억도 세월의 흐름 속에서 잊혀져간다. 할복의 유일한 가치를 찾는다면 제왕 카이사르를 끄집어냈다는 일화의 caesarean section일 뿐 다른 건 없다.

잃어버린 군주를 찾아 거리를 헤매는 우국지사(憂國之士) 아닌 우군지귀(憂君之鬼)를 보노라면 나라와 공공을 위해 제 배 한번 갈라본 일 없으면서도 어찌 민심을 가르고 여론을 가르는 일에는 열과 성을 다하는지 도무지 알 길이 없다.

국가의 상징이라는 태극기를 볼 때 새삼 그 문양의 미려함에 감탄하지만, 이 시절의 거리에서 휘날리는 만국기 물결 속에 고생하는 태극기를 보면 심히 안쓰럽다. 게다가 그 태극기를 부여잡고 표류하는 우민(愚民)의 부평초를 보면 인간 깃대에 매달려 있지 못하고 허공에 흩날리는 정신의 편린으로 비치어 또한 심히 어지럽다.
김시인 <소피움 인문연구소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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