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청일의 독서일기] (14) 홍자성, ‘채근담’, 주변인의 길

홍자성, 채근담(주변인의 길) 표지
홍자성, 채근담(주변인의 길) 표지

[백청일의 독서일기] (14) 홍자성, ‘채근담’, 주변인의 길

우리들은 사람들과 부대끼면서 많은 고민을 하게 됩니다. 스트레스도 많고, 어떻게 해야 할지 막막하기도 합니다. 인간관계를 어떻게 풀어가야 하나? 이럴 때 우리는 보통 이런 내용을 다룬 책을 보거나 권합니다. 처세술, 인간관계론으로 알려진 이런 종류의 책들이 서점에는 많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이런 책들을 고르기도 하고, 읽어 보기도 합니다.

그런데 삶은 사건과 갈등이 늘 여러 모양과 색깔로 반복되다 보니 그때마다 이런 책들을 보는 것에 주저하게 됩니다. 그 이유들은 보통, 비슷한 내용을 담고 있거나, 알고 있는 내용이거나, 훈계조이거나, 그리고 현상적이라고 생각해서.

많이 알려진 또 다른 방법으로, 그럴 때 아무 책이나 펼쳐보라고 합니다. 어떤 책이어도 좋으니, 책장을 훑어보고 마음이 가는 대로 책을 뽑아서 아무 페이지나 펼쳐서 읽어보라고. 그곳을 읽다 보면, 놀랍게도, 그곳에서 지금 고민하는 문제의 실마리를 찾을 수 있습니다. 또는 책을 읽으면서 고민의 실타래가 조금씩 풀리는 걸 느끼기도 합니다.

그런데 이 방법은 시간이 좀 걸립니다. 책을 펼쳐서 곧바로 힌트가 되는 부분과 만나기도 하지만, 대부분은 책을 읽으면서 자기 생각을 정리하다 자신의 고민과 연결되는 부분을 만나게 됩니다. 그런데 책에서 실마리를 얻은 게 아니라, 실은 자신이 그렇게 이해한 것일 수도 있습니다. 어찌 보면, 책을 읽는 시간과 여유 속에서 자신에 대한 건강한 합리화를 하고 있는 건지도 모르겠습니다.

덤으로 하나 더. 게으르다, 욕심이다는 말을 듣더라도, 책을 읽기에는 시간도 마음의 여유도 없으니 좋은 경구들을 모아 놓은 책을 찾고 싶기도 합니다. 그런 책이 있다면, 아무 곳이나 휘리릭, 넘겨 보다 그냥 마음 가는 곳에 꽂히는(!) 경구를 찾고 싶기도 합니다.

검이불루(儉而不陋), 화이불치(華而不侈)! “검소하나 누추하지 않았고 화려하나 사치스럽지 않았다”는 뜻입니다. 김부식이 쓴 ‘삼국사기’ 백제본기 온조왕 15년 기사에 나온 백제문화에 대한 평가를 여덟 글자로 표현한 것입니다. 절제와 세련미를 특징으로 하는 백제미학의 진수를 정확하게 표현하고 있다는 평을 받고 있습니다. 이처럼 짧은 경구에 삶의 지혜를 담아 놓은 책 어디 없을까요?

오늘은, 이럴 때 딱, 어울리는 책을 소개하려고 합니다. 마음은 앞서지만, 쉽게 손이 가지 않을 때, 시간을 들여 읽으면서 생각을 정리할 시간이나 여유를 갖기 어려울 때, 곁에 두고 읽으면 좋은 책, 홍자성의 ‘채근담’(주변인의 길)입니다.

작품 구성과 내용, 지은이

‘채근담’은 동양의 탈무드로 알려져 있습니다. 출판사의 소개처럼, “평생에 한 번은 꼭 채근담을 읽어라”고 할 정도로 삶의 지혜가 담겨 있습니다. 하늘이 무너져 내릴 때, 이 시간이 나에게만 가혹하다고 느낄 때, 신념이 흔들릴 때, 미래가 보이지 않을 때, 원칙에 충실한 삶을 살아갈 때, 심장이 가슴을 뛰쳐 나가려고 할 때, 햇살이 모두에게 공평하다고 느낄 때, 모두가 내 편이라고 생각할 때, 삶의 어느 순간에라도 결코 놓치거나 잃어버려서는 안 되는 것들을 담고 있습니다.

‘채근담’과 관련된 기초정보는 간략한데, 위키백과와 네이버 백과사전, 출판사 소개가 대부분 비슷합니다. 이들을 참고해서 기본 정보를 정리해보겠습니다.

‘채근담’ 작품 구성은 전집 225장, 후집 134장, 모두 359장의 단문으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전집의 주요 내용은 사람들과의 교류, 후집의 주요 내용은 자연에 대한 즐거움을 표현하고 있습니다. 사상의 바탕은 유교에 두고 있지만, 불교와 도교 사상까지 융합하여 보편적인 교훈과 진리를 제시하고 있습니다.

‘채근담’은 명나라 때 홍자성 본과 청나라 때 홍응명 본 두 가지가 전해 내려옵니다. 그런데 20세기 말 두 인물이 동일 인물임이 밝혀졌다고 합니다. ‘응명’이 본명이고, ‘자성’은 ‘스스로 성심성의를 다한다’는 뜻의 호라고 합니다.

홍자성은 명나라 말 만력(1573~1619) 시대 학자로만 알려져 있습니다. 부족한 정보이지만, ‘채근담’에 담겨 있는 내용을 통해 확인할 수 있는 점은, 멸망의 기운이 감돌던 사회 혼란이 극에 달한 시대에 홍자성은 참된 길이 무엇인지를 모색하면서 자신이 깨달은 삶의 지혜를 책으로 담아냈다고 할 수 있습니다.

책 제목 ‘채근담’은 ‘나물 뿌리 이야기’라는 뜻입니다. ‘채근’은 송나라의 학자 왕신민이 쓴 ‘소학’에서 이른, “사람이 한 결 같이 쓴 나물 뿌리를 씹어 먹을 수 있는 마음으로 산다면, 곧 백 가지를 능히 이룰 수 있다”고 한 말에서 비롯되었다고 합니다.

아래 내용은 필자가 책을 읽으면서 가슴에 와 닿는 여러 경구들을 몇 개 분야로 묶고, 필자의 생각대로 제목을 붙이고 풀어쓴 겁니다. 경구가 359개라는 걸 고려하면, 그야말로 맛보기일 뿐입니다. 출판사에서는 전집의 경우 경구 밑에 함께 읽으면 좋을 일화를 소개하고 있습니다. 필자가 생각할 때, 경구와 일화가 들어맞는 경우도 있고, 그렇지 않은 경우도 있습니다. 경구만을 가지고 의미를 되새겨도 좋을 것이고, 출판사에서 소개한 일화들과 함께 생각해 보아도 좋을 거 같습니다.

베푼 마음을 도로 주워 담지 말라

학창 시절이 군사독재 시절이었던 터라 군사문화가 일상과 교육현장을 지배하고 있었습니다. 시험철만 되면 교과목 선생님들의 매타작은 기본이라 교실 뒤쪽 청소함에 있던 밀걸레 대자루가 몇 개씩 부러지기도 했습니다. 엉덩이와 허벅지가 쓰려서 의자에 제대로 앉기가 힘들었습니다. 일상 수업에서도 선생님들의 매타작, 심지어 주먹과 발을 이용한 구타도 일상이었습니다.

학생들 또한 시내의 조직폭력배와 연결된 학교 내 폭력집단의 존재가 학교 전체를 짓누르고 있었습니다. 그래서인지 학기마다 무기정학과 퇴학이 끊이지 않았습니다. 그들의 비위를 거스르지 않으면서도 학생들 사이에서 싸움은 날마다 교실마다 몇 건씩 발생하였습니다. ‘말씀’과 ‘설득’으로 학생들을 대하는 선생님이 없었던 건 아니었지만, ‘학생과’ 선생님으로 대표되는 선생님 문화가 학생들 머릿속을 장악하고 있던 시절이었습니다. 그래서인지 필자에게는 ‘가르친다’는 낱말 자체가 머릿속에 없었습니다.

20대 후반 사회생활을 우연하게 ‘가르치는 일’로 시작하게 되었습니다. ‘2년만 돈을 벌고 구로공단으로 가자’는 생각뿐이어서, 그야말로 돈을 벌기 위해 시작한 일이었습니다. 그런데 아이들을 만나고 대화하고 토론하고 수업을 이끌면서 ‘하나의 세계’를 만나게 되었습니다.

처음 접한 ‘이 세계’가 얼마나 황홀하던지, 9시에 출근해서 수업을 마치고 막차 버스를 타고 돌아오는 6개월여 동안 그렇게 행복할 수가 없었습니다. 한 달에 한 번 이상 일요일마다 아이들을 데리고 답사 여행을 다녔습니다. 1년여가 지나 중고차를 마련한 후에는 일요일마다 아이들을 차에 태우고 답사와 놀이여행을 다녔습니다. 모든 경비를 제가 다 부담했어도 행복했습니다. 아이디어가 머릿속에서 끊임없이 솟아올랐습니다.

그런데 어느 순간, 가끔씩 뒤를 돌아보고 있는 자신을 발견하게 되었습니다. 시간, 돈, 노력, 대가, 희생, 보람, 서운함 등이 자리하게 되었습니다. 연구하고 수업하면서 아이들과 함께 보내는 시간은 즐거운 시간이었지만, 이런 생각들이 공존하게 되었습니다.

살면서 새로운 일을 하게 될 때마다 희열이 가슴을 휘감아 돌고 아이디어가 머릿속을 돌아다니곤 했습니다. 그러나 어느 기간을 지나면 늘 돌아보게 되었습니다. 그러다 보니 어느 순간, 우리네 삶은 이러한 과정이 늘 반복되는 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기도 하였습니다. 그런데 그러지 말아라, 그러지 말아라, 고 다독이는 소리가 들립니다. ‘채근담’이 하는 말입니다.

전집 89. 몸 바쳐 일하기로 했다면 그 일을 의심하지 말라. 의심하게 되면 자신의 결심이 부끄러워진다. 남에게 베풀었다면 보답을 바라지 말라. 보답을 바란다면 베풀었던 마음마저 그르치게 된다.

전집 136. … 은혜와 원한은 지나치게 밝히지 말아야 한다. 이를 밝히면 사람들이 불신하게 된다.

후집 114. 마음이 넓으면 아무리 많은 재물도 질항아리와 같고, 마음이 좁으면 한 오라기의 머리카락도 수레바퀴처럼 크게 보인다.

군자의 길, 지식인의 길

노엄 촘스키. 사진출처=wikipedia
노엄 촘스키. 사진출처=wikipedia

군자는 봉건시대 유교에서 제시하는 유덕한 사람의 ‘표준’입니다. “성인은 내 아직 보지 못하였지만, 군자만이라도 만나 보았으면 한다”(논어, 술이편)는 공자의 말에서 유래했다고 합니다. 이에 따라 유교는 모든 사람이 노력을 통해 도달하는 표준의 인물로 ‘군자’를 설정하고 있습니다. 이치에 어긋나지 않는 규범을 따르는, 높은 도덕성을 가진 사람이 군자입니다(네이버 교육학용어사전). 따라서 모든 사람이 군자는 아니지만, 또한 모든 사람이 노력과 단련에 따라 군자가 될 수 있습니다.

현대 사회에서 군자와 같은 사람은 어떤 사람일까요? 필자는 ‘지식인’이 아닐까 생각합니다. 촘스키는 미국의 세계적인 언어학자이자 비판적 지식인으로 유명합니다. 그는 자신을 가리켜 “나는 ‘세상일을 염려하는 사람’일 뿐이다”라고 낮추지만, 이 한 문장에 그의 삶이 올곧이 담겨 있기도 합니다. 촘스키는 지식인에 대해 다음처럼 언급하였습니다.

“‘인간사에 중대한 의미를 갖는 문제’에 대한 진실을 ‘그 문제에 대해 뭔가를 해낼 수 있는 대중’에게 알리려고 노력하는 것이 지식인의 책무다.” 이를 통해 확인할 수 있는 지식인이란, 지식이 있는 사람으로서 사회에 대해 비판적 사고, 연구, 숙고를 통해 규범적인 문제에 대한 해법을 제안해야 할 사람입니다(지식인, 나무위키). 따라서 “지식이 있는 사람”이 모두 ‘지식인’은 아니지만, 또한 모든 “지식이 있는 사람”이 노력과 단련을 통해 지식인이 될 수 있습니다.

지식인을 여러 기준에 따라 분류할 수 있는데, 주요 활동에 방점을 찍어 보면, ‘이론가’와 ‘활동가’로 구분할 수 있습니다. 물론, 둘을 겸비하는 게 지식인의 과제이겠지만, 이를 이루기는 어렵습니다. 현대의 역사를 살펴보아도 이를 이루었던 사람은 손에 꼽을 정도입니다. 따라서 표준으로서의 ‘군자’처럼, 표준으로서의 ‘지식인’/‘이론과 활동의 통일’을 염두에 두면서, 각 활동에 방점을 찍는 활동을 하는 게 중요하겠지요. 이에 들어맞는 경구가 ‘채근담’에 있습니다.

전집 176. 일을 의논하는 사람은 몸을 그 일의 밖에 두어 이해를 모두 살펴야 하고, 일을 맡을 사람은 몸을 일의 안에 두어 이해의 생각을 버려야 한다. 

“일을 의논하는 사람”을 ‘이론가’로, “일을 맡을 사람”을 ‘활동가’로 볼 수 있습니다. 이론가는 “몸을 일의 밖에 두어 이해를 모두 살펴야” 합니다. 사건과 정세를 객관적이고 냉철하게 분석/“이해” 하지 않는다면, 열정을 앞세워 주관적이고 감정적, 즉흥적으로 분석하게 되겠지요.

활동가는 “몸을 일의 안에 두어 이해의 생각을 버려야” 합니다. 현실에 개입해서 활동하고 닥친 일을 처리하기 위해 “몸을 일의 안에” 두지 않는다면, 마치 “이해”에 밝은 이론가처럼, 평론가처럼, 외부에서 ‘지적질’을 하게 되겠지요.

하지만 봉건시대에 군자의 길이 그러했듯, 현대 사회에서 지식인의 길도 결코, 쉬운 길은 아닙니다. 그 길이 얼마나 어려운지 ‘채근담’에서도 말하고 있습니다. 아래의 경구에서 ‘군자’를 ‘지식인’으로 읽는다면, “지식인의 삶/길”이란, “청렴하고 검소”한 삶의 자세로 “소신”/원칙에 충실하면서도 이를 “지나치게” 드러내지 않는 삶이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전집 98. 청렴하고 검소한 사람은 반드시 사치스러운 자들에게 위선을 떤다는 의심을 받고, 엄격한 사람은 흔히 방종한 자들에게서 답답하다고 미움을 받게 된다. 그러나 군자는 어떤 경우에도 자기의 소신을 지켜야 하고, 또한 지나치게 자기의 주장을 드러내어 상대방과 충돌해서는 안 된다.

학문의 길, 진리의 길

'장기20세기' 표지.
'장기20세기' 표지.

학문의 목적은 무엇일까요? 필자는 ‘진리 탐구’라고 생각합니다. 진리는 “참된 이치/도리” 또는 “보편적인 법칙이나 사실”(네이버 국어사전)을 뜻합니다. 봉건시대에는 진리를 ‘도’라고도 했습니다. 봉건시대에 추구했던 진리가 현대 자본주의 사회에 들어맞지는 않겠지요. 따라서 성인들이 봉건 사회에 맞는 진리/도를 추구하고 밝히려고 노력했던 것처럼, 현대 사회에 맞는 진리가 무엇인지를 밝히는 게 학문의 목적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교육이 일반화되고 평생 교육이 가능한 오늘날은 과거에 비해 객관적인 조건이 훨씬 좋아졌습니다.  아는 것도 어렵고, 실천하는 것도 어렵지만, 진리/도가 무엇인지를 밝히려는 노력이 폭넓게 진행되고 있습니다. 개인적/집단적 차원, 사회/국가적 차원, 사회운동적 차원 등 여러 차원에서 진리를 탐구하려는 노력들이 이루어지고 있습니다. 과거보다 변화의 시간이 압축적으로 빨라지고 있는 오늘날이기에 학문을 게을리 해서는 안 되는 이유이기도 합니다.

‘채근담’에서는 학문을 “끼니”에 비유합니다. “무엇인가 깨닫”기 위해 “물방울”이 “돌”을 뚫듯, 날마다 깨우치라고 합니다. 진리의 내용은 다를지라도 진리를 추구하는 자세는 변함이 없는 거지요.

전집 161. 도덕은 일종의 공중적인 물건이니 마땅히 사람마다 행하게 하고 학문은 날마다 집에서 먹는 일종의 끼니와 같으니 마땅히 일마나 깨우치고 삼가게 하라.

후집 109. 새끼줄로도 톱을 삼아 오래 톱질하면 나무를 자르고, 물방울도 오래 떨어지면 돌을 뚫는다. 도를 배우는 사람은 모름지기 힘써 찾기를 구해야 한다.

후집 124. 꽃을 가꾸고 대나무를 심으며 학을 즐기고 물고기를 바라볼지라도 그 가운데서 무엇인가 깨닫는 것이 있어야 한다. 만약 헛되어 그 광경에 빠져 겉모습만 즐긴다면 이는 역시 들은 것을 그대로 남에게 전하는 것이 고작인 학문이요, 불교에서 말하는 일체가 공일 뿐이니, 어찌 참된 진리를 깨달았다고 하겠는가.

취하지 말고 돌아보라

“로마는 하루아침에 이루어지지 않았다”는 서양 속담이 있습니다. 19세기 영국은 “해가 지지 않는 나라”로 불리었고, 20세기 미국은 ‘발전주의 국가의 모델’이었습니다. 그랬던 나라들이 왜 무너지고 위기를 맞이하고 있을까요?

에드워드 기번은 ‘로마제국 쇠망사’에서 로마제국의 몰락을 번영과 정복의 확대 속에 내재한 쇠망의 원리와 파괴의 원인이 성숙하고, 증가하였다고 분석하였습니다. 조반니 아리기는 ‘장기 20세기’(그린비)에서 자본주의를 제노바, 네덜란드, 영국, 미국으로 이어지는 체계적 축적 순환의 역사로 분석하면서 이를 ‘역사적 자본주의’로 규정합니다. 그리고 각 시대의 위기를 실물팽창의 금융팽창으로의 축적체계의 변동에 따른 체계의 위기이자, 헤게모니 위기로 분석하면서 이를 ‘구조적 위기’라고 진단합니다. 기번과 아리기 모두 쇠망과 위기의 ‘내재성’에 주목하고 있습니다.

‘채근담’에도 이와 연결되는 경구가 있습니다. 아래에 소개하는 후집 122 경구입니다. “술”에 취하는 건 개인이자 사람이지만, “꽃”은 자연이자 세상으로 볼 수 있으니, 필자는 이 경구를 “사람”뿐 아니라 ‘역사를 보는 관점’으로 확장시켜 봅니다.

후집 122. 꽃은 반쯤 피었을 때 보고, 술은 적당히 취하도록 마셔야 그 속에 멋진 흥취가 있다. 만약 꽃이 활짝 피고 술에 흠뻑 취하는 데 이르면 도리어 추해져 재앙의 경지에 이르게 되니, 절정의 상태에 있는 사람은 마땅히 이를 생각해야 할 것이다.

적당히 긴장하며 즐기기

글을 마무리하기 적당한 경구로 아래의 경구를 선택하였습니다. “사람일을 염려하는 사람”(촘스키)의 일인으로서, ‘일상에 치이다 취하지 않으면서도 긴장의 끈에 휘감기지 않을 경구’라고 생각합니다. 개인적으로 ‘채근담’ 359가지 경구 중에서 딱, 하나만 고르라면, 바로 이 경구를 고르겠습니다.

부디, 여러분 또한 ‘채근담’에 푹, 잠겼다가 나오는 행복을 누리기를 바랍니다.

후집 117. 사람이 너무 한가하면 슬그머니 잡념이 일어나고, 너무 바쁘면 참다운 마음의 본성이 나타나지 않는다. 그러므로 군자는 불가피하게 몸과 마음의 근심을 지녀 잡념을 경계하고, 또한 풍월의 취미 또한 즐기지 않을 수 없다.
백청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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