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청일의 독서일기] (15)플라톤 ‘소크라테스의 변명’ 고려출판문화공사

소크라테스의 죽음(자크 루이 다비드, 1787)
소크라테스의 죽음(자크 루이 다비드, 1787)

[백청일의 독서일기] (15)플라톤 ‘소크라테스의 변명’  고려출판문화공사

민주주의! 정신을 깨어 있게 만드는 낱말입니다. 그런데 우리 사회 곳곳에서 민주주의가 제대로 작동되고 있을까요?

이를 확인할 수 있는 방법으로 ‘비판의 목소리’에 대한 반응이 있습니다. 내부와 외부의 비판에 대해 어떤 반응을 보이는지. 각 정당에서는? 각종 기관과 단체, 직장에서는? 사회운동 단체에서는? 초중고 학교에서는? 다양한 인터넷 커뮤니티에서는?

불행하게도 배신자로 내쫓고, 내부고발자로 낙인찍고, ○○충, ○○녀로 이름 붙여 혐오하고, 왕따로 몰아 붙여 괴롭히면서 희생양 찾기에 혈안이 된 모습들을 어렵지 않게 볼 수 있습니다.

민주주의는 근본 원리로 ‘다수결의 원리’를 취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의회민주주의, 간접민주주의라고도 하는 민주주의가 한계가 명확하다는 건 많이 알려져 있습니다. 의견 대립이 발생했을 때 결정을 다수결로 하기 때문입니다. ‘숙의민주주의’, ‘참여민주주의’ 등이 제안되기도 하지만 한계를 극복하지는 못하고 있습니다.

가령, 51:49의 투표 결과에서 51이 다수이기 때문에 51의 의견이 집단/사회/국가의 공식의견이자 모두의 의견으로 인정받게 됩니다. 그러나 51이 모두를 대표한다고 보기는 어렵습니다. 따라서 ‘다수가 옳다’며, ‘다수결의 원리’를 앞세워, ‘다수의 이름으로’ 결정하는 과정은 그 자체로 ‘폭력’일 수 있습니다. 더 심각한 문제는 ‘진리’가, 다수가 아닌 ‘소수’에게 있을 수 있음을 인정하지 않고, 무시, 부정하게 됩니다.

옳음과 진리는 다수라는 ‘숫자’에 있는 게 아니라 반대/비판의 권리를 철저히 보장하고, 들어주면서, 대화하고, 토론하고, 증명하고, 반론하고, 설득하는 과정을 반복하면서 밝혀질 수 있습니다. 확신을 가지고 주장하면서도 ‘진리는 소수에게 있을 수도 있다’는 겸손한 마음을 가지고, 이를 보장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역사는 이게 보장 되지 않았을 때 ‘민주정’이 ‘인민정’으로 타락할 수 있음을 증명하고 있습니다. 오늘은 이를 잘 보여주는 ‘소크라테스의 변명’을 이야기해보고자 합니다.

일반적으로 소크라테스의 죽음을 혼란스런 아테네 인민정의 ‘희생양’으로 읽습니다. 필자는 여기에서 한 걸음 더 나아가 소크라테스의 죽음을 통해, 혼란스런 정세 속에서도 대중 속에서 ‘다수’와 ‘소수’의 변화 가능성을 열어 두어야 대중의 자율성이 발휘될 수 있으며, 이를 통해 대중에 의한 대중의 교육이 가능하다는 것을 말하고자 합니다.

작품의 구조와 변론 내용

작품은 소크라테스의 1차 변론, 2차 변론, 3차 변론으로 이어집니다. 1차 변론 후 유죄가, 2차 변론 후 사형이 결정됩니다. 3차 변론은 반대파와 지지자들에게 하는 변론입니다. 배심원단은 10개 부족에서 각 부족 대표 50명이 선발되어 총 500명으로 이루어져 있고, 판결은 다수결의 원리로 결정합니다.

고소 내용은 두 가지로, 하나는 “예전부터” 제기했던 내용이며, 다른 하나는 “지금” 제기하는 내용입니다. 예전의 고소내용은 “소크라테스가 천상과 지하의 일을 탐구하고 그런 일을 돈을 받고 가르치고 있다”이며, 지금 고소내용은 “소크라테스가 아테네인들이 국가적으로 믿는 ‘신’을 믿지 않았고, 젊은이들을 타락시켰다”는 내용입니다.
아래 변론 내용 소개는 소크라테스를 ‘나’로 하여 서술해보겠습니다.

1차, “예전” 고소에 대한 변론. “사실이 아니다. 나는 지식을 가지고 있지 않다. 그런데 친구 아말 카이로폰이 델포이에서 신탁을 받았는데 ‘소크라테스보다 지혜를 더 갖춘 사람은 없다’고 전해주었다. 나는 지식인이 아닌데, 신의 뜻을 알 수 없어서 그 뜻을 알기 위해 당대 유명한 지식인들을 찾아다녔다. 그런데 지식인들은 자신이 모르는데도 안다고 생각하지만, 나는 모르는 것을 모른다고 생각하는 사실 때문에 내가 더 지혜롭다고 생각하게 되었다. 결국 신의 뜻은 인간의 지혜가 보잘 것 없음을 알라는 것으로 이해했다. 이것을 사람들을 찾아다니면서 돈을 받지 않고 알리는 게 내가 하고 있는 일이다.”

1차, “지금” 고소에 대한 변론. 고발자인 멜레토스와 문답을 주고받거나, 배심원단을 향해 다양한 내용으로 변론합니다. 그리고 “어릴 때부터 신의 음성을 듣고 자란 터라 내가 하는 일은 큰 말이 깨어있도록 달라붙어 있는 등에와 같다. 아테네가 깨어있도록 설득하고 비판하는 일을 멈추지 않는 게 신이 나에게 내린 일이자 여러분에게 주는 선물이다.” 변론 후 배심원단은 280:220으로 유죄 판결합니다.

2차 변론. “나는 벌금형 정도로 형량을 낮춰주라고 구걸하지 않겠다. 그것은 중상모략이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앞으로도 조용히 있지 않겠다. 그것은 신에게 복종하지 않는 것이기 때문이다. 지금까지 해 왔던 일을 계속 하는 게 인간/아테네 시민들에게 가장 큰 선이자 덕을 실천하는 길이다.” 변론 후 배심원단은 1차 투표 때보다 80표가 더 많은 360:140으로 사형을 선고합니다.

3차 변론. 반대파 배심원들에게는 “제가 죽은 후 제가 받은 사형보다 더 큰 형벌을 받게 될 것”이라고 예언합니다. 무죄 투표자들에게는, 처음으로 “재판관들이여”라고 호칭하면서, “죽음이란 좋은 것이기에 희망을 가져야 한다. 그리고 저의 자식들도 제가 했던 것처럼 지식인의 책무를 할 수 있도록 해 달라”고 합니다.

아테네 시민들은 왜 소크라테스를 고소했는가?

펠로폰네소스 전쟁(출처: 위키 백과)
펠로폰네소스 전쟁(출처: 위키 백과)

작품을 형식적으로 분석해 보면, 위에서 살펴본 것처럼 소크라테스는 두 가지 죄목으로 고소당했습니다. 그러나 시대적 배경을 고려해 보면, 전쟁 패배와 사회혼란의 ‘희생양’으로 소크라테스를 고소했다는 걸 알 수 있습니다. 변론에서 지적한 것처럼, 고소의 목적은 유죄 판결이 아닌, 소크라테스를 “해치기 위해서”였습니다.

아테네는 페르시아와의 전쟁에서 승리 후, 델로스동맹을 이끌면서 제국으로 성장합니다. 아테네의 민주정을 그리스 전 지역으로 확장시키지요. 그러나 델로스 동맹기금을 사적으로 활용하면서 동맹 폴리스들의 불만이 쌓이게 되었고 아테네의 제국으로의 확장에 대한 스파르타의 공포가 작용하여 펠로폰네소스전쟁으로 알려진 30여 년 간의 내전이 발생합니다(펠로폰네소스 전쟁, 나무위키).

하지만 아테네는 전쟁에서 패배합니다. 이후 친 스파르타 성향의 30인 정권이 들어서게 되고, 과두정치에 의한 피의 숙청과 공포정치가 진행됩니다. 이에 반발한 쿠데타가 발생하여 민주정이 복원되지만, 민주파와 과두파 사이의 내전이 계속 진행됩니다. 결국, 스파르타의 중재로 과두파 세력을 인정하는 선에서 민주정으로 복귀합니다(삼십인 정권, 위키백과).

이런 배경 속에서 아테네 시민들은 정치 위기와 사회 혼란을 극복하기 위한 대안과 방법을 모색하지 않고, 소크라테스를 법정에 세우는 길을 택합니다. 대중들의 불만을 동원하여 위기를 돌파하려는 술수입니다. 결국, 전쟁 패배의 원인을 알키비아데스와 반대파인 30인 정권의 지도자 크리티아스 등에게 돌리고 소크라테스를 이들의 스승이라 규정하여 법정에 세워 사형을 선고한 거지요. ‘대중의 불만을 동원한 원한의 정치’를 시행한 것으로 평가할 수 있습니다.

소크라테스가 죽음을 선택한 이유

소크라테스는 당대의 전통을 따르지 않습니다. 호메로스의 ‘일리아드’와 ‘오디세이’에 나온 이야기를 전달하고 구절들을 암송하지 않습니다. 전쟁 영웅들의 ‘덕’(아레테)인 ‘용맹성’을 찬양하지도 않습니다. ‘델피 신탁 사건’으로 알려진 일을 경험한 후, 소크라테스는 ‘인간’을 찾아다니며, 자연현상과 전쟁 영웅담이 아닌, 아테네 시민으로서 지녀야 할 덕목들에 대해 질문하고 토론합니다. 비로소 소크라테스에 의해 철학이 새롭게 탄생하게 되는 거지요(배철현, 2017).

또한 소크라테스는 혼란한 사회 상황 속에서 퍼져가던 회의주의와 상대주의와도 거리를 둡니다. 아테네는 페르시아 전쟁 승리 후 전성기를 맞이하지만, 펠로폰네소스 전쟁 패배로 인한 혼란기를 경험합니다. 추앙의 대상이었던 ‘용기’의 덕목 또한 퇴락해 가고, 회의의 대상이 되어 갑니다. 하지만 소크라테스는 대화법을 통해 근본적인 질문을 던지면서 덕의 본질을 캐어묻습니다. 소크라테스는 보편타당한 덕으로서 ‘영혼’을 제시합니다. “그대의 영혼을 돌보라”는 소크라테스의 말은, 순전히 인간에게서만 고유하게 발견될 수 있는 차원으로서의 ‘정신’을 말합니다. 인간 최초로 영혼을 ‘정신’으로 파악했으며, 이것이야말로 인간의 ‘덕’이라고 본 거지요(박주영, 2018).

하지만 소크라테스는 고소를 당해 법정에 서게 되었습니다. 필자가 생각할 때, 소크라테스의 위대함은 이후에 더 빛이 납니다. 소크라테스는 자신의 생사여탈권을 쥐고 있는, 어찌 보면, 결론이 짜여 져 있었던 500명의 배심원단 앞에 섭니다. 그리고 자신이 평생 동안 했던 일과 신념을,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고, 소신대로 당당하게 밝힙니다. 사형판결을 받은 후에도 그 당당함을 잃지 않고 오히려 저주스런 예언을 하고, 지지했던 시민들과 동료들을 위로합니다. 때문에 의료계의 ‘히포크라테스 선서’처럼, 철학계의 ‘소크라테스 선서’가 있다 해도 전혀 이상할 게 없습니다.

소크라테스가 죽음으로 알리고자 했던 것은 무엇이었을까요. 자신이 ‘소수’임에도, 신의 뜻이, 진리가, 자신에게 있다는 것입니다. 따라서 소크라테스의 죽음을, 아테네 시민들에 의해 죽임을 당했다는 소극적 측면에서 접근하면, 소크라테스의 이런 의도가 잘 드러나지 않습니다.

소크라테스는 아테네의 현 정세를 가장 잘 알고 있었던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전쟁 패배, 공포정치와 쿠데타, 잇 달은 내전, 정치 위기와 사회 혼란 속에서 옳고 그름이, 인간이 추구해야 할 ‘덕’이, ‘영혼’이, ‘정신’이, 제대로 자리 잡지 못하고 있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습니다. 때문에 소크라테스는 자신을 “지식인이 아니면서도” 또한 “지식인”이었기에 중상모략, 협박과 회유, 명예와 돈을 밝히는 사회 현실에 당대의 석학들이었던 ‘소피스트들’이 무책임하게 방기한, 대중이자 지식인으로서의 책무를 성실히 수행하는 것이 자기의 일이라는 것을, 죽음으로, 증명했다고 할 수 있습니다.

폴리비오스의 ‘정체순환론’

폴리비우스(출처: 위키백과)
폴리비우스(출처: 위키백과)

폴리비우스는 헬레니즘 시대 그리스의 역사가입니다. 헤로도토스, 투키디데스와 함께 대표적인 그리스 역사가로 꼽힙니다. 그의 ‘정체순환론’은 중세에는 망각되었다 마키아벨리, 몽테스키외, 알튀세르에 의해 다루어졌습니다. 아래는 윤소영 교수의 <폴리비오스의 ‘정체순환론’>(2017)을 참고하였습니다.

폴리비오스의 정체(정치체제)순환론의 골격은 군주정 - 귀족정 - 민주정입니다. 이를 세분해서 살펴보면, 군주정이 참주정으로 타락하면서 대안으로 귀족정이, 귀족정이 과두정으로 타락하면서 대안으로 민주정이, 민주정이 인민정으로 타락하면서 대안으로 군주정으로 회귀합니다.

폴리비오스는 이처럼 영원회귀처럼 보이는 정체순환을 중단시킬 수 있는 방법이자 최선의 정체로서 군주정, 귀족정, 민주정 세 정체의 장점을 결합한 혼합정체를 주장합니다.

그리고 이를 실현하였던 국가로 로마 공화정을 사례로 제시합니다. 원로원(상원)을 중심으로 한 로마의 공화정은 본질적으로 귀족정의 성격을 띠지만 군주정적 요소인 집정관(통령)과 민주정적 요소인 민회(하원)를 결합함으로써 과두정으로 타락하는 것을 예방할 수 있었다는 거지요.

폴리비오스의 혼합정체론에 주목하는 이유는, ‘민주정이 인민정으로 타락할 가능성이 있으며, 이는 결국 군주정의 순환이 다시 시작될 것’이라고 예상했기 때문입니다. 그의 예상대로 로마는 그라쿠스 형제의 개혁을 계기로 공화정이 중단되고 ‘민주정’이 시작되었는데, 이는 다시 마리우스의 ‘인민정’을 거쳐 카이사르와 아우구스투스의 ‘군주정’의 출현으로 연결되었습니다.

‘인민정’은 ‘인민주의’라는 정치이념이 지향하는 정치체제입니다. 그렇다면 인민주의는 무엇일까요?

“인민주의는 경제위기와 정치위기에 따른 대중적 불만에 기초하여 태동한다. 기존 정치에 대한 거부와 공격을 주된 내용 … 무능하고 부패한 정치가와 정치제도를 ‘적’으로 규정하는 ‘원한의 정치’를 통해 대중을 동원한다.”(정인경, 박정미 외, 2005).

이를 좀 더 풀어서 설명해 보겠습니다. 인민주의는 위기에 대한 대안이나 전망을 제시하지 못하면서 미디어와 대중 집회를 통해 대중의 불만과 원한을 동원하여 반대 정치 세력을 ‘적’으로 공격합니다. 의회에 대한 불만과 불신을 조장하고, 엘리트집단을 기득권집단으로 매도하면서 대중적 불만을 집중적으로 동원합니다. ‘적’과 ‘우리’의 이분법적 대립구도를 형성하는 정치이념입니다. 따라서 인민주의가 지향하는 정치체제는 인민정인데, 인민주의를 통해 “민주정이 인민정으로 타락”하게 된다고 할 수 있습니다.

소크라테스의 죽음으로 당대 아테네 민주정이 인민정으로 타락했음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불행하게도 이런 현상은 오늘날 우리나라를 포함하여 전 세계를 휩쓸고 있는 현상으로 분석되고 있습니다.

대중들이 스스로를 정치적 주체로 세우는 길

대중의 한 사람이자 지식인이었던 소크라테스는 아테네 시민들을 늘 깨어 있게 하려고 노력했습니다. 왜 그랬을까요? 대중들이, 시민들이 스스로 깨어 있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이것은 어느 한 사람의 힘으로 가능한 일은 아닙니다. 소크라테스 또한 사회적, 시대적 한계를 알고 있음에도 그 일을 할 수밖에 없었고, 결국 죽음을 맞이했지요. 그가 세계의 위대한 성인으로 추앙받는 이유입니다

오늘날은 당대 아테네 사회와 비교할 수 없을 만큼 사회적 조건이 향상되었습니다. 한국의 경우, 2019년 고등교육이수율(25~64세 인구 중 대학을 졸업한 인구의 비율)은 50.0%에 이릅니다(국가지표체계). 대중들이 스스로를 정치적 주체로 세울 수 있는 사회적 조건은 좋아졌으며, 방법 또한 다양해졌습니다. 세계적으로 심화하고 있는 인민주의 현상이 한국에서도 진행되고 있는 오늘날, 이에 맞서 대안을 모색하고, 전망을 찾는 것도 결국 대중이자 시민들인 우리들의 몫입니다.

스스로를 정치적 주체로 만드는 것은 대중 스스로 해야 할 일이자 대중에 의존 해야만 할 일입니다, 때문에 이는 ‘대신 될 수 없는 길’이자, ‘대중의 자율성을 통해서만 가능한 길’입니다. 따라서 대중은 ‘스스로를 교육’해야 하고, 항상 ‘소수’가 다수가 될 수 있는 가능성을 열어 두어야 합니다. 또한 현실/운동 속에서 대중은 끊임없이 ‘다수’와 ‘소수’로 변화하기 때문에 모든 성과와 오류는 대중 속에서 나와서 대중 속으로 들어가야 합니다(백승욱, 2012).

오늘날 소크라테스가 살아 돌아온다면, 어떨까요? ‘소수’임에도 소신을 굽히지 않았던 소크라테스. 그는, 오늘날은, 죽지 않을 수 있을까요? 우리가 대중의 한 사람으로서, “늘 깨어있음”을 유지하며 ‘무엇을’ ‘어떻게’ 할 것인지를, 항상, 연구해야 하는 이유입니다.
백청일 (담양군민)

참고문헌

플라톤, 소크라테스의 변명, 고려출판문화공사, 1989.
백승욱, 중국 문화대혁명과 정치의 아포리아: 중앙문혁소조장 천보다와 조반의 시대, 그린비, 2012.
윤소영, 폴리비오스의 ‘정체순환론’, 위기와 비판, 공감, 2017.
정인경, 박정미 외, 인민주의 비판, 공감, 2005.

고등교육이수율, 국가지표체계,
https://www.index.go.kr/unify/idx-info.do?idxCd=8024(검색일: 2021. 5.11).
박주영, 이봐, 소크라테스!: 역사상 가장 창의적인 인간, brunch, 2018. 3.31,
https://brunch.co.kr/@nomadia/10(검색일: 2021. 5. 6).
배철현, 소크라테스는 왜 죽음을 불사하며 아테네 시민에게 질문을 던졌나, Chosun Pub, 2017. 1.17,
http://pub.chosun.com/client/news/viw.asp?cate=C01&nNewsNumb=20170122670&nidx=22671(검색일: 2021. 5. 6).
삼십인 정권, 위키 백과,
https://ko.wikipedia.org/wiki/%EC%82%BC%EC%8B%AD%EC%9D%B8_%EC%A0%95%EA%B6%8C(검색일: 2021. 5. 6).
펠로폰네소스전쟁, 나무위키,
https://namu.wiki/w/%ED%8E%A0%EB%A1%9C%ED%8F%B0%EB%84%A4%EC%86%8C%EC%8A%A4%20%EC%A0%84%EC%9F%81(검색일: 2021. 5. 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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