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 초등학교 앞 사거리, 플래카드 하나가 눈에 들어온다. 〈○구민의 승리이자 대한민국의 승리입니다-당선자 ○○○〉. 지난 총선으로 국회에 입성한 어느 당선자가 내건 플래카드다.
길 저편에 또 하나의 플래카드가 있다. 〈저는 여전히 ○구민을 사랑합니다〉. 같은 지역구의 낙선자가 내건 플래카드다. 총선을 기점으로 서로 입지가 뒤바뀌어 버린 두 사람이 내건 `거리의 편지’인 것이다.
자신의 승리는 탄핵정국이라는 기회 덕분이 아니라 구민의 승리이자 나라의 승리라는 당선사례도 대단하지만, 너희들은 비록 나를 낙선시켰을지라도 나는 여전히 너희들을 사랑하겠노라는 낙선자의 변이라니. 참으로 놀랍다.
이는 핍박받는 예수의 입에서나 나올법한 말이 아니겠는가. `너희는 비록 나를 버릴지라도 나는 끝내 너희를 버리지 않을 것이니’ 하셨던. 정도 차이가 있을지언정 두 개의 다른 플래카드는 결국 하나의 같은 메시지를 전하고 있을 뿐이다. 그것은 바로 `오만’이라는 메시지다.
사실 선거가 끝난 뒤, 거리에 플래카드를 거는 데는 분명한 이유가 있을 것이다. 이 다음을 보겠다는 것일 텐데, 그렇다면 오히려 `나를 떨어뜨린 민의를 뼈 속 깊이 새기고 새롭게 정진하겠노라’는 표현이 마땅할 것이다.
그런데도 이토록 오만이 가득한 메시지를 수십 장씩 프린트해 거리거리에 내건 이유는 무엇일까. 결국 선거 이전에도 선거 이후에도 그들은 유권자와 다른 곳만 보고 있었다는 이야기다.
선거결과 또한 자책과 반성이 아니라 배신감으로 되돌려 받았다는 사실을 이 오만의 메시지가 보여주고 있는 것이다.
이는 숱한 갈등과 고민 끝에 붓도장을 찍어야 했던 유권자들의 진정을 헤아리기에는 어느 순간 그들의 촉수가 너무 둔해져 버렸거나 멀어져 버렸다는 의미가 아니겠는가.
꽃 한 송이도 그렇다. 그냥 피어있을 때는 꽃이지만 내 손에서 누군가의 손으로 전해질 때는 건네는 이의 마음을 전달하는 미디어가 된다. 그래서 장미를 고를까, 국화 한 송이를 건넬까, 은박지로 뿌리를 감쌀까, 투명한 비닐에 담을까, 고민을 하는 것이다.
플래카드는 꽃처럼 에둘러 마음을 읽어낼 여지조차 없는 강력한 메시지고, 빼고 더할 것이 없는 가장 직설적인 미디어다. 그러니 차라리 숨기는 편이 더 좋았을 그런 `오만’을 거리에 내걸 필요는 없다. 황급히 내건 플래카드 몇 장으로 민심에 답할 필요는 더더구나 없다.
김인정 〈광주 MBC 방송작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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