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연을 알리는 플래카드 같은 것은 없었다. 지하철역 구내에 흩어져 있던 의자들을 한 군데 모으자 객석이 되었다. 음악이 흐르면서 조용히 연극은 시작되었다. 연기자 1명, 공연 상황을 촬영하는 사람 1명, 흘깃흘깃 쳐다보다 이내 발걸음을 옮기는 관객 십 수명…단촐하다 못해 적막한 공연이었다.
19일 오후 6시30분 남광주지하철역 안. 지난 17일부터 시작된 예기플라타너스의 오월연극 〈세가지 사랑〉이 펼쳐졌다.
20분 남짓 공연이 진행되는 동안 무심히 지나치는 이들이 대부분이었지만 공연하는 임혜영(51)씨나 그 공연장면을 비디오카메라에 담는 남편 신영철(51)씨의 몸짓에는 어떤 작은 동요도 없었다.

〈51817〉 〈잊지 마세요〉 등 광주 연작 10편째
“관객 수에 개의치 않는다. 다만 누군가 한 명이라도 마음 나누는 순간 있다면 그걸로 된 것”이라는 게 임씨의 말.
어떤 종류의 속박도 억압도 싫어하는 예기플라타너스의 공연은 `어느날 어느곳에서 불현듯’ 펼쳐진다. 홍보같은 건 해본 적 없다. 자유로운 나눔, 비강요, 우연한 스침…. 이번 오월극 역시 마찬가지. 경기도에서 살고 있는 이들이 공연작을 갖고 `오월 광주행’을 해온 것은 지난 98년부터다. 광주연극 연작만도 〈51817〉 〈후이넘에서 돌아와〉 〈잊지 마세요〉 〈겨울여행〉 등에 이어 올해로 10편째. 이번 광주 공연에선 오월을 담은 〈세가지 사랑〉과 통일염원을 담은 〈마임페스티벌〉 두 작품을 번갈아 하고 있다.
원래 예정작은 〈헤어진 다음날〉이었다. 윤상원 김영철 박효선 세 사람의 삶을 담은 작품. 하지만 예정작을 올리진 못했다. 필요한 `세 명의 남자 연기자’를 구하지 못했기 때문. 예기플라타너스는 고정된 구성원이 있는 조직이 아니다. “그때 그때 그 작품의 취지에 동의하는 이들이 결합해서” 함께 움직인다. 인터넷 게시판에 가령 `오월 순례에 동행할 사람을 찾습니다’란 제목으로 작품내용과 공연 일시 등을 올려 사람을 모으는 식이다. 보수도 지원도 없는 일. 그러니 작업 진행이 어려울 수밖에 없다. 하지만 신영철씨는 `때문엷란 핑계를 대본 적이 없다. 5·18 관련단체 등에 지원을 요구할 수도 있겠지만 그는 오월공연을 하면서 돈을 받는다는 생각을 `못하는(안하는)’ 사람이다.
“핑계란 기실 마음없음의 또다른 표현일 뿐. 무대가 없으면 길거리에서 하면 되고 배우가 없으면 내가 하면 되고….”
아내 임혜영씨 역시 `배우가 없으면 내가’라는 차원에서 연극을 하게 된 경우.
신영철씨는 80년 신군부에 의해 강제폐간된 신아일보 문화부 기자 출신. 연극기획 등의 일을 하다 자연스레 연극인생을 살게 됐다. 하지만 그가 해온 연극은 돈될만한, 이름을 낼만한 연극은 아니었다. 그저 마음이 시켜서 하는 연극이다.
그는 “어떻게 살아야 하나라는 물음에서 광주와 맞닥뜨리지 않을 순 없다. 80년 5월에 나는 광주에 있지도 않았고 광주와는 아무런 연고도 없지만 한국에 태어나 그 시기를 살아낸 사람들이라면 누구나 광주에 대해 빚이 있으며 광주로부터 얻은 것들이 많다“고 말한다.
지하철공연 기획사 `레일아트’에서 나온 `행사’ 비표 하나 달고 오로지 `지하철 무료이용’ 특권(?) 하나밖에 없는 채로 그와 아내는 광주에서의 공연순례를 계속하고 있다. 밥은 먹거나 안먹거나, 잠은 노숙하거나 게스트하우스를 이용하고….

신영철 임혜영 부부 연출·연기
지난 17~18일엔 도청을 순례하러 갔다. 도청에서의 마지막 새벽, 죽음을 결단하던 사람들의 마음을 새삼 느끼고 싶어서. 그러나 배낭을 메고 두리번거리던 이들은 곧 경비한테 제지를 당해야 했다. 뭐하러 왔다갔다 하느냐는 것. “도청을 둘러본다. 나무도 보고 창문도 보고 하늘도 올려다 보고…”라는 이들의 대답은 그러나 소통되지 못했다. “도청 앞엔 사적지 표지석도 있는데 다른 때도 아닌 5월17·18일에 `도청을 둘러본다’는 말이 이해되지 않는 게 현실인 것 같다”고 그는 말한다. 광주에서마저 `오월의 단절’을 느끼게 된다는 것.
오월이 이제 축제가 돼야 한다는 의견에 대해 그는 “축제를 할 사람은 하도록 내버려 두어야 하지만 그게 내 몫은 아닌 것 같다”고 말한다.“누군가 아직 한 사람이라도 오월로 인해 마음아프고 고통받는 사람이 있다면 나는 축제에 끼어들 생각이 없다. 축제로 즐거울 생각이 없다”고.
예기플라타너스의 공연은 5·18기념공원(22·23일 오후 7시30분), 지하철 상무역(오후 6시), 5·18자유공원(24일 밤 10시30분·26일 오후 7시30분), 지하철 쌍촌역(25일 오후 6시) 등으로 이어지며 27일 새벽4시 도청앞 공연으로 마무리된다. 이번 공연으로 〈2004년 5월〉이란 제목의 다큐멘터리도 만든다. 24주년을 맞는 5월의 광주와 그곳에서 만나고 스친 사람들의 기록도 그 속에 담긴다.
내년에도 오월연극을 갖고 광주에 올 것이냐고 물었다. “아마도…”란 말 끝에 “살아있는 동안은”이란 답이 덧붙여져 돌아왔다.
남신희 기자 miru@gjdream.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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