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가슴 저 밑바닥 깊은 곳에서 끌어올려 내나 `말’이 되어 나오지 못하는 소리들을 토해내는 할머니. 제주 4·3때 입은 총상에 턱이 날아가버려 평생 얼굴에 무명천을 싸매고 살아온 진아영 할머니다. 그래서 `무명천 할머니’.
지난 50여 년동안 `그 누구도 들어주지 않았던’ 할머니의 아픔을 들어주고 영상으로 담아낸 이가 있다. 김동만(36·제주민예총 영상위원장)씨.
5·18자유공원에서 열린 `4·3 후유장애자 생애사 아카이브전-몸에 새긴 역사의 기억’(5.15~5.24)전에 영상다큐멘터리 `무명천 할머니’와 `유언’, 그리고 후유장애자들을 담은 사진작품을 내놓은 그가 전시 마지막날인 24일 전시장을 찾았다. 4·3 피해당사자인 고태명, 고윤진, 양성보 할아버지를 비롯, 사진작품을 함께 작업한 고성만(제주4·3연구소), 전시기획·진행을 맡은 김영훈(제주 민예총)씨와 함께 5·18 묘지도 참배했다.
50여년 침묵 넘어 4·3 진실 이야기
“아무도 알아들을 수 없는 할머니의 말. 할머니는 평생 하고 싶었던 말을 토해내려 했지만 전해지진 않았다. 하지만 그 `말이 되지 못한 말들’이야말로 우리에게 더 많은 말들을 전해주는 것 같다.”
`생존이 곧 비극’이 될 만큼 끔찍한 상처를 입은 진아영할머니. 할머니가 평소 싸매고 다니던 무명천도 이번 전시에 함께 나왔다. 분단과 냉전으로 굴절된 한국현대사의 비극이 그 천조각 하나에 다 집약돼 있다.
그는 이번 전시와 관련 “잘못된 보상기준으로 정당한 보상을 받지 못하는 후유장애자들의 진상을 알리는 데도 의미를 두었다”고 말한다. 뒤틀리고 패이고 구부러진 육체로 국가가 저지른 `야만과 폭력의 역사’를 생생하게 증거하는 후유장애인들. 하지만 그들의 고통에 대한 올바른 규명과 보상이 이루어지지 않는다면 야만은 과거형이 아니라 여전히 현재진행형이다.
제주방송 PD였던 그는 지난 96년부터 4·3항쟁관련 영상작업을 시작했다. 지난해말엔 직장을 아예 그만 뒀다. “좀더 깊이있고 충분하게 접근하기 위해서”였다.
제주에서 자란 그가 4·3에 대해 알기 시작한 것은 대학 다니면서부터. “사실 4·3에 대해 말할 수 있게 된 게 그리 오래되지 않았다. 87년부터나 겨우 이야기됐을까. 그 이전에는 은폐와 금기의 대상이어서 `쉬쉬’ 하는 가운데 부분적으로 전해 들었을 뿐이다.”
제주4·3연구소에서 활동해온 그는 큰 틀로서는 제주지역 민중 저항사에 관심을 갖고 있으며 그중 현재 집중하고 있는 것은 4·3이다. 내년께 4·3을 총체적으로 다룬 5부작 다큐를 완성할 계획이다.
이 땅 아픔 연대하는 데 오월정신 있어
이번 전시에 나온 또다른 영상다큐 `유언’은 마을 사람들이 떼죽음을 당한 `박성내 사건’을 증언한 김태준 할아버지를 중심으로 한 작품. “젊은 사람들이 그 지방에 살고 있으면 그 지방 사는 가치를 해야지요. (4·3 관련) 사실이 이렇다는 건 젊은이들이 알려줘야지”라던 말은 할아버지의 돌연한 죽음으로 `유언’이 되고 말았다. 그는 그 말이 김 할아버지가 자신에게 남긴 숙제라고 생각하는 사람이다.
그러므로 그는 지역에 산다는 것은 “지역에 대해 안다는 것, 지역의 역사와 현실을 고민한다는 것”이라고 정의한다.
올 5월 광주에서 전시를 열게 된 것과 관련, “오랜 세월 은폐와 왜곡 속에 놓여왔던 두 역사적 사건 4·3과 5·18의 또다른 연대라는 점에서 의미있다”고 말하는 그는 “광주오월의 정신 역시 이땅 역사와 현실속의 수많은 아픔과 싸움을 함께 하는 데 있을 것”이라 강조한다.
자신이 하는 작업속에 `진실과 저항이 담기기를 바란다’고 말하는 그. “할아버지가 아이들에게 옛날이야기를 들려주듯 나는 `영상’으로 다음세대들에게 이 땅 역사이야기를 들려주고 전하는 사람이고 싶다”는 게 그의 바람이다.
남신희 기자 miru@gjdream.com
